오직 예수 -  호라티우스 보나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믿음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럴 것입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에게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여러분이 만족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평강을 얻기에 앞서서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워지기를 기다린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평생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에 안식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운즉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굉장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만족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로 만족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더 이상 무엇을 바랍니까? 여러분이든 그 어떤 죄인이든 그리스도로 만족하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만족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곤란에 빠뜨리도록 마십시오. 다음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더이상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만유로 삼은 사람으로서 기뻐하며 여러분의 본분을 계속 행하십시오.

 

세례 요한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아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은 마치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한 인상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작에서도 중간에서도 끝에서도 자아에 대해서는 불만족이요 그리스도에 대해선 만족이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영광스러운 대상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그리고 믿음 자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믿음이 제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는 만유시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나를 보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바라보라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바라보라고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믿으라고, 그 믿음의 탁월한 자질을 확인하라고, 또 여러분의 거듭남을 알라고 요구하시며, 그런 이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평강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에 만족할 필요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 어떤 개인적인 자격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그것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죄인으로 느낀다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의 느낌에 대한 끝없이 난해한 조사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이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악 됨을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이것을 근거로 해서 행하십시오.

 

복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공통되는 것 외에는 우리 자신에 관한 그 어떤 입증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한 가지 입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믿음이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내 믿음이 내게 만족스러운가?"가 아니라, "나는 궁핍한 죄인인가?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으로 인해 만족하고 있는가? 입니다.

 

여러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내 사랑이 내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값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믿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측은히 여기는 사랑이요, 다른 한 가지는 믿는 자녀들을 향한 기쁨과 만족의 사랑입니다.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집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는 충실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동일하게 지극히 진실합니다. 비록 그 종류가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련한 죄인으로서 사랑하십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최초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추하고 더러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값없이 풍성한 사랑은 죄인을 만족시키고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여러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회개가 내게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과거에 여러분의 회개에 만족을 했더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나는 내 회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 회개는 그 자질도 훌륭하고 그 분량도 훌륭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지독한 교만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회개에 만족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평강의 기초로 삼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으로 양심을 평온케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고 싶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하기 전에 여러분의 회개에 대해 만족하고 싶다는 여러분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컨대, 여러분은 종교적인 느낌에 있어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만족하고 있지 못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종교적인 느낌에 대해서 모두 만족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관해서 매우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고, 율법과 복음이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에 관해서는 매우 경솔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느낌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는 면에서 여러분이 옳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즉각적으로 믿는 중차대한 의무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모든 느낌을 제대로 다 갖추기 전까지는 복음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그것은 결코 죄인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특별한 적합성과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택하고, 여러분의 모든 느낌이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본성에 대한 자기 존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너무 높게 평가하면, 우리는 전적인 죄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 같은 개인적인 자격이 없는 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싫어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크든지 작든지, 믿음이든, 느낌이든, 아니면 행위이든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려는 이와 같은 모든 시도를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성령으로 하여금 슬퍼하며 여러분을 떠나가도록 만들 수밖에 없는 길을 추구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선함 때문에 여러분을 만족해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히 만족스러워 하시는 것이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독생자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시 하나님의 길을 취하고 그리스도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욱더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죄 사함과 평강은 지체 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은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이 이 중대한 일에 있어서 자신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외에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든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만족하게 된 사람의 자격 외에 다른 어떤 근거로도 여러분을 영접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충분히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설령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모든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분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http://www.cyworld.com/misspark0113/4295414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4) 죄의 형벌 참된 진리(드흐라프)

4) 죄의 형벌

보편적으로 말하면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빼앗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만 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와 삶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은 자들도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의미로 말하는 이 없다. 이 없을 때 그들의 존재는 내적으로 끝없는 모순을 겪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버림 받은 자들은 그들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채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내적 갈등 속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모든 죄는 본질상 지독한 죄악이다. 어떤 죄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의해 스스로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르면 죄에 대한 처벌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 죄가 있는 곳에서는 자동적으로 보응이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 우리는 스스로 삶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형벌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 측에서 의도하신 요소, 즉 언약의 공의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가 있다. 따라서 형벌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보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 차이를 영원한 형벌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바깥 어두운 곳이란 하나님께 영원토록 버려진 상태이다. 그런데 죄인은 그 상태를 스스로 원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한번도 원치 않았으며, 이에 자기 소원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적인 보응이다. 한편 성경은 영원한 불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의 공의가 훼방된 것에 대해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나타내신다. 지옥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거절된 사랑의 공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인간의 몸과 영혼에 발생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해한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및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잃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돌아선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되며 철저하게 외롭게 된다. 하나님은 시험적 명령을 주시던 때에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2:17)라고 저주 및 처벌을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로 떨어지자 주께서는 당장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언약의 은혜를 통해 그에게 찾아가셨다. 따라서 그 이후로 즉시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형벌을 보류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언제 형벌이 집행될지 정확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끈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죽음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빈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세상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당장 언약의 회복을 주도하셨다. 이는 이미 작정되어 있는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의 끈은 곧바로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언약 안에서 온 세상과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은 모든 각 개인이 구속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머리로 한 유기적 연합체인 이 세상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열매없는 가지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이에 성경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104:35)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불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의 언약의 열매인 많은 축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의 결과들이 신자들에게 당장 최대한으로 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구별하는 특징을 가진다는 뜻이다. ,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인류 전체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내가 너(, 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3:15)는 말씀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자기에게 영원토록 있게 하시려는 인류와 사탄의 관계를 끊어놓으셨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더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보응의 의미로서의 형벌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내에서의 징계였다. 그 징계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3:19)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 육체의 임시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라는 격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원한 영적인 삶으로 변화할 수 없다. 이는 위협적인 자연적 죽음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여인의 삶과 남자의 삶에 대해 각각 심판을 선포하실 때 나타난다. 그 심판 안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 심판을 통해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염두하게 될 때 영원한 죽음과 일시적 죽음이 구별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은혜가 임한 결과로 인하여 불택자들은 당장에 궁극적인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오늘날도 존재하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여전히 은혜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연결된 끈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의 결과들이 당장 그들 안에서 최대한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 개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는 택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하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른 영원한 죽음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붙택자들의 영원한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거절된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심판과 자비가 상호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사건들의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나타낸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징계로, 불택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일시적인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세상에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재난에 적용된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심판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심판 또한 그 당시 당장 간섭하였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딪히게 된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을 통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8:21) 부르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다(, 1:18).

 

[출처] 4) 죄의 형벌|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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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


욕심을 버린 자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견딜 수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 하나를
마음 속에가진 자일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 자는
찬 바람이 몰아치는
광야에서도 견딜 수 있는
따스한 동굴 하나쯤 마련해
가지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 안에서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이라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남에게 주느라고 여념이 없을 때
슬쩍 찾아와 피어납니다.

움켜쥐고 있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향기로운 꽃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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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Who are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부입니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우선 우리들은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빈민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영세민을 위한 식당에 가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들, 형무소나 정신 병원,
혹은 요양소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가족 중에, 교회 안에,
또는 직장에 있을 수 있습니다
더욱 가까이는, 사랑받지 못하며,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그리고 혹사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 자신이
바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 멀리 떨어져 있든, 가까이에 있든
또는 우리들 자신 안에 있든,
우리가 그 가난을 보고 경험할 때,
우리는 교회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형제 자매로서 손을 잡고,
우리의 깨어짐과 필요를 고백하며,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의 상처를 고쳐 주며,
그리고 빵을 떼기 위하여 예수님의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가난한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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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이상' 행보에 예장합동 '반발' 확산

WCC 공동선언, 다락방 이단 해제 결의 등 최근 한기총의 행보에 회원 교단인 예장합동 총회 목회자들의 반발이 일파만파 거세지고 있다.


▲예장합동 총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한기총 WCC 공동선언과 류광수 이단 해제 결의에 앞장선 교단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를 촉구했다.ⓒ뉴스미션

비대위 “한기총 책임자들 교단에서 제명하라”

그간 WCC를 종교다원주의, 용공주의라며 맹공을 퍼부었던 한기총이 돌연 WCC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에 대한 이단 해제 결의를 하자, 회원 교단인 예장합동 내부에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보수교단으로 WCC를 반대하며 대책위원회까지 구성했던 예장합동은 이번 한기총의 WCC 선언문 발표에 예장합동 지도자들이 앞장선 사실에 반발하며 이들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예장합동 총회의 정상화를 위한 노회장들의 모임인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서창수 목사, 이하 비대위)는 23일 기독신문에 성명을 내고 한기총과 관련 책임자들을 강력 규탄했다.

비대위는 성명을 통해 “한기총의 WCC 부산총회는 배도 행위이므로 협력 선언을 거부한다”며 “이를 주도한 한기총 회장 홍00 목사를 소환하여 한기총 회장직에서 사퇴케 하고, 본교단 목사직에서 제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비대위는 임의로 한기총의 WCC 부산총회 협력 선언에 서명한 길00 목사에 대한 증경총회장 직분과 그 예우를 중단하고, 본교단 목사직에서 제명하여 줄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예장합동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던 다락방 류광수와 관련해 “이단 해제를 주도한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전문위원회 위원장 김00 목사와 한기총의 이단사이비대책전문위원회 서기 유00 목사를 엄벌하여 본 교단의 목사가 아님을 확인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교단 일각에서도 ‘적극 대응’ 주장

예장합동 총회 내에 구성돼 있던 WCC 대책위원회도 오는 25일 중앙위원과 지역위원이 모두 모이는 연석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키로 했다.

이날 위원들은 한기총의 WCC 공동선언과 관련해 토론하고, 분명한 교단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아울러 공동선언에 관계한 이들의 책임 추궁도 예상된다.

또 교단 증경총회장단 역시 성명 발표를 통해 교단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총회 지도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할 예정이다.

오는 30일 예정된 교단 정책 실행위원회에서도 관련된 논의가 있을 예정이다. 전국 각 지역의 대표 인사들 75명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한기총과 관계자들의 독단적 행보에 대한 이의제기와 원인 규명 주장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교단 일각에서는 교단 입장 발표와 성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교단의 한 목회자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거나 관계자를 소환해서 경위를 조사하는 등 교단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며 “WCC나 다락방 이단 규정 문제는 교단의 정체성 문제인데, 그 정도는 해야 보수 교단의 위상이 서지 않겠느냐”고 일갈했다.

연합단체 참여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교단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경 대응의 목소리도 나오는 만큼 이번 실행위원회 결의에 이목이 집중된다.

윤화미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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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이혼과 재혼: 성경적 원리의 적용

결혼
1. 결혼은 기본적인 인관관계이다.

①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지상에 살도록 창조하신 것의 특성은 서로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를 의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이며 또한 육체적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2:18) 처음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돕는 배필(배우자)이었으며, 옆구리에서 취한 자였으며,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으며 그의 완전한 짝이었다.(창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권과 책임을 나누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이 확실하다.

②하나님은 평생 일부일처의 연합을 이루는 결혼을 의도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사랑과 충성으로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마태복음 19: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연합에 대한 헬
라어 단어는 “아교를 붙이다” 혹은 “가깝게 묶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 것을 사용 하였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일부다처제의 첫 번째 경우는 가인의 계보이었음을 볼 수 있다.(창4:19)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처제가 이상적임을 보여준다.(시128:3, 잠5:18, 31:10-29, 전9:9) 예수께서도
처음 하나님의 이상적인 결혼도 일부일처제였음을 말씀하셨다.(마19:8)

2. 결혼은 언약을 포함한다.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해지는 엄숙하고 구속력 있는 계약 즉 언약이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세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2:14) 에스겔은 결혼의 개념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8) 이상에서 살펴 볼 때 남편은 아내에게 맹세하고 (충성을 서약하
고) 깨뜨릴려고 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언약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희생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좀더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언약을 맺는 것”(cut a convenant)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와는 구별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어 헤세드(hesed)라는 말로써 “충성스럽게 언약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혼
1. 하나님은 이혼을 싫어하신다.

①“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지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작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시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시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2:14-16) 이 구절은 이혼이 자기 배우자에 대하여 궤사(속이는 것, 충실치 못한 것)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잘못된 심령에서 나오는 위법한 일이다. 더욱이 나쁜 것은 그것이 “경건한 자손”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깨어지면 건전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다.

②“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이혼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멍에를 부러뜨림으로서 해롭게 된다. 이 목적은 짝으로써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복
종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엡5:21-31에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2. 율법은 이혼을 제한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고대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많은 다른 풍습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들의 잘못된
관습에 대하여 제한을 두시고 그들을 지도하시려고 시도하셨다. 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했을 때 그들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분명한 잘못을 범하였다. 예수는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분이지 그 당시에 성행하던 것처럼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3,7,8) 이것은 신명기24:1-4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모세가 인용한 히브리어는 이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혼을 유추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부정한 것 [이 히브리어 단어는 번기를 덮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며(신23:12-14), 노아가 벌거벗은 것(창9:21-23), 그리고 술취한 여인으로 상징한 에돔(애가4:21) 등과 관련된 것이며, 이는 간음
이 아닌 도덕적, 성적 불결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자는 율법에 의하여 죽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서주어 집으로 내어보내고 그 여자가 집을 나가 남편을 구하였는데 도 그 남편이 그 여
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에서 내어 보내거나 혹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인 그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를 내어보냈던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다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아무리 타당한 이유처럼 보여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쩌면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미 재혼했으며 그는 그 여자를 아내
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3. 예수는 이혼을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배치되는 것으로 금하였다. 예수는 마19:5,6 과 막10:6-9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4.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금하였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니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
리지 말라”(고전7:10,1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게 될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5.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7:12-16) 이
와같이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이혼할 것을 고집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굳이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 예수께서는 음행이 관련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①(마5:32, 19:9 참조) 이것은 허용
일 뿐이지 명령은 아니다. 음행에 대한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특별히 반복적인 간음을 포함하기도 하나 보통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 습관적으로 행하는 성적 부도덕성을 의미한다(포르네는 창녀를 의미함) 몇몇 학자는 여기서 음행의 의미를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하지만 이것은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예외로 규정한다. 이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두 구절을 근거로 교리로 만드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년왕국의 길이가 비록 성경 한곳(계20:2-7)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천년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같은 원칙이 다른 성경적 가르침에게 적용된다. 어느 한 구절이 어떤 단일 주제에 대한 진리의 모든 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떠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취해야 한다.

재혼
1. 이혼이 재혼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율법은 용납한다. 이것은 이미 인용한 바있는 신 24:1-4의 구절로 보아 명확하다. 동일한 구절은 율법이 재혼에 대하여 모종의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2:11은 불신자와 재혼하는 것을 정
죄하였다. 제사장에게는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금지되었다.(레21:7)

2. 예수는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이혼한 사람들의 재혼을 금하였다. 예수는 재혼을 간음행위 즉 첫 번 결혼의 언약에 대한 죄로 정죄하였다.(마5:32, 19:9, 막10:11-12, 눅16:18) 그러나 예수는 기본적인 문제가 이혼 그 자체임을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결국 재혼하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간음을 행하고 새 배우자에게도 간음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의 근본 목적은 첫 번째로 이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마5:32 은 예외적인 조항을 더해 주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것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자와 이혼한 남편인 이 여자로 간음하게 아니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이미 간
음하였기 때문이다.

4. 마19:9 역시 이러한 예외적인 조항을 지니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사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음행한(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이혼하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 이니라” 여기서 예
외는 성적 부도덕성 때문이지 단순한 한번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적으로 부도덕한 습관은 회개, 고백, 용서 그리고 회개 과정을 통하여 다루어져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그 결혼을 유지시켜야 할 것
이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은 이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 이니 ”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음행 혹은 성적 부도덕성은 침대와 식탁을 따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하지만 결혼관계를 끊거나 그것을 해체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과 맞추기가 어렵다. (고전7:2-5) 그러므로 대부분의 개신교는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라
는 구절에 적용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혼이 필요한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재혼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마19:9에서 예수께서 사람이 재혼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구절은 이혼과 재혼을 다루고 있
으며 문법상 예외 조항은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내버리다”는 말에 대한 헬라어 “아폴루오”라는 단어는 마5:31과 막10:2-12에 인용된 신명기 구절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거기서 “내버리다”는 말은 확실히 결혼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의
미하였다. 예수는 이혼의 본질을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음행(포르네이아, 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이외의 다른 변명이나, 이유나 원인을 이혼의 조건으로 하는 것을 거부한 것뿐이다. 또한 롬7:1-3 고전7:39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선언에 대하여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혼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만 깨어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기본적인 원리를 진술한 것으로 예외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롬7장은 율법 아래에서 남편이 이혼할 수 있지만 아내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율법에 의해서 남편이 죽을 때까지 메여있었다. 또한 율법 아래서는 간음에 대한 벌은 죽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죽음의 형벌은 결혼관계를 끊기 위하여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끊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5. 고전7:15도 예외를 담고 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는 말은 강한 표현이다. 롬7:2에서 바울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자의 종속을 설명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에만 자유케 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여자의 독특한 위치를 사용한 것뿐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으나(신4:1-4), 여자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여자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건전한 성서해석학의 원리는 여기에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울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하고자 할 때 신자가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면 그는 이에 대해 자유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혼하려 하고 주도하는 이가 믿지 않는 배우자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유는 그(혹은 그녀)를 떠나게 하는 자유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혹은 그녀)는 어차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신자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재혼 할 자유가 있는 의미처럼 드려진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는 재혼 할 것을 권하지 않는다.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고전7:27,28)

6. 재혼은 새로운 계약 혹은 언약이다. 어떤 사람은 재혼한 자는 간음 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간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 진정한 회개는 도적이 도적질을 그만두는 것처럼 그 죄를 그만두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재혼한 사람이 새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계속적으로 간음을 행하고 있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결혼과 도적질은 그렇지 않다.
잘못되어진 재혼은 전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간음행위가 성립된다. 이것은 전에 맺은 계약을 파괴한 것임으로 전 배우자는 자유하게 된다. 한번 재혼한 사람은 또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충실할 책임이 있다. 신24은 결혼계약으로 돌아가는 것이 잘못임을 보여준다.(호세아는 다시 가서 아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을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과 잘못된 계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바라셨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를 돕기 위하여 우박의 기적과 해를 길게 하는 기적을 행해 주셨다.(수9,10장) 이사야는 아하스가 앗수르와 계약 맺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아하스는 듣지 않고 맺었다.(사7장) 그리고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 계약을 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애굽에 가려는 것을 경고하였다.(사30,31)

교회안에서 이혼과 재혼의 위치
1. 모든 중생한 신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받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할례받은 자, 노예의 신분에 있던 자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법적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당시
에 지니고 있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7:1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을 받아주셨다.(행10,11장) 그 당시 로마인들 중에는 이혼
과 재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고넬료의 집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살기를 원하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 계속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이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은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재혼한 사람은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없다. 장로(목사에 해당)나 집사의 직분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의하여 제한된다.(딤전3:2,12)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일부다처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당시 일부다처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지만 이혼과 재혼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굉장히 성행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에서 이러한 직분을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에 대하여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들이 교회 밖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증거를 위해서나 복잡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이러한 조건과 다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성의 기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집사의 특별한 사역에 대한 자격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혼한 사람을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몸의 모든 지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역은 성령에 의해서 주신 것이다. (롬12:6-8, 고전2:11, 엡4:16)

총회에 의하여 수정 채택된 조례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적용 제 8 조 5항

회원
1. 지금 많은 크리스찬들 중에 지난 날 죄악 가운데 살 때 결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이런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지역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복잡한 결혼관계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추천한다(고전7:17,20,24)
2. 우리는 현재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회원으로 받지 말아야함을 추천한다.

재혼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기준을 낮추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그리스도의 일에 많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합법적 수단과 가르침을 통하여 이혼을 배격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음행이나 간음의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신자가 이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19:9) 이러한 예외적인 환경이 있었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 의하여 이혼당했을 경우 우리는 재혼 문제를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정하기를 추천한다.(고전7:15,27,28)

개교회의 지도력
1. 신약성경이 이혼하고 재혼한 신자가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받는 것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지역교회가 이 기준을 준수할 것을 추천한다.(딤전3:12, 딛1:5-9)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에게 적합한 다른 봉사
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추천한다.
2. 추천은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지역교회는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 (헌법 제 11조에 의거하여)

결혼식 주례
1. 우리는 조례 8조 5항 2목에 기술된 예외적 상황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면 전 배우자가 현재 살아 있는 한 경우 결혼을 주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정받지 못한(위와 같은 경우) 결혼의 주례를 행한 본 교단의 목사는 결백하게 속아서 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단에서 제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회 목사는 결혼식 집례하기 전에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지침에 따라 결혼식 신청자와 상담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의견에 결혼 당사자들이 적절한 사려나, 지혜나 진지함 없이 결혼을 하려 한다고 판단 될때 결혼식 집례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우리는 8조 5항의 2 목에 있는 예외적인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의 재혼이 목사의 양심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사실이 그렇다면 목사는 결혼식울 집례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자격
하나님의 성회의 결혼한 목사로서 목사나 그 배우자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에 그 목사직을 거부한다.(7 조 5항의 2 목과 3목 참조)
1. 우리의 한 지역총회가 다른 지역총회에서 자격증을 받은 설교자에게 목사안수를 행할 때 목사 안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안수 받기를 원하는 지역총회에서 적어도 1년간 자격을 유지해야 하며, 전에 자격증을 받았던 지역총회의 임원으
로부터 확인 이서가 있을 때까지 목사 안수를 보류할 것을 추천한다.
2. 우리는 결혼한 사람이나 그의 배우자 중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경우 지역총회가 그러한 사람에게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8 조 5항 3목 참조)
3.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신청자의 전 결혼의 취소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거나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적으로 부합한지, 혹은 이혼이나 결혼해체의 경우 그 상황이 결혼 취소로 분류 될 수 있는 상황인지 결정할 권위를 보유한다. 이러한 신청은 거짓이나 사기에 의한 불법적인 결혼이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하고 만족할 만한 증거와 함께 제출되어야 한다. 본부총회 실행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상소는 본부총회 총대회의에 보내질 수 있다.

①)어떤 사본들은 “다른 데 장가드는”이라는 부분을 생략했지만 시내 사본을 포함한 다른 사본들은 이 부분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문맥상 적합하다. 이 예외적인 조항을 생략하는 것은 아무런 사본적 증거가 없다.(존 머리, 이혼. )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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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부에 있는 가장 약한 자들
(The Weakest in the Center)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은
머리도 아니고 손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름답지 못한 부분'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된 우리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 즉 나이 든 사람들, 작은 아이들,
불구자들, 정신 질환자들, 굶주린 자들,
그리고 병 든 사람들이 참된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은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또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답게 꾸밉니다"(고린도전서 12:23)
가난한 자들이 교회의 가장 값진 중심부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들 가운데에 진정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크리스천의 자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의 본질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예수님을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 자신을 위하여

1.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는 ‘여호와(이스라엘의 하나님)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인명, 즉 여호수와의 그리스어 음역(音譯)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예수스’ 입니다. 또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 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 영혼의 구원과 대속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 땅을 골라 세상에 오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33세라는 짧은 생애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원형을 남겨놓으신 성자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진리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된 책을 가리켜 우리는 성경(Bible)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책은 우리 인류에게 인쇄술의 혜택이 주어진 이래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어 읽혀온 복음의 책으로 꼽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언제 어디서고 ‘예수’ 라는 이름을 무심결에 슬쩍 한번 떠올리기만 해도 그 순간에 당장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운이 없다가도 한 순간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힘이 생겨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내가 실제로 겪고 있는 이 놀랍고도 신기한 축복의 체험을 젊은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욕구 하나 때문에 지금 어렵사리 쪼그리고 앉아서 이 책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책을 수십 권 써도 다 담지 못할 것입니다만, 나는 내 자신의 존재가 바로 그 살아 있는 증거물이라는 생각을 하루에 열 번도 더 하면서 삽니다. 성경말씀 안에는 우리 인간이 극도의 혼탁과 불안으로 가득한, 온갖 함정과 수렁투성이인 이 위험한 세상을 과연 어떻게 옳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모든 안전한 길과 방법들이 마치 밝은 횃불처럼 명쾌한 해답으로 낱낱이 다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잘 믿는 ‘작은 예수’ 들을 따라 성경에 적힌 말씀대로 예수가 가신 방식의 길을 조금씩 살펴나가다 보면 말씀이 뜻하는 바 언젠가는 기필코 실제 예수의 참모습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뜻 생각하기에 머리가 참 명석해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명석한 머리만 잘 쓴다면 나름대로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세상에 날 때부터 천성이 착하여 마음만 잘 먹으면 평생 동안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내내 착한 삶을 살 수 있을 듯이 여겨집니다. ‘인간은 머리가 명석하다
‧‧‧, 그리고 인간은 본성이 착하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인간은 머리가 명석하고, 또 착하기도 하다는 얘기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머리가 명석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머리로 좋은 일과 더불어 나쁜 일도 항상 함께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원죄(原罪)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명석한 두뇌로 착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죄를 생각하고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원죄란 요즘말로 해서 ‘죄 성립 이전의 예비적 죄성’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은 그 죄성을 그냥 그렇게 예비적 죄성으로 잠재, 잠복시켜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지 끊임없이 그것을 야금야금, 꼼지락꼼지락 실천하기까지 합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학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직업의 여하를 막론하고,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거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정체이자 인간된 숙명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유일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면서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합당한 삶의 실제 모델까지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기독교의 이 교리는 그와 비슷한 다른 어느 종교의 교리보다 우위합니다.

3.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산신령에게 하듯 교회에서 무작정 복을 빈다고 쏟아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복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세상이라고 하는 인간 사회의 우회경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챙겨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대개 ‘우연’ 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싸여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모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에는 이유 없는 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쯤 눈치채셨을 줄 압니다.

복을 받고 싶으면 복을 빌기 이전에 우선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자격과 순서라고 하는 게 바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지요. 복을 받고 싶으면 복부터 빌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우선 순종하고 볼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내 주위의 누군가들을 매개체로 해서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복의 발생현장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쉬운 예로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긍정적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보다 복 받을 확률이 현저히 높습니다. 이웃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온유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은 조급하고 과격한 사람에 비해 복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웃에게 호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너그러워집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복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웃에게 덕을 베풀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선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선해지면 선행도 많이 하게 됩니다. 선행은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화()도 비켜갑니다. 좋은 이웃들이 내 편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에 성공도 빨리하게 됩니다. 이웃들이 돕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복입니다.

복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맨발로 밟고 가신 바로 이 땅! 우리의 땅 위에 있습니다.


-이웃 게시판에서

제2장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
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
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 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
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17:16, 고전2:11 . 그러나 학1:14, 17:16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6)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
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4:24, 8:16, 9:32,33, 10:1, 1:32, 3:15, 6:17,18, 9:1 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8:28,32, 9;32, 12:22, 5:15-18, 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가정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11:24-26, 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 4)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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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슬람(Chrislam)이란 무엇인가?

노종해 목사


“크리슬람“(Chrislam)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한 명칭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을 해소 시키고, 대화와 친교, 교류, 평화를 이루려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연합하여 예배도 드리는 운동으로 미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운동이다.

크리슬람(Chrislam)의 발단

“크리슬람“의 발단은 1980년대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에서 이다. 나이지리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반반인 지역으로 갈등과 투쟁이 극심한 지역이다. “크리슬람“은 신흥종파 지도자인 틀라 텔라(Tela Tella)와 삼손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 의해 서로 다른 두 방면으로 시작된 운동이며, 성경과 쿠란을 모두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예배 시간에 성경과 쿠란을 같이 읽으며, ”하나님“과 ”알라“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짖는다.

틀라 텔라는 산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평화를 위한 사명을 받았고, 이 사명을 감당할 “이펠루와”(Ifeoluwa) 명칭도 지어 주셨다고 주장한다.(*“Ifeoluwa”란 “The Will of God Mission“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크리슬람(Chrislam)운동은 1999년 삼수딘 사카(Shamsuddin Saka)에의해 설립되었다. 무슬림 가정에서 출생한 자칭 예언자라는 삼수딘 사카는 “알라”를 믿고 메카를 4번 순례한 “하지”(Haji)였다. 사카가 두 번째 메카 순례할 때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라”는 영감을 받고, 나이지리아 라고스((Lagos)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크리슬람”(Chrislam)을 설립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동일한 하나님이니 함께 예배드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사카는 이때부터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간의 융합과 평화 위해 일하였고,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삶의 고난과 시련에서 크리슬람이 기적과 구원으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영적인 길로 믿었고, ”크리슬람“이 아프리카, 중동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카의 집회처는 쿠란 암송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독교 찬송과 무슬림 찬양을 요란하게 부르며 성령강림 펜테고스탈 예배(Pentecostal service)를 드린다. 삼수딘 사카는 설립 때부터 “크리슬람”이라 하였고, 종교갈등을 치유하는 “허발리스트”(herbalist)라 불렸다. 틀라텔라는 자신의 아이디어인 “이펠루아”(Ifeoluwa)를 삼수딘 사카가 “크리슬람”(Chrislam)으로 도용하였다고 주장한다.

“크리슬람“ 운동, 미주로 확산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지가 2006년 1월 26일 자에 “크리슬람 운동”을 소개하며, 사카를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을 치유하는 “약초허브”(herbalist)라 소개 하였다. 사카는 미주 방송에 큐란과 성경을 사용하는 사제로 그의 설교가 전파되었고, “크리슬람 운동”이 미주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테네시 주, 코르도바의 “하트송 침례교회“(Heartsong Baptist Church), 버지니아 주의 ”올더스케이트 연합감리교회“(Aldersgate United Methodist Church) 등에서 무슬림들에게 예배장소로 교회를 개방하였고, 추수감사절 등 절기에는 이웃 무슬림들을 초청하는 축제를 열었다. ”컴버랜드 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는 교회입구 간판에 ”크리슬람“ 집회를 알리고, 아랍어와 함께 표기하여 광고하고 있다. 즉 무슬림들을 위해 ”금요예배로 모이며, 첫 크리슬람 집회처“(Friday Prayers Our Specially, Salat Al Jummah; First Chrislamic Congregation Baptisms)라고 교회 간판에 표기하고 있다.

“크리슬람”은 교회가 “크리스챤과 무슬림들을 위한 교회”로 여기고 있으며, 주일에는 목회자 가운입고 예배 인도하며, 금요일에는 교회를 개방하여 검은 스카프를 쓴 무슬림들과 예배드리고 있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모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거슬리는 용어와 표시는 사용치 않고 서로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크리슬람”, 정치권에도 등장해

릭워렌 목사는 2009년 1월 버락 오마바 대통령의 취임식 때 ”예수아, 이사(Isa), 헤수스, 그리고 지져스 이름으로 아멘“하고 기도하여 복음주의 교회들에 충격을 주고, 세계 기독교계의 주목 받고, 논란을 일으킨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 논란은 ”이사“(Isa)에서 일어났다. ”이사“(Isa)는 아랍어로 ”예수“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식 축복기도에 이슬람 쿠란의 ”이사(Isa)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다. 이미 릭워렌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고 “크리슬람“(Christlam)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마바는 ”크리슬람“(Christlam)”을 이슬람과 평화 정책으로 삼아 교회와 정치사회로 퍼져 나갔다.

“크리슬람 운동”은 새들백교회의 릭워렌(Rick Warren) 목사와 크리스탈 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 방송인 잭 벤 임프(Jack Van Impe)가 선도를 이루었다. 릭워렌 목사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의 저자로, 슐러목사는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한국인들도 익히 알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라디오, TV 전파매체와 전산, 언론매체로도 파급되고 있다. 휴스톤, 아틀란타, 시애틀, 디트로이트 등 미주와 카나다로 퍼지고 있다. “크리슬람”은 종교평화운동인가? 종교혼합으로 새로운 종파인가? 정치종교운동인가? “크리슬람 운동”은 이슬람과의 평화를 이루려는 죠지 부시 대통령(George W. Bush) 정책에도 들어있고, 오바마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기독교계와 무슬림단체, 정치사회에 이 운동을 일으키도록 참여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미국으로써는 자국에 있는 무슬림들과 평화, 친선, 교류하는 것이 정치 정책적 이슈로 등장 할 수 있으나, 과연 “크리슬람 운동”으로 이슬람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국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기독교계에서도 논란과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크리슬람 운동”은 적그리스도의 영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크리슬람”운동은 오늘날 교회를 혼란시키며, 교회와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떠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부인“하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도 부인”하고 있다.

데이빗 돌린스(David Dollins)는 논설에서 명쾌하게 “크리슬람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크리스챤 포스트 2011.7.20.일자) 돌린스는 사도 요한서를 중심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밝히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임”을 선포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며, 교회의 순결을 거짓 교훈에서 지키자고 간곡히 권하면서, “왜 우리는 초대교회 교부들과 같이 교회를 옹호하지 못하는가?” 묻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 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3)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을 멸망케 할 이단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기독교 역사에서 이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제일 먼저 지적하고 배격한 분은 이슬람이 발생할 당시의 초대 교부인 다메섹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이였다. 또한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는 이단과 사이비,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 세속화 되지 않았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깨어서 굳게 성경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앙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라”이라 가르쳤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리라”(마24:25)

혹자는 미주에 일어나는 자연 재해와 기근, 폭풍과 폭설, 폭우, 경제 난 등이 하나님의 심판이요 재앙이라 하였다. 재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영이 뒤 흔들어 혼란과 분열, 비난, 조롱 속에 처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순수한 복음으로 지키며, 옹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증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복음의 증거와 사명을 지키며, 더욱 힘써 세계선교를 향해 굽힘없이 굳게 서서 나가야 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초점 맞추기(Focusing on the Poors)

다른 모든 인간 조직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끊임없이 부패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부를 갖기가 무섭게, 교회에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교묘하게 다루는 일,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일,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
그리고 노골적인 부패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초점을 맟춤으로써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그 사명을 완성하게 만듭니다
교회가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지 못할 때,
교회는 영적인 동질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의견의 분분함, 질투, 파워 게임
그리고 사소한 일들에 휘말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24~25)
이것은 참된 비전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서로서로에 대한 관심,
사랑 그리고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장소로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말세 고통하는 때의 20가지 특징

디모데후서 3:1-9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 중 갑자기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디모데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이때는 네로 황제가 로마의 왕으로 있었고 기독교를 향한 탄압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A.D.68년 경에 로마시에서 약 5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오스티안 가도'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 16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쓰는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재판관 앞에 끌려갔을 때,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들이 비난 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 복음이 핍박 받는 상황에서 다들 바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혼자 쓸쓸히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론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도망친 그들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디모데후서는 A.D.67 또는 68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홀로 있었습니다.

1 16절을 보면 바울을 찾아 방문한 사람은 멀리 에베소에서 로마 감옥까지 찾아온 오네시보로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 때문에 대단히 기뻐하며 그 가정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많은 도움과 위로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울을 버렸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딤후 1:15).

또한 디모데후서 4 10절을 보면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마저 바울을 버렸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데마는 바울과 매우 가까운 동역자였지만 복음이 핍박을 받는 고통의 때가 오자 이 세상을 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버렸습니다. 그는 바울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신앙마저 버린 것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볼 때 데마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기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내며 두려워말고 복음과 함께 담대하게 고난을 받으라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복음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을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와 1990년 정도에는 교회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의 결혼 선호 대상에 목사가 2위까지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와 복음이 사회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핍박을 받을 때는 신앙 생활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때에는 신앙을 버리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로 나뉘게 됩니다. 그것이 디모데후서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도 복음은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재산을 몰수 당하거나 심지어 원형 경기장에서 사람들의 노리개감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당부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올지라도 겁내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참교회의 역사 가운데 고통의 때가 있을 것이며 고통의 때에는 배도자들이 일어나 복음의 편에 선 자들에게 악한 짓을 할 것을 말합니다. 복음이 핍박을 받을 때는 세상도 핍박을 하지만 소위 교회라고 불리는 거짓 교회도 참 교회를 핍박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4 14-15절을 통해 구리 세공업자인 알렉산더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14-15).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 20절에도 나오는 인물입니다. ,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섬기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파선하고 양심을 버렸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배교한 자로서 심지어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에 불리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에게 직접 보복하지 않고 오직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자신의 모든 상황을 의탁하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는 알렉산더가 끊임없이 복음에 대적하며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더는 철저한 배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거짓 목사와 거짓 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내용이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이러한 배경 가운데 바울은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각오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생명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세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롱하고 핍박하더라도 복음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0-12).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장난이 아닙니다. 취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해 하나님을 달래어 신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러한 미신이나 무당같은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죄사함을 받고 그후 죄를 이기며 거룩하게 변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참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미래 언젠가 참 교회와 참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대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며 카타콤 같은 곳으로 숨어다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1).

여기서 말세란 마지막 날들이라는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반면 마지막 이라고 하여 단수로 표현되면 심판의 날, 또는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뚜렷하게 말세와 마지막 날을 나누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8절을 보면 정확하게 마지막 그 날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그러므로 말세의 끝은 마지막 날이며, 마지막 날이 가까울 수록 말세에 대해 언급한 특징들은 더욱 뚜렷하여질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은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전 세계적인 교회의 배도가 있고 그 다음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인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참조, 살후 2:1-12).

아무튼 바울이 경고한 말세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이 이를 때까지 참된 그리스도인과 참 교회가 고통을 받는 때가 종종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참교회의 고통의 때는 로마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시대에도 있었으며 지금 시대에도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역사만 하더라도 일제신사 참배와 함께 일본의 핍박이 있었고, 6. 25 동란과 함께 공산주의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세의 고통의 때를 야기시키는 특징 20가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특징은 교회에나 사회에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절대로 20가지의 사항에 해당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이 20가지 중에 하나라도 걸린다면 철저한 회개 가운데 그 죄성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성이 없어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20가지를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최고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이기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예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6-27).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 내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천국을 누리며 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돈을 사랑하며: 돈을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이유가 돈 때문에 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돈입니다. 이들은 돈 때문에 부모도 미워하고, 형제도 미워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은 삶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3) 자랑하며: 썩어질 세상의 미와 명예와 돈과 권력과 인기를 쉬지 않고 떠벌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자랑하는 자의 자세는 도도하고 상대나 남을 멸시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4:16).

4) 교만하며: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사탄은 교만하여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고, 하와 역시 사탄에게 속아 교만하여져서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여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의 끝은 멸망과 비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한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교만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5) 비방하며: 참람하며: 비방보다는 권위 모독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윗 권위에 대해 항상 그 권위를 허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부모의 권위, 남편의 권위, 사회에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모독스러운 말을 뜻합니다. 함이 자기 아버지 노아의 실책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모독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는 비방의 끝은 결국 최고의 권위자인 하나님에 대해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하거나 욕하는 것은 참람한 죄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느니라(벧후 2:12).

6)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서 불순종하며 대드는 것에 대해 성경은 큰 죄악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십계명에도 내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으니 이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 공식적으로 범죄한 것이 됩니다. 살인죄, 간음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 부모에게 거역하는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이 세상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부모 공경에 대해 대단히 엄격합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1:18-21).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7:16).

신약도 어김없이 부모 공경에 대해 너무나 마땅한 계명으로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6:1-3).

7) 감사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입니다. ,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든 자들에게 감사하는 자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복음과 무관합니다.

8) 거룩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제 멋대로 죄악을 저지르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특히 성적으로 마음과 육체가 더러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고 창기들처럼 마음과 몸을 아무렇게나 더럽히는 것이 거룩하지 않은 삶입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란 언약에 따라 행함이며 언약에서 벗어난 행동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최고의 언약은 결혼입니다.

9) 무정하며: 동물 중에 가장 무정한 동물은 뱀이나 파충류라고 합니다. 뱀은 새끼를 돌보는 일이 없고, 새끼 뱀은 날때부터 혼자 살며 스스로 살기 위해 속이는데 전문가입니다. 무정한 사람은 자연적인 애정마저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애정이 없고, 부부 간에도 애정이 없다면 무정한 사람입니다. 거짓과 쾌락에 깊게 물든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은 무정한 것입니다.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앙심을 풀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가 용서를 빌어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수심이 강하며 복수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독이 많고 시기가 항상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나아가 사회에 있으면 항상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11) 모함하며: 비방 또는 중상모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미움과 악의를 가지고 어떤 대상의 명예와 영광을 모독하는 발언을 뜻합니다. 종종 거짓과 과장이 동반되어 사실을 왜곡합니다. 비방 중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은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또한 나의 유익과 목적을 위해 어떤 대상의 연약함이나 과거의 상처나 죄악 등을 들춰내어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며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의도의 발언이 비방입니다. 비방이라는 단어는 사단이라는 뜻과 같으며 비방은 대단히 무서운 죄악입니다.

12) 절제하지 못하며: 감정이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혈기가 이에 해당하고, 술에 인 박히는 것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대부분의 중독은 절제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게임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갑작스러운 더러운 욕정에 조정을 당하여 음행 및 음란을 범하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는 죄성입니다. 자연적인 욕구, , 식욕, 수면욕, 성욕, 대화, 교제 등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죄성입니다. 요새는 문자를 주고 받는데 중독이 되어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면서도 카톡을 한다고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상태는 어떤 종류이든 돌발적인 큰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13) 사나우며: 싸우기를 좋아하고 말다툼하기를 일상으로 하는 습관입니다. 약자에게는 폭언과 폭력을 쉽게 일삼습니다. 항상 이기는데 관심이 많고 손해 보는 것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멋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의도적으로 어두움과 악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죄악이 멋인줄로 착각합니다. 모든 정상적인 것은 싫어하고 그 대신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좋아합니다. 진리보다 거짓을 더 선호합니다. 선한 사람보다 악인을 더 멋지게 여깁니다.

15) 배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 약속을 밥먹듯이 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으로서 거짓이 늘 따라 다닙니다. 가장 큰 배신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져버리고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배신은 간음 및 간통입니다. 우정을 저버리는 것도 배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16) 조급하며: 늘 세상 일로 인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조급한 사람은 늘 서두릅니다. 세상이라는 우상과 염려가 가득할 때 조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조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진리의 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조급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시대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함입니다. 따라서 인내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무조건 인스턴트가 제일 좋습니다.

17) 자만하며: 허세와 체면으로 우쭐한 상태입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자만의 상태에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자만한 상태에 빠지면, 사랑이 전혀 없고 거룩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생각과 깨달음만 옳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자만한 사람은 근처에 가기가 불편한 사람입니다.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팥죽 한 그릇에 가장 소중한 것을 던져 버리는 망령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보다 쾌락을, 기도보다 오락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보다는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을 더욱 따라는 것이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에서와도 같으며 또는 데마와같은 배도자가 됩니다.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외적인 부분과 형식적인 부분에서는 경건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죄악에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늘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십년 교회를 다녀도 신앙 인격에 있어서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 놀이와 종교적인 습관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 복음을 대적함으로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18절에 보니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에 관하여 저버리게 되면서 알렉산더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벌써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던 데마와 알렉산더와 같은 복음 훼방꾼들이 더욱 교계 내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지키며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돈과 권력과 인기와 아성을 쌓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능력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귀가 가려운 자들이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 세상의 축복을 얻고자 구름떼처럼 모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곳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아십니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만큼 복음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소드, 즉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목숨을 걸 만큼 힘차게 달려갈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도에 참으로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하셨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라(1:5).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1:8).

주께서 주를 의지하는 자들을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라(1:12).

주 예수님께 충성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2:8).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라.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2: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1-2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2-17).

그후 죽음을 앞둔 바울은 마지막 위대한 선포를 우리에게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우리는 기회가 날 때마다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늘 성경을 가까이 하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나의 죄 값을 치르시고 내게 죄 사함과 영생을 허락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시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내 죄성과 죄악을 이겨내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20가지의 죄성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 때에도, 복음이 이 세상에서 부끄럽게 여겨지며 패배자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종교 통합이 되어 복음만을 외치는 참 신자를 핍박하는 때가 될 때에, 나아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도 날마다 바른 신앙을 붙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가 죽기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주께 충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장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오가 없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의 의도

1. 우리는 원본을 참조한다. 본문비평문학은 원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은 원문에만 한한다고 말한다.(렘36:2)

2. 우리는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셨다.(암3:8)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출4:12, 125)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조명하심으로 독자가 기자의 마음에 있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2:12, 엡1:18, 18) 이와같이 사상과 언어는 계시와 영감으로 된 것이다.

3. 우리는 영감이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감에 의해서 성령은 성경의 기자들을 인도했다고 본다. 이와같은 성령의 감독은 기자들의 다양한 배경, 능력, 개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했고 성경의 정경에 나타낸 것처럼 그들의 쓴 모든 것에 적용된다.

4. 우리는 “무오성”을 “과오로부터 면제된” 뜻으로 정의하며 “무류성”은 “과오를 범할 수 없는 확실한” 뜻에 근사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 두 단어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오성은 성경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무류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오성과 무류성은 모든 성경에 적용되며 계시적인 무오성과 사실적인 무류성을 포함한다. 성경은 진리이다.(시11:34,160, 요17:17,19, 골1:5)

역사적 고찰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근에 있었던 현상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와 함께 영감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성경이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성령의 독특한 저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경의 문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5:18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Protepticus, IX, 82, 1) 그레고리 나지아누스(Gregory Nazianus)는 성경의 작은 선까지도 성령에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Oat., 2, 105) 순교자 저스틴은 인간과 하나님의 영감을 구분했고,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했다.(Apology I. ch. 36) 이레니우스 성경을 허위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Apology, ch, 18)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었으며,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 혹은 스콜라학파 시대에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위한 자료집 정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영감설에 관한한 비생산적이었다. 이 당시는 교회내의 다른 권위들과 성경의 위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아벨라드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감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할만한 증거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영감설을 채택하였는데 그 안에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가 포함되었다. 쯔빙글리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변호할 때 지속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라고 완전하게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기를 기뻐하신 유일한 기록이라고 기술하였다.(Institutes, I, 7, 2, 4) 루터는 영감설을 지지하였으며 정경성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이 영감설의 주제에 대한 신학에 몰두했다고 할 수 없어도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성주의 시대에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설을 적용하는 것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의 정신에 의하여 언어학적이며 본문에 의한 연구가 홍수를 이루었다. 이성주의적인 접근방식으로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설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하는 주장에 불을 지르게 되었으며 따라서 비판자들은 영감설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정통주의는 똑같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으므로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낮은 규준의 영감설을 용납해야 한다거나, 무오성의 교리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이 단지 성경에 요구하는 것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경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만일에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적이며 영감설 및 무오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주석학적 고찰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시발점은 성경 스스로의 증거이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와 충만한 영감을 분명하게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안에는 무오성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뢰할만한 증인이며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에 의한 것임을 단언하였다. 마5:18에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점은 히브리어 글자중 가장 작은 것이며 획은 글자와 글자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 긋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의미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점일획은 성경의 세미한 부분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같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찮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의 완전한 영감과 무오를 믿지 않았다면, 그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각 부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은 요10:34,35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율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이 부분적으로만 영감을 받은 것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여기서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2:32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당한 이유는 성경의 자세한 부분 즉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22:43-35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대화의 강조는 “주”라는 한 단어의 사용에 있다. 갈3:16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논쟁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시제, 특별한 단어, 단수와 복수 등 세세한 예증들은 성경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이 완전히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 중에서 딤후3:16이 있다. 이 구절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Breath out of God)것임을 가르친다. 이 구절은 번역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이라고 하거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의미는 똑같은 것이다. 한 성경에서 진실한 것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진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저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 볼만한 구절이 있다. 벧후1:21은 구약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대로”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영감된 말과 비교해 볼 때,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성경의 독특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고 움직여졌다. 성경 자체의 변함없는 증거는 명확하다. 즉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개념을 말씀하였고(계시), 성령은 이 개념을 객관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도록 인도하셨고(영감),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를 통하여(조명)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 계시된 것을 받게 된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다른 구절에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그리고 “경에 이르기를” 등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

1.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무오성의 교리는 가치가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한 본문 비평학은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본문(헬라어, 히브리어)이 의미상 잘못이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은 신뢰할만하며 주의깊고 세심하게 연구할만하다.

둘째로, 만일 무오성의 교리를 배척한다면 진리에 대한 의문이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결정 할 수 있는가? 어느 부분이 신뢰할 만하며, 어떤 부분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이성주의 아래 두거나 사람의 평가에 맡긴다면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경의 주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2.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개성을 제거하는 영감과 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령의 감독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각 저자의 모든 개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의하여 사용되어 다양성과 개인적 특성이 허용됨과 동시에 하나님이 저자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신다.(벧후1:21)

3. 성경은 과학, 역상, 윤리, 추론, 인용 등에 있어서 오류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인 반면에 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나 과학과 시간은 항상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해 왔다.

둘째로 성경은 종교적이 아닌 주제에 대하여 교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영역 안에서 말할 때 성경의 진술은 비록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였고 불완전하지만 그 진술은 오류가 없다.

셋째로 성경은 그 당시의 배경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문화, 언어, 문화적 진행 등의 문제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한다. 만일 신실하고 지성적인 연구자세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이 무류성을 갖춘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4. 영감설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가진다면 무오성의 교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3가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보다시피 역사의 증언은 설득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영감설과 무오설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영감설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유지해 왔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하면 영감설과 무오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무오하거나 무류한 어떤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접근방식이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잘못을 범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시31:5, 100:5, 요7:28, 8:26, 롬3:4, 고후1:18, 요일4:6, 5:20, 계6:10)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을 주관하셨고 모든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작은 부분일지라도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된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브루넬레스키 : 이전의 고딕식 건축과 완전히 다른 쾌적한 건축양식

 마사치오 : 명암법과 원근법을 구사

 도나텔로 : 현실감을 갖춘 고전적 균형의 조각

 보티첼리: 신 플라톤적 이상인 아름다움의 세계 표현

브루넬레스키
브루넬레스키는 이전의 고딕식 건축과 완전히 다른 쾌적한 건축양식을 만들어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두오모대성당(1420-36년, 피렌체)
고딕 성당의 뾰족한 지붕 대신 고대로마 방식의 둥근 지붕으로 대체, 벽돌을 2중으로 쌓아 지탱하게 하는 매우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산 로렌조성당(1421-40년, 피렌체)
내부는 가는 원기둥을 아치로 연결하고 지붕을 평평하게 하는 바실리카 방식을 빌어 옴으로써 합리적이고 여유 있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인노첸티의 병원회랑(1419-24년, 피렌체)
기둥과 기둥사이, 기둥과 벽 사이 그리고 바닥에서 주두 바로 아래까지의 길이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의 정입방향체를 만들고, 이를 공간에서 반복시킴으로서 정돈감을 주었다. 그리고 큰 아치 위에 작은 창문을 두어 율동감을 주고 있다.

 
기베르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길드의 수호성인상주문이 미술에  끼친 영향
 종교적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로 자리함.


 각 길드를 상징하는 조각품들을 주문해 공공장소의 중요 위치에 배치함으로  조합의 위치를  정착시킴.
 원래 세리였던 마태오: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례요한: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이고,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죠르지오:갑옷제조업자의 수호성인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4명: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
 마르코:면직 공업자들의 수호성인

 고대 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사실적 묘사의 회귀)

예시 작품들

기베르티의 세례요한(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마태오(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 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라는 성당 외벽에 가 제작한 14개의 감실 중 두 작품이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1411-13년경.오르산미켈레성당, 피렌체)

도나텔로의 성 죠르지오(1415년경. 오르산미켈레성당, 피렌체)
 
가족 예배실의 벽화 유행

회화의 발달 계기가 됨.
양쪽 벽면이나 제단 양쪽에 가족 예배실에 석관을 둠.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Sassetti)家 예배실도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목동들의 경배 와  사세티 부부의 경배(1483-85년)
가운데 <목동들의 경배>가 제단화로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엔 사세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이고 좌우의 벽엔 그들의 석관이 안치되어있다.

교황으로부터 수도원 인증을 받는 프란체스코(1482-86년)
중앙과 좌우 벽면의 중간과 윗단엔성 프레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엔 성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그 중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인물은 아래 하단에 그려졌던 이 예배실의 주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엔 이미 성장한 세 아들을 두고 아직 어린 넷째 아들은 자기 옆에 그리게 하였다.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검은머리의 옆면 인물은 로렌조 디 메디치이며 그 옆은 피렌체에서 명망 있던 안토니오 푸치로 사세티의 사돈이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로렌조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였던 인문주의자들이다. 메디치 은행의 제노바 지점장이었던 사세티는 메디치家의 총수인 로렌조를 자신의 옆에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함께 넣음으로써 그들 가문과의 결속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종교와 정치, 경제 그리고 미술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도나텔로

도나텔로는 현실감을 갖춘 고전적 균형의 조각 완성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1412-13년, 나무, 높이168×173㎝. 피렌체, 산타크로체성당)
이 작품을 본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에게 어떻게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지 않고 농부를 매달았느냐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에서 도나텔로가 보여주는 현실감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다.

성 죠르지오(1416년경, 대리석, 높이214㎝.피렌체, 바르젤로 박물관)
고전조각의 조형미를 구현하였다. 콘트라 포스트 자세와 당당한 양감, 8등신의 비례 등 고전적인 이상을 실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감실 배경의 무늬를 없애고, 상을 조금 작게 함으로써 조각상이 배경의 공간에서 여유있게 놓이도록 했다. 그가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치오와 함께 교류하면서 일구어낸 원근법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다.
성가대석(1439년, 대리석 348-570㎝.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로마 조각에서 모티브를 빌어 왔으나, 1410년대에 지향하던 고전적인 질서는 거부하고 있다. 분방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이 부조는 교회의 성가대석을 위한 것이지만 매우 이교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1457년경, 나무, 높이188㎝.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도나텔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처절한 기도와 나아가 인간의 참회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를 농부와 같은 현실의 인물로 이해하던 도나텔로에게 조화로운 고전적 아름다움은 오히려 공허한 가상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

그의 작품은 살아있는 진실 그 자체, 자연 그 자체 - 바자리

피렌체에서 출생한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어머니.
평면상에 처음으로 현실적인 3차원 공간을 재현 : 원근법과 명암법을 조합
이론적으로 공간을 묘사 : 공간과 양감의 표현법 체계를 수립 
삼위일체  소실점

"성 삼위일체"라는 주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하나님, 양옆에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 렌치 가(家)의 사람들로 밝혀진 봉헌자들을 그린 것이다. 벽화 아래에는 묘소와 접하는 부분에 해골이 그려져 있으며, "나도 일찍이 그대와 같았노라. 이제 그대도 나와 같으리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두 팔 벌린 하나님은 마치 실제로 매달린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큼 자연스런 사실감이 느껴진다. 이는 마사치오가 적용한 단축법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물들의 의상의 색감과 주름, 옷 속에 들어 있는 신체의 각 부분들은 자연광선의 명암으로 처리하여 실제적인 공간감을 재현하였다. 이 제단화 속에 적용된 투시도의 선이 한 곳으로 모이는 소실점(The Vanish Point)은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이다. 과학적인 선원근법을 시각적으로 성공적으로 적용한 이 작품 이후로 르네상스 회화는 혁신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의 소실점은 바닥으로부터 153cm 높이에 위치 있는데 이는 키 162cm 정도의 사람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눈의 위치에 해당된다. 마사치오가 벽화에 구현한 이 원근법은 매우 과학적이어서 우리는 벽화의 감실 깊이까지 계산해 낼 수 있다
헌납금

성추방과 더불어 카르미네의 브랑캇치 예배당에 그린 그림으로 회화사상 신기원을 이룸

낙원추방(첫 나체와 비극의 표현)

길고 폭이 좁은 공간에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것이다.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마사치오는 왼쪽에 천국의 문을 그려 넣음으로써 주제를 단순하고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천국문에서 쫓겨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화면은 오른쪽으로 개방된 느낌을 갖게 된다. 문 위에서 그들을 따르는 천사의 존재, 가야할 곳을 가리키는 천사의 손동작 역시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두 사람의 후회와 슬픔어린 표정이 인상적이다.

제롬과 세례자 요한  병자를 치료하는 성 베드로 
프란체스카(Piero Francesca 1416-1492)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섯가지의 기하학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피렌체에서 활동. 당시 일류 수학자이기도했던 그는 그림의 구도에 원근법과 색채법을 적용해 저서를 편찬하기도 함. 예술을 위해 논리적연한 수학.기하학적 견해와 기법을 도입.
프레스코화의 획기적인 기법 : 완성작과 같은 크기의 밑그림-밑그림의 윤곽선을 따라 작은 구멍을 뚫어 목탄으로 문질러 형태 잡는다(형태의 정확성)
군더더기 없는 화면과 아름다운 색채 : 도형적인 화면과 아름다운 색채의 조합.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초상
배경이 이렇게 멀리 보이게 하려면 아마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주인공을 아주 가까이 놓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고대의 메달에 그 근원을 두고있는 옆면 얼굴은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3/4각도의 초상이 많이 그려지던 15세기 후반에 페데리코만이 정 옆면을 사용한 것은 전투에서 잃은 한쪽 눈의 흉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눈 사이가 푹 들어가고 메부리 같이 강하고 큰 코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초상을 사실적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특정부분을 사실적으로 한 반면 전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치밀하게 이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맞는크리스트(1445) 
건물밖에 있는 인물은 아주 크고 건물 안의 인물들은 작다. 우리는 이것이 거리에 따른 차이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바닥의 기하학적 무늬가 기울어진 각도는 바로 보는 이의 눈 높이에 있는 소실점에서 얻어진 수학적인 계산이다.

크리스트의세례 참된십자가역사 성 줄리앙 콘스탄틴의 꿈 브레라의 제단화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부활
십자가형을 받고 매장된 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위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묘사. 수직선과 평행선을 직각으로 조합시킨 골조의 강력함이 그 위엄을 만들어 낸 포인트다.
배경인 좌우측의 나무 중 오른쪽은 잎이 무성하지만 왼쪽은 앙상한데, 이 또한 '부활', '생명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병사들의 모습은 모두 삼각형 구도를 지니는데, 이들은 다시 예수를 포함해 큰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 끝에 있는 병사의 자세는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응용.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86년
쇠라는 미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그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의 미역감기>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두 번째 대작인 이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그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년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년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뒤, 1985년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년 5월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그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년 제 8회 인상파전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3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쇠라는 아침 일찍부터 라 그랑드 자트 섬에 나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창조해 화면에 배치시켰다.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

동판화가로 도나텔로의 영향을 많이 받음. 궁중화가로 교황에게 초빙되어 작품활동

만테냐는 파도바에서 1459년 만토바 궁정으로 떠나기에 앞서 최초의 걸작, 베로나의 산 제노 교회의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제단화의 중앙 패널이었는데, 19세기 초에 현재의 상태로 분리되었다. 양옆의 패널은 투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은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을 수직으로 3등분하면 그림의 축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양옆에 죄인이 각각 세 개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구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화면 상단에 역삼각형의 구도가 형성되고, 아래에는 비통한 표정의 신자들과 로마 군인들이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만나게 되는 불안정한 구도를 보여준다. 만테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비통하게 그려내고자 불안정한 역삼각형 구도 배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인들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로 핏기 없는 엷은 푸른빛으로 채색되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감정 표현과 색채 묘사, 후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언덕 마을에 적용된 정확한 원근법, 인물들의 조각적인 입체감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그림 전반에 선명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책형( 刑)"을 주제로 그린 얀 반 아이크의 작품은 시선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끔 되어 있어서 감정의 개입이 차단된 반면, 만테냐의 작품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우러러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긴장감을 일깨워 준다.

 

갈보리언덕
만테냐는 파도바에서 1459년 만토바 궁정으로 떠나기에 앞서 최초의 걸작, 베로나의 산 제노 교회의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제단화의 중앙 패널이었는데, 19세기 초에 현재의 상태로 분리되었다. 양옆의 패널은 투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은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을 수직으로 3등분하면 그림의 축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양옆에 죄인이 각각 세 개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구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화면 상단에 역삼각형의 구도가 형성되고, 아래에는 비통한 표정의 신자들과 로마 군인들이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만나게 되는 불안정한 구도를 보여준다. 만테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비통하게 그려내고자 불안정한 역삼각형 구도 배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인들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로 핏기 없는 엷은 푸른빛으로 채색되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감정 표현과 색채 묘사, 후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언덕 마을에 적용된 정확한 원근법, 인물들의 조각적인 입체감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그림 전반에 선명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책형( 刑)"을 주제로 그린 얀 반 아이크의 작품은 시선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끔 되어 있어서 감정의 개입이 차단된 반면, 만테냐의 작품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우러러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긴장감을 일깨워 준다.

 

파르나수스
그리스 신화의 파르나수스 산을 찾아보려는 도상해석학이 시도되기도 했던 이 작품의 주제는 아직까지 정확한 정설이 없으며, 15세기 말경 당시 귀족이던 이사벨라 데스테의 "서재"를 장식했던 만테냐의 이 작품과 더불어 로렌초 코스타의 <코스무의 우화>, 페루지노의 <우의화> 및 <정결의 승리> 등의 그림이 미술사가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 작품은 만테냐의 작품 중에서도 고고학적인 박학함과 서사시적 표현을 궁극적으로 높인 고전적인 경향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끄는 그림이다. 화면 구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굴속에서 나와 손을 쳐드는 몸짓을 하는 불칸이 위치한 왼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앙에 아치 모양의 바위에 서서 살며시 접근하는 비너스와 마르스, 그리고 오르페우스를 따르는 무희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오른쪽으로는 말과 함께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이르고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세 요소는 각각 개방적이면서 서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집중성과 병렬성을 가지고 있다.

 

형장으로끌려가는 성야곱  천사가있는성모자  겟세마네동산에서기도 성세바스찬 예수죽음의애도
 
기를란다이요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로 활동했던 기를란다이오는 15세기 말경에 피렌체의 가장 이름높은 작업장의 책임자였다. 그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가대에 있는 성모의 전 생애를 담은 그림, 그리고 피렌체 소재 산타 마리아 마델레나 데 파지의 체스텔로 성당의 예배당에 기증할 작품들이 로렌초가(家)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기를란다이오 두 형제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아하고 빛나는 선으로 그려졌고, 로마 화풍의 고전주의적 아치를 벗어난 기념비적인 표현기법을 보여주는데, 색채의 단순성과 선의 조화는 그림의 정신적인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노인과손자의초상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가 개척한 사실주의적인 화풍에는 시대고증이나 당시 풍속의 증거가 되는 장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묘사를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개성적인 인물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초상화에 있어서 모델의 딱딱한 표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리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세부의 정교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의 표정을 특징적으로 잡아 내는 것이 애정어린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를란다이요의 초상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당시 유명한 은행가였던 프란체스코 사세티의 초상을 그린 이 작품이다.
 이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서 기를란다이오는 인물의 사회적 지위를 표면에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모델의 보기 흉하게 큰 울퉁불퉁한 코를 솔직하게 그릴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힘이 넘치는 늙은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사세티는 자기에게 기댄 손자와 함께 있으면서 자기자신의 삶의 생기를 느끼는 듯한 모습이다. 검정과 잿빛을 주조음으로 하는 배경 앞에서 타는 듯한 빨간빛의 의상은 늙은이에게 잘 어울리며, 마치 화가가 가족의 혈연을 강조하는 듯이 어린 손자의 모자와 옷에도 되풀이해서 표현해내고 있다.

성모의방문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로 활동했던 기를란다이오는 15세기 말경에 피렌체의 가장 이름높은 작업장의 책임자였다.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로렌초가(家)의 토르나부오니 가족의 주문의뢰로 제작된 것들이 많은데, 그 작품들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가대에 있는 성모의 전 생애를 담은 그림, 그리고 피렌체 소재 산타 마리아 마델레나 데 파지의 체스텔로 성당의 예배당에 기증할 작품들이 로렌초가(家)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기를란다이오 두 형제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아하고 빛나는 선으로 그려졌고, 로마 화풍의 고전주의적 아치를 벗어난 기념비적인 표현기법을 보여주는데, 색채의 단순성과 선의 조화는 그림의 정신적인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세퍼드의예배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년)

데생의 기묘함은 각별했다.  그의 사후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한 장이라도 얻기위해 고군분투했다.-바자리

르네상스의 발원지 이탈리아  피렌체는 그의 타고난 회화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필리포 리피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으며,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 거장들과 동시대를 살았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가문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 한마디로 대화가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완벽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화상을 그대로 믿는다면 미남에 멋쟁이였던 그는 결혼을 거부했고 다빈치와는 친구였으며 '비너스 탄생' 완성 후 신플라톤주의를 결렬하게 비난하는 교회 개혁자 사보나롤라의 광신적 설교에 매료되어 피렌체의 상류계급과 더 이상 교류하지 않고 지옥불과 죄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그림을 그리지만 유감스럽게도 보티첼리의 선천적 우아함은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그림으로 표현되는 고통등과는 도저히 융합할 수 없어 그의 후기 종교화는 초기 작품들과 같은 매혹은 더 이상 표현되지 못했으며 새롭게 획득한 신앙의 발견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동 시대의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는 다르게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하였으나, 그 후 그는 제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었다.
보티첼리의 아버지가 후세에 남긴 세금 고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티첼리는 마음 내킬 때만 일을 했다.'
보티첼리는 달콤한 성공의 술을 너무 빨리 맛본 탓인지 무거운 짐에 시달린 채 1510년 65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신화와 이야기를 그리는 천재: 당시 회화의 주제로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그리스 신화를 자주 테마로 삼음. 대부분 작품은 메디치가의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등 명망있는 귀족들의 의뢰로 그려졌으며, 그들 사저에 장식용의 사용됨.

선의 효과를 추구하며 새로운 스타일 구축 : 정확한 뎃생력에 기초한 선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곡선이나 옷감의 흐름을 유려하게 재현해냈다.세밀화가나 금세공사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그려진 선에 의해 형태나 움직임을 재현하려고 했다.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들은 우아하고 늘씬하게 뻗어있다. 인간적이거나 격정적인 감벙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세련된 스타일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2차원적인 공간을 그리다 : 딴에는 배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인물의 배후를 나무로 덮어버린 작품도 있다. 이런 표현 방법 때문에 그는 르네상스의 정통파로 대접받지 못함.

-오카베 마사유키의 청소년을 위한 명화의 길잡이에서-
- 라파엘 전파와 팜므 파탈의 원류 -


보티첼리의 명성은 사후 급속히 냉각. 300년 이상이나 지난 19세기 중반 라파엘 전파화가들에 의해 재조명. 특히 명확하고 투명감을 살린 선과 색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은 여성상의 우수에 젖은 표정은 로제티의 여성상을 비롯해 세기말의 팜므파탈(숙명적인 여인)이미지의 원류가 되었다.
 
 비너스 탄생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아름다운 애첩이 있었다. 대왕은 화가를 시켜 판카스페의 눈부신 젊음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의 알몸을 그리게 한다. 불변하는 예술의 거울에다 자연의 드문 기적을 담아두려는 생각이었다.
 -노성두의 미술이야기에서-

알렉산드로스왕 애첩과 '불륜'

신성한 의무를 떠맡은 화가는 아펠레스. 헬레니즘 최고의 붓을 자랑하며 숱한 회화의 전설을 뿌린 명장이다. 어느 날 그림이 잘 되어가나 싶어 화가의 작업실에 들렀던 알렉산드로스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그만 아연하고 만다. 아펠레스와 판카스페가 꼭 끌어안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젊은 대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 저것들이?' 두 연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어림없는 만행의 대가로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다. 옛 기록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적수를 제압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날, 가장 무서운 적수와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대왕은 자신의 노여움과 질투조차 거뜬히 누름으로써 참된 영웅의 면모를 과시한다. 벌을 기다리던 화가는 뜻밖에 상을 받았다. 아끼던 애첩을 선사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플리니우스는 무력의 대왕이 예술의 제왕 앞에 무릎꿇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일화의 미학적 얼개를 풀이하자면, `예술이 권력의 속박을 떨치고 아름다움의 덕목과 결합한다'쯤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펠레스는 그 일이 있은 후 더욱 분발했고, 기량도 한층 무르익었다. 또 판카스페를 모델로 세우고 절정의 예술을 쏟아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그렸다. 갓 태어난 알몸의 조형에다 새벽별처럼 어여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미와 사랑의 여신을 완성한 것이다.

옛기록 읽고 '나도 그려보자'

피렌체 화가 보티첼리는 플리니우스가 쓴 옛 기록을 읽고 무릎을 쳤다. 당장 붓을 들어 1800년 전 까마득한 옛 거장 아펠레스의 붓을 흉내내기로 결심했다. 애첩을 뺏기고도 관용을 베풀 대왕은 오래 전에 죽고 없었지만, 판카스페에 필적할 모델이라면 자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다는 시모네타 베스푸치가 이곳 피렌체에서 눈부시게 영글어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인문학자 폴리치아노가 그녀를 두고 `신성한 아름다움'이라고 단정했으니, 미의 여신을 대신하기엔 아주 그만이었다. 때마침 피렌체에는 호메로스가 인기였다. 아펠레스도 붓을 들기 전에 호메로스를 읽었을 것이다. 보티첼리는 폴리치아노한테서 얻은 서사시를 꼼꼼히 들추었다. 비너스의 그리스 식 이름은 아프로디테.

“나는 아름답고 정숙한 아프로디테를 노래하려네.

황금수관을 머리에 쓰고

바다로 둘러싸인 키프로스 도성을 지배하는 여신을.

여신은 서풍 제피로스의 부푼 입김에 떠밀려

물살 거친 파도에 실려서

부드러운 거품을 타고 왔다네.

황금 머리띠를 두른 계절의 여신들이

아프로디테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의 몸을 신성한 의복으로 감싸고

신성한 이마 위에 황금 관을 씌워 드렸네.”

보티첼리는 영감의 빛에 손놀림을 맡겼다. 성화를 그릴 때처럼 기도와 묵상에 의존하지 않았다. 제 어깨에 상상의 날개를 걸어 매고 단숨에 올림포스의 산정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키프로스의 금빛 해안으로 직행했다. 오래 전 그리스 고전기 조각가 피디아스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을 지으면서 썼던 방식이었다.
보티첼리의 붓은 마침 첫 돌을 올리기 시작한 인문주의의 신전에 시들지 않는 예술의 향기를 헌정했다. 눈먼 시인의 상상력에 붓을 적셔서 고대의 은성한 예술을 되살린 것이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아펠레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보티첼리의 붓은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이주헌씨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에서-

'미의 여신' 비너스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리스 시대의 조각 '밀로의 비너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인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을 떠 올릴 정도로 양대 미술의 걸작이다.
앤디워홀(1928-1987년 미국 팝아트의 대표적 화가)'는 복제했을 때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걸작의 정의를 내린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만큼 걸작의 정의에 잘 들어맞는작품도 없을것이다.
갸우뚱한 머리. 이마의 곡선. 약간 숙인 턱을 강조하고 있는 조신하면서 슬퍼보이는 한 여성의 모습에서 욕망의 흐름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랑을나누던 고대의 여신 비너스를 찾아볼 수 없고 성모상과 닮아 보이며 그 당시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적인 섹스가 아닌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여신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호화롭고 온화한 예술은 르네상스기의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 관찰법과 원근법을 추구한 시대의 유행에서 뒤떨어진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이러한 특징은 합리성을 외면한 근대미술의 효시적 상상력을 충분히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상쾌함이 존재해 라파엘전파(1848년 런던에서 형성된 미술운동)의 병적 관능, 클림트의 차가운 우아함, 모딜리아니의 침울한 여인들에서 보티첼리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보티첼리 회화의 근대성은 현대 대중문화가 즐겨 찾는 이상적인 여성상의 편린을 보여 오늘날 여성미의 추구에 기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명화도 아니면서 르네상스를 주제로 한 책의 표지 장식에 우선 그의 비너스가 등장하는 것은 통례이다. 그 아름다움이 구름처럼 잡을 수 없고 깨끗해서일까!!

이 작품을 이주헌씨의 이론으로 다시 한번 해석해보자.
서쪽 바람의 신 제퓌로스와 미풍 아우라가 바람을 불어 조개껍질을 탄 비너스를 뭍으로 밀어주고 있고, 뭍에서는 때의 여신이 꽃무늬가 든 망토를 들고 비너스를 맞고 있다. 수줍어 하고 있는 비너스의 신체는 10등신이며, 모델은 당시 피렌체의 최고 미인이었던 시모네타로 전해져 오고 있다.
사실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은  구성의 원형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그리스도의 세례'에 있다. 비너스는 세례 받는 그리스도의 형상이고 오른쪽 때의 여신은 물을 붓는 세례요한의 모습이다. 제퓌로스와 아우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이거나 천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을 조화롭게 매개하는 것은 물론 바닥에 깔린 물이다.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거룩한 관능미 추구는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육체적 아름다움의 추구에 이어 서양문명이 육체적 욕망의 미적 합리화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인간 욕망을 추구하되 거기에 문화적 전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하나한 의미화 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온갖 예술적 성취가 꽃피어나게 한 것, 그것은 곧 서양미술의 깊이와 넓이를 크게 확대시킨 장치였다. 물론 바로 그것의 권위에 기대 남성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그리고 여성을 그 욕망의 충족 대상으로서 가르고 우열화함으로써 결국 오늘날의 대중문화에서 여성의 성 상품화가 '당위'를 얻게 한 행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파리스가 비너스에게 사과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너스의 관능적 아름다움이였음을....
그래서 무려 3세기동안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던 '비너스 탄생'은 관능미를 미의 범주로 해석할 수도 있는  19세기에 들어서 그의 작가적 전모가 드러나면서 비로소 재평가 받게되어 명화 중 명화라는 찬사를 얻게되는 것이다.
물론 신플라톤주의 철학이니 종교화의 구성이니 숱한 '보호막'을 인용했지만 이제 욕망의 꽃을 직접 나아가 두손으로 꺾고야 말겠다는 충동과 의욕의 뒤범벅이 이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꽃을 향하여 뻗어가는 손의 근질거림이 이 작품엔 확연히 존재한다.
 어쩜 예술이란 인간의 가장 태고적 본능의 추구이다. 인간의 최대 목표물인 이성과는 정반대 개념인 본능을 이렇듯 아름답게 재해석해 이성보다 더한 감동을 자아내는 작가들의 심혈에 깊은 찬사와 감명을 보낸다.
그들의 노력과 자취는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영원하리라!!!!!!
 
 봄
관능의 아름다움을 보다 폭넓은 여음으로 울리게 한 보티첼리의 또 다른 작품이다. 봄은 모든 계절의 여왕, 곧 비너스의 계절이다. 그 계절의 여왕을 통해 보티첼리는 특유의 감각적이고 서정적 부드러움에 약간의 퇴폐적 관능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적 리듬을 타고 오른쪽 올리브 나무가 빽빽한 비너스 동산에 나타난 서풍 제퓌로스는 바람을 힘껏 불고 있고  제퓌로스의 봄바람이 닿으니 클로리스의 입에서는 꽃이 쏟아지고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탈리아의 꽃의 여신인 플로라가 약간 성적 제스쳐로 서있다. 그러나 결국 봄 기운을 주관하는 이는 중앙의 비너스가 성모마리아처럼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웬지 비너스보다 그녀의 시종들인 미의 3여신에게 쏠린다. 속이 비치는 옷을 입은 우아한 춤동작은 이 그림의 클라이막스이며 그들의 사랑스러움, 그들의 관능이 바로 보티첼리가 겨냥한 바다. 이 관능의 드러냄을 위해 보티첼리는 그렇게 '문화의 길'을 에돌아왔고 그러기에 더 가치있는 여운이 있는 것이 아닐까.
메르쿠리우스(머큐리)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다가오는 구름을 막대로 쫒고 있지만 비너스 위를 나는 큐피드가 세 여신 중 하나에게 화살을 쏘려하고 있고 쏘는 즉시 이 아름다운 순간도 물거품이 되겠지.
이 리드미컬한 그림은 막 결혼한 메디치가의 피에르 프란체스코의 침실에 걸려있었다. 문예부흥이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적극적으로 결합을 할 때 비로소 그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보티첼리 그림에서 우린 다시 한번 감명받게 되는 것이다.
 
비너스와마르스
신혼부부에게 던지는 일종의 우의화이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승리의 상징인 사랑은 전쟁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올림포스 최고의 추남인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의 아내 비너스와 미남인 전쟁의 신 마르스의 혼외정사 이후의 정경으로, 비너스는 남편에게 불륜의 현장을 들키고 만다. 부부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교훈적 주제를 갖고 있는 이 작품은 ` 부드럽게 흘러내린 윤기있는 머리카락과 속이 비칠 듯한 흰옷의 부드러운 곡선미 등 보티첼리 특유의 시정과 장식적인 곡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녀에게 선물을 주는 비너스와 삼미신
보티첼리의 이 작품은 비너스와 삼미신을 주제로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이 그림과 더불어 나머지 한쪽 그림은 원래 피렌체 부근 빌라 레미라는 곳에 토마부오니 가족 소유의 그림이었다가 메디치가의 컬렉션이 되었던 작품이었다. 정확한 제작 연도는 남아 있진 않지만 우피치 미술관의 양대 걸작인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작품이 완성된 사이인 1483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통하고 있다.
어린 소녀로 상징되는 세계의 창조는 비너스에게 천지창조라는 선물을 부여받고 있는 알레고리로 표현되었으며, 세계의 아름다운 여신들의 운동감이 부드럽게 묘사된 반면 표현은 단순하게 처리했다. 또한 "삼미신"이라는 제재는 고대 그리스의 나오는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딸들로서 "삶의 기쁨"과 "생의 윤택", 그리고 "쾌락과 우아미"를 뜻하는 상징으로 쓰이면서 조형예술 속에서 하나의 테마로 자리잡고 있는데, 보티첼리의 다른 작품인 <봄의 알레고리> 속에도 역시 "삼미신"이 등장하고 있다.
로렌초의 장려한 양식을 세련된 인본주의로 결합시켜 회화로 표현했던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도 부드러운 색채와 선의 운동감을 다양하게 교차시키면서 고전적인 이상의 주제를 잘 드러냈다.
 
성모자 동방박사예배 크리스트애도 장미원성모 반역자처형 자화상 수태고지
젊은남자의초상
 


차가워진 당신의 체온   

체온이 1도 상승하면 
면역력은 삼십몇 퍼센트나 증가한다.
거꾸로 체온이 저하하면 면역력은 떨어진다.
암세포도 35도의 체온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고 
39.3도 체온에서 사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 동물들은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없지만 
병이 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절식을 하거나 
몸에 열을 내어 몸 상태를 원상 복구한다. 
이처럼 체온은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 이시하라 유미의《체온 혁명》중에서 -

* 당신의 체온을 아십니까?
오늘 한 번 체온을 재보시지요.
놀랍게도 36.5도 안팎을 유지하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 35도 수준에 머물러 있고
심지어는 34도대 체온인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몸의 체온에 더해 마음의 체온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그 주변도 싸늘합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어야 그의 얼굴도
그의 주변도 화사해집니다. -옮긴 글


 한 번 가면 두 번 찾지 않는 시간,
따스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주께서 그대의 편이 되어줄 테니까요.^^

-사랑의 배달부 별똥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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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저도 어릴 적에 성당에 다녔고, 천주교에 순수한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저는 무조건 기독교가 옳고 천주교는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천주 교회 보다 깨끗하지 못한 기독 교회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천주교의 시스템이 잘못되었고, 역사적으로 많은 과오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종교에서 시스템을 이루는 것은 교리와 관습과 의례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초대 교회의 순수한 믿음을 잃어 버리고, 이방종교의 풍습과 성경에 근거 없는 인간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첨가했습니다.

또한 한 때 성경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키고,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는 마귀들이 교회 내에 더더욱 역사하기 때문이고,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하면 이런 종교적 변질은 피할 수 없으며,
현재 기독교도 자유주의, 은사주의, 교권주의, 기복주의로 오염돼 조만간에 천주교 못지 않게 변질되리라 예측됩니다.

카톡릭은 역사적으로 순 기능도 가지고 있는데 삼위일체론을 확립했고, 신본주의적 사상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황의 교시나 교리를 성경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전통과 권위도 성경에 적혀 있는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적혀 있는 진리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요,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 목차

1. 로마 카톨릭의 기원

2. 카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 역사

3. 교황 제도

4. 마리아 숭배

5. 카톡릭 성직제도와 고해 성사

6. 우상 숭배

7. 종교개혁과 기독교 박해

 

 

1. 로마 카톨릭의 기원

3세기까지도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기를
장악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기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 후의 신성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틴 황제(AD 306-337)와 유스티니안 황제(AD 527-565)는 교황권을 양육하여 중세기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수였던
막센티우스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313년 3월에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AD 313),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성직제도는 졸지에 타락하여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습니다.

예배는 극도로 이교화하였고, 321년 3월 7일에는 아직도 콘스탄틴황제가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Mithras)의 예배일인 일요일에 휴업하라는 포고가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틈 새에서 국가의 비위를 맞추며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온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기에 안간 힘을 썼습니다.

326년 콘스탄틴황제는 선동죄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 파우스타 (Fausta)의 라 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습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습니다.

375년 이제까지 로마황제들이 공식명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비로소 포기하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고 있습니다.
476년 서로마가 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중세기 동안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했습니다.
특별히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으로 하여금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서로마의 잃어 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습니다.
유스티니안은 493년 아리안주의(Arianism) 게르만 민족으로 하여금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를 위협해 온
헤루리를 정복하고, 534년에는 같은 이유로 반달족을 정복했습니다.

533년에는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을 534년에 그의 법전에 편찬했습니다.
538년에는 아직도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 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드를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기의 권좌 (權座)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왕 피핀(Pepin 741-768)은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마교황을 적극 후원하여, 754년에는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피핀 왕의 아들 촬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신성
로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년 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켜 알비젠스, 왈덴스등 개혁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허스와 제롬을 불사르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편의와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카톨릭은 초대교회를 계승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이방종교를 흡수한 혼합종교이고,
정치적 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권력과 금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세상적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카톨릭의 비 성경적 교리 역사

1.
루시안이 장로를 사제라고 처음으로 부름 --- 2세기
2.
시프리안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를 만들어 냄 --- 3세기
3. 죽은 자를 위한 기도(바빌론 종교의 풍습) --- A.D. 300
4.
십자가 형상을 만듦 --- A.D. 300
5.
촛 불 --- A.D. 320
6. 천사, 죽은 성인들, 형상 숭배 --- A.D. 375
7.
미사가 매일 드리는 예식이 됨 --- A.D. 394
8. 에베소 공회를 통해 마리아를 높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로 부르기 시작 --- A.D. 431
9.
사제들이 특별한 옷을 입기 시작 --- A.D. 500
10.
최후의 도유(치유를 위한 의식) --- A.D. 526
11. 그레고리 1세가 연옥의 교리 확립 --- A.D. 593
12.
예배 때 라틴어 사용 --- A.D. 600
13.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기도 --- A.D. 600
14. 최초의 교황 (보니파 3세) --- A.D. 610
15.
교황의 발에 입 맞춤 --- A.D. 709
16.
프랑크 왕 페핀이 교황에게 세속 권력을 넘겨줌 --- A.D. 750
17. 십자가, 형상, 유물 숭배 인정 --- A.D. 786
18.
소금, 기름을 섞은 물에 사제가 축성해서 성수로 만듦 --- A.D. 850
19.
성 요셉 숭배 --- A.D. 890
20.
추기경 대학 숭배 --- A.D. 927
21.
교황 요한 13세가 종(鐘)에 세례를 베품 --- A.D. 965
22. 교황 요한 15세가 죽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함 --- A.D. 995
23.
금요일과 시순절 금식 --- A.D.  998
24.
미사가 점차 희생제사로 발전하고, 참석이 강요됨 --- A.D. 11세기
25.
사제들의 독신생활 --- A.D. 1079
26. 은둔자 베드로가 묵주 사용(이교도 관행)도입 --- A.D. 1090
27.
베로나 공회 떼 종교재판소 제정 --- A.D. 1184
28. 면죄부 판매 --- A.D. 1190
29.
피터 롬바르트가 일곱가지 성사 확정 --- A.D. 12세기
30. 이노센트 3세가 화체설 확립 --- A.D. 1215
31.
이노센트 3세가 죄를 하나님이 아닌 사제의 귀에 들리게 고백하는 의식(화해의 의식)제정 --- A.D. 1215
32.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성병 숭배 제정 --- A.D. 1220
33. 발렌시아 공회 때 성경이 평신도들에게 금지되고 금서 목록에 포함됨 --- A.D. 1229
34.
영국의 사이몬 스톡이 성의를 만들어 냄 --- A.D. 1251
35.
콘스탄스 공회 때 평신도들은 영성체 때 잔은 받을 수 없게 됨 --- A.D. 1414
36. 플로렌스공회 때 연옥이 교리로 확정됨 --- A.D. 1439
37.
트렌트 공회 때 교회의 전통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 됨 --- A.D. 1545
38.
트렌트 공회 때 외경도 성경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됨 --- A.D. 1546
39.
교황 피오 4세가 만든 신조가 원래의 사도들의 신조 대신 공식 신조로 채택됨 --- A.D. 1560
40. 교황 피오 9세가 마리아의 무염시태 (죄없이 잉태됨)을 선언함 --- A.D. 1854
41.
교황 피오 9세가 "유설표"를 공표하고 바티칸 공회가 인준함, 로마 카톨릭교회가 승인하지 않는 종교, 양심,
언론,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정죄함, 교황이 세상 통치자들의 세속 권세 위에 권위를 가졌다고 인정함 - A.D. 1864

42. 바타칸 공회를 통해 믿음과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교황의 절대무오류성 선언 --- A.D. 1870
43. 피오 12세가 마리아의 몽소승천 선언 --- A.D. 1950
44. 교황 바오로 6세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부름 --- A.D. 1965

 

 

3. 교황제도

카톨릭은 교황을 가르켜 베드로의 사도직분을 계승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며, 전체교회의 머리이고, 거룩한
아버지며, 무오한(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의 교시를 성경보다 높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황에 대한 이러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 예수님,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교황은 인간에 불과하며 역사상 많은 부도덕한 일(살인, 신성모독, 치부, 성직매매, 술취함, 간음, 동성연예,
근친상간)을 자행해 왔습니다.
중세시대 때에는 왕을 능가하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예수님이 제시한 섬기는 지도자 상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교황 세르기우스 3세(A.D. 904~911)는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었고, 여자과 관계해 불법으로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교황 요한 12세(A.D. 955~964)는 성적으로 문란해 교황청에 창녀들을 불러들였고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주교 50명이 성베드로 성당에 모여 교황을 절도, 성직매매, 위증, 살인, 간음, 근친상간으로 고소했으나, 교황 요한
12세는 오히려 추기경과 주교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팔과 코와 귀를 자르는 보복을 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15세(A.D. 985~996)는 교회 재정을 자기 친척들에게 나누어 줘 부패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8세(A.D. 1012~1024)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주고 교황직을 산 부도덕한 인물입니다.
교황 베네딕트 9세(A.D. 1033~1045)는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가 추방당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3세(A.D. 1160~1216)는 종교재판소를 창설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백만명 이상 살해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A.D. 1410~1415)는 주교와 사제로 구성된 37명의 증인에 의해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의 수녀들을 겁탈하였습니다.
바티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의 아내와 변태 성행위를 자행하였고, 수백명의 처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들과 간음을 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교황 비오 2세(A.D. 1458~1464)는 육욕에 빠지는 방법을 가르쳤고, 많은 사생아의 아버지였습니다.
교황 바오로 2세(A.D. 1464~1484)는 비싸고 호화로운 왕관을 쓰고, 궁전에 많은 첩을 두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A.D. 1471~1484)는 교회 직분을 경매로 팔아 전쟁자금을 충당했고, 친척들에게 치부한 돈을
나누어 주었으며, 어린 조카 8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잔치를 종종 열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8세(A.D. 1484~1492)는 여러 여인과 성관계를 통해 16명의 자녀를 두었고, 자녀 중 몇 명은 바티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고, 교회 직분을 늘려 돈을 받고 팔았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 투우 경기를 벌였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A.D. 1492~1503)는 추기경을 뇌물로 매수해 교황직에 선출되었고, 품행이 나쁜 자기 젊은 아들을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앉혔으며, 자기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 루크레티아에게서 자녀를 두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A.D. 1513~1521)는 8세에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세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값비싼 유흥과 연회를
통해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았으며, 교황의 궁전에서 12명의 벌거벗은 소녀에게 저녁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A.D. 1534~1549)는 전에 추기경으로 있을 때 자녀를 두었었고, 십대의 어린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고, 가수와 무희와 어릿광대를 동원해 축제를 후원했고, 점성가를 불러 조언을 구했습니다.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은 바빌론의 인어 모양의 신인 다곤과 비슷합니다.

반인 반물고기 모양을 한 바빌론의 다곤 신

삼중관을 쓴 교황

다곤신과 같은 모양의 관을 쓴 교황


다음은 교황에 대한 카톨릭 내의 평가입니다.

[교황만이 가장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으며…… 거룩한 군주, 지고한 황제, 그리고 왕중왕(King of Kings)이라고
불릴 수 있다. 교황은 그토록 큰 위엄과 능력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동일한 심판을 구성할 수 있다.
그래서 교황이 행한 바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발해진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Pope", Ferraris, Ecclesiastical Dietionary.

[우리(주: 교황들)는 이 땅 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June 20, 1894, The Great Encyclical Letters of Leo XIII, 304.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상권을 뜻한 것으로 성경에서 그에게 돌려진 모든 명칭들은, 교황에게도 마찬가지로
돌려진다.]
Bellarmine, On the Authority of Councils, bk. 2, ch. 17.

[세 관으로 꾸며진 이 삼층관을 받으소서. 당신은 군주들과 제왕들의 아버지이며, 세계의 주교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임을 생각하소서. 주의 명예와 영광이 영원하실 지어다]
경향잡지, 14.

 

 

4. 마리아 숭배

천주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했고, 죽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자 여왕이고, 하늘의 문이며 그녀를 통해서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자녀를 7명 이상 가진 마리아가 평생 처녀인 동정녀로 살았다고 합니다.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를 예수님의 자리에 앉힌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이방종교의 여신숭배사상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카톨릭은 사탄 숭배국가였던 바빌론 종교의 우상과 풍습을 그대로 수입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론은 성경(창 10/~9)에 나오는 니므롯이라는 강력한 사냥꾼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니므롯이란 이름은 '그가 반역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대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물이 됩니다.
니므롯은 아내 세미라미스와 아들 담무스를 두고 있었고, 온갖 악행과 사탄숭배를 자행하였습니다.
니므롯이 죽었을 때 그의 몸은 여러 조각으로 잘려져 여러 지역으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태양신이 되었고, 아들 담무스로 환생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니므롯이 태양신이 되었기 때문에 불과 촛불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니므롯을 나타내는 다른 상징물로는 태양, 물고기, 나무, 기둥 등이 있습니다.
또한 세미라미스는 담무스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잉태된 구원자라고 했고, 자신도 경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빌론 지역에 흔히 있는 모자상(母子狀)은 여신 세미라미스가 자기 아들 담무스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빌론 풍습은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여러 곳에서 모자상이 발견됩니다.
중국 사람들은 아기를 팔에 안은 여신을 '싱무' 즉 '거룩한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독일 사람들은 팔로 아기를 안은 처녀 '헤르타'를 숭배했습니다.

인도에서도 크리쉬나 아기를 안은 어미 데바키를 숭배했습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이집트 최고의 신 호루스를 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방의 여신을 숭배해 예레미아서에 보면 하늘 여왕에게 분향했다고 나옵니다.(예레미아 44/17~19)
 

바빌론과 이집트 등 세계의 고대 종교에 나타나는 아기를 안은 여신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부활해 승천하는 마리아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교황

십자가에 못 박힌 마리아
(유럽)

십자가와 함께 있는 마리아
(로마)


A.D. 313년 로마 교회가 국교화 되면서 이방종교가 금지되었으므로 이교도들은 그들의 여신숭배 사상을 교회 내에
가져왔고, 로마 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이를 용인하였습니다.
점차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는 마리아 숭배로 옮아가게 되었습니다.

A.D. 431년 에베소 공회에서는 마리아 숭배를 카톨릭의 공식 교리로 채택하였습니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처녀와 어미의 여신 다이아나를 숭배하던 도시였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에베소 거민들은 스스로 여신 우상을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행 19/24~27)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해 주는 중보자라고 하나, 그 역할은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요일 2/1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누가 1/46~47 마리아가 이르되, 내 혼이 주를 드 높이고,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느니

우리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 중보자
(Mediator)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잠시 몸을 빌린 사람일 뿐입니다.
단순한 사람이 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마리아 자신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라고 해서 평생 처녀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의 4형제 아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13/55)
또한 예수님은 누이들도 있습니다. (마태 13/56)
권세가 하늘에 닿는 카톨릭은 이와 같이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교리도 거리낌 없이 추가합니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했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1854년 교황 피오 9세가 선언한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입니다.
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명시합니다.(로마서 3/10~11)
천주교는 성경에 전혀 근거 없는 교리를 필요에 따라 잘도 만들어 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해 하늘 여왕이 됐다고 가르칩니다.
몽소승천 교리는 A.D. 1951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명시합니다. (요한 3/13)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는 고대 이교도들의 여신 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천주교는 로사리오라고 불리는 묵주를 기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묵주는 불교에서 쓰는 염주와 다를 바 없고, 고대로부터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기구입니다.
수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염주를 사용해 알라신에게 기도했습니다.
B.C. 800년 경 페니키아 사람들은 원형의 염주를 이용해 여신 아프로디테를 숭배했습니다.

* 묵주 기도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십자가를 잡고 성호경을 한 다음 십자가에 친구하고
2.
사도신경을 외운다.
3. 다음 묵주알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4. 다음 세개의 알을 차례로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한다. 각각에서 다음을 묵상한다.

1) 천주 성부의 지극히 거룩한 딸이신 마리아
2) 천주 성자의 평생 동정 어머니이신 마리아
3) 천주 성령의 지극히 정결한 짝이신 마리아

5. 다음의 묵주알을 잡고 (머리를 숙이며) 영광송을 한 후, 묵상 주제인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신비 1단을 외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6. 묵주알 10개를 넘기면서 성모송 10번을 하는 동안 신비 1단의 내용을 묵상한다.
7. 다음 알을 잡고 영광송구원경을 바치면서 1단을 마친다.
8. 이어서 신비 2단을 외운 뒤,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도 1번성모송을 10번을 하면서 2단의 내용을 묵상하고,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다.
9. 같은 방법으로 3단, 4단, 5단을 바친다.
10.마지막 5단의 영광송, 구원경을 바친 뒤 성모찬송을 바치고 십자가에 친구하면서 끝낸다.

완전한 로사리오에는 성모송 53번, 주기도문 6번. 성체송 5번, 성체 묵도송 5번, 영광송 5번, 사도신경 5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모송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 기도문보다 9배나 더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문 외듯이 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은 이교도적인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도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 6/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함이라.

 

 

5. 카톨릭 성직계급과 고해성사

신부님에 대한 호칭이 서양에서는 Father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쓸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서 신부(神父)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종교적으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23/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로마 교황을 나타내는 Pope란 단어도 아버지라는 의미의 단어를 조금 바꾼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아버지(Father)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미트라교 사제의 우두머리는 로마에 살았는데, 그는 '아버지들의 아버지'(Pater patrum)라고 불리었습니다.
성경의 사사기에도 이교도의 사제를 아버지라고 부름이 나타나 있습니다.(사사기 17/10)

천주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속죄는 선행과 기도와 고해성사로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의 권리는 예수님께만 있고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을 수 있는데도, 카톨릭은 죄 많은 인간인 신부에게
죄를 고백해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습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사함을 얻습니다.
구약시대에 내 죄를 어린양에게 안수해 전해준 후 양의 피를 흘림으로써 죄사함을 받았듯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 내 모든 죄를 가져가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내 모든 죄가 눈 보다 더 희게 씻어진다는 것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카톨릭에서 교황 다음 가는 직분으로 추기경이 있는데, 성경에는 추기경이라는 직분이 없습니다.
추기경은 원래 로마 이교도들의 성직으로 추기경을 의미하는 Cardinal은 돌쩌귀(문을 여닫기 위해 경첩과 같이
쇠붙이로 된 물건)를 의미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추기경은 원래 문과 돌쩌귀의 신이던 야누스(Janus)를 모시던 사제였습니다.

1월을 의미하는 January도 시작의 신이란 의미를 가진 야누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자'로 알려진 야누스는 사탄이 하늘 시스템을 흉내낸 것이고, 천국과 지옥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계 3/7~8)
추기경은 붉은색 옷을 입는데 이는 이교도 카디날 사제들의 붉은 옷과 같으며, 바빌론 왕들도 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카톨릭의 교권체제는 이교도들의 대승원장(Pontifex Maximus)을 수장으로 하고 승원장(Pontiffs)들이 그를
보좌하는 제도와 비슷하며, 이같은 제도는 바빌론에 있었던 승원장 공회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 사제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추기경(Cardinal)과 주교(Bishops)와 사제(Priests)이고,
이를 로마 카톨릭에서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성경에 명시된 교회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감독과 목자(목사)와 장로는 같은 직분입니다.)와 교회
실무를 담당하는 '집사'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했고, 장로는 양떼를 먹이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5/1~3)
예수님도 니골라당을 경계하라고 했는데, 니골라는 정복한다는 의미인 나카오(Nikap)에 어원을 둡니다.(계시록 2/6)

카톨릭의 대주교(archbishop), 대사제(archpriest) 등에서 'arch'는 지도자 또는 선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선생(master)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고,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 하셨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큰 자는 오히려 형제를 섬겨주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상하관계는 있을 수 없으며, 개신교에서도 목사와 성도는 주님을 모시는 한 형제입니다.

마태 23/10~11 또 너희는 선생이라고도 불리지 말라. 이는 너희 선생은 한 분, 곧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라.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6. 우상 숭배

그리스도인 감독(司敎)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다른 종교의 숭배자들이 그들의 상상적인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였던 종교의식들과 제도들을 조금씩만 고쳐서, 그리스도교 예배에 끼어 넣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교도(異敎徒) 대중들로 하여금 이런 의식들은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래(傳來)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바뀐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순교자들도
이전에 자기들의 신들이 경배받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배되고 있는 줄로 안다면, 그들이 더욱 쉽사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 조상의 종교를 포기하자마자, 곳곳에 으리으리한 성전들이 서게 되어, 여러가지 그림들과
우상들로 단장되었는데, 이것들은 외관으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이교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었다.
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 카톨릭교회들은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고,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지나쳐,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등 그 퇴폐함이 극에
달했다.
보다 못한 동로마 황제 레오 3세(Leo III)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등은 종교회의를 열어 우상 숭배를 금하고
교회당에서 이를 제거할 것을 명하고 강제로 부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3세(Gregory III)는 우상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동서(東西)교회 간에
장기간에 걸친 논쟁과 분쟁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로마교회의 일각에서는 "하나님은 성만찬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들어 놓은 우상(偶像)에도 임재하신다.
그려지거나 묘사되지 아니한 그리스도는, 실제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 라고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Qualben, 153, 153.

이것이 그 유명한 성상 파괴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인데 우상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지금도 그 때와
변함이 없으며, 지금의 바디칸 성 베드로 성당에도 395개의 성상과, 44개의 제대(祭臺)가 차려져 있다.
경향잡지, 22

 

a) 오벨리스크 숭배

이집트 오벨리스크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고대 종교의 상징물로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됐는데 여신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스의 성기를 의미합니다.
오벨리스크는 또한 태양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명백한 이교도들의 상징물이 로마 바티칸 성당 앞마당 한 복판에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이 오벨리스크는 모조품이 아니라 이집트에 있던 고대 유물을 직접 가져온 것입니다.
A.D. 37~41년에 로마 칼리굴라 황제는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바티칸 언덕의 원형경기장으로
가져왔습니다.
헬리오폴리스는 고대 이집트 태양 숭배의 근거지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4m이며, 기초까지 합치면 40m이고, 무게는 무려 320톤이나 나갑니다.
A.D. 1586년에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령으로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으로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일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이 오벨리스크를 옮기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폰타나라는 사람이 책임을 맡고 45개의 감아 올리는 기계와 180마리의 말과 800명의 작업대원을 이끌고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1586년 9월 10일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벨리스크는 운반되었고, 성공적으로 세워지자 수백개의
종소리와 대포 함성이 울려 퍼졌고, 군중은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교황청은 이집트 우상 꼭대기에 십자가를 안치함으로써 신성 모독적인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후 교황은 미사를 거행하였고, 작업대원과 말들에게 복을 선포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 주위에는 24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이런 건축양식은 이교도들의 신전설계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b) 태양 숭배

성병(聖餠, host, 미사에 쓰이는 빵)

성체 현시대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이방종교인 미트라교에서는 태양을 숭배했습니다.
이러한 태양 숭배의 영향을 받아 성찬에서 쓰이는
성병(聖餠)도 동그랗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을 부수어 조작을 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지 동그란 형태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빵이 부서진다는 것의 의미는 예수님이 심한 채찍질과 십자가형으로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종교에서도 사제들이 태양신에게 둥근 빵을 재물로 드렸습니다.
성병(聖餠)에 새겨진 IHS는 이집트의 삼위일체신 Isis, Horus, Seb을 의미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성체 헌사대는 좀 더 적나라하게 태양 햇살까지 표시되는 문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중앙 제단에는 뱀처럼 꼬인 기둥 사이에 빛이 들어 오는 태양 형상이 있습니다.
 

 고대의 태양 숭배 문양

바빌론의 태양 수레바퀴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수레바퀴


바빌론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제단에도 이러한 형태의 금으로 만든 태양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건축가들이 신전에 태양 문양을 새기는 관습이 있었는데, 태양신이 악령을 쫓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커다란 수레바퀴가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고, 태양신이 수레를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바알과 태양신과 달과 행성에게 분향하던 제사장이 있어 요시아 왕이 이를 개혁한 적이 있습니다.(왕하 23/5)

바빌론의 벨 신전에서는 8개의 살을 가진 태양신을 상징하는 수레바퀴가 발견되어 현재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수레바퀴 문양이 성 베드로 성당의 앞마당에도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버젓이 새겨져 있습니다.
카톨릭의 성화 속 인물의 머리 주위의 밝은 원과 수도승의 로마식 둥근 삭발도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찬란한 제복, 촛불, 종, 향, 음악 등이 모두 이교도의 풍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c) 우상숭배 금지를 제거한 카톨릭 십계명

바티칸 성당은 온갖 우상으로 불교의 사찰(寺刹)을 방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로마교회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5)는 둘째 계명을 달가와할 리가 없고, 첫째 계명에 포함되었다는 애매(曖昧)한 이유를 붙여 삭제(削除)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상 숭배에 관한 둘째 계명이 삭제됨으로써, 한 조항이 모자라게 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아내나,
종이거나, 혹은 소유를 막론하고 탐심을 갖지 말도록 명한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결국 아래와 같은
천주(天主) 십계(十誡)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1.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
2.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 맹세를 발하지 말고,

3. 주일을 지키고,
4.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5. 사람을 죽이지 말고,
6. 사음을 행하지 말고,
7. 도적질을 말고,
8. 망령된 증참을 말고,
9.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10.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천주교 교리, 제1권, 제28절.]

기독교 십계명

천주교의 중요 성당과 수도원을 채우고 있는
인간 해골 - 체코의 천주교 성당.
사교의 옛 터전 위에 세워진 파리의 '노틀담 사원'
옥상을 점령하고 있는 '바벨론' 종교의 '카발라'
미신의 괴물 - 왼쪽 박스 안의 사진

보석 등으로 치장하여 보관된 성자의 유골
(스위스의 천주교 수도원에서)

스페인의 성당에 있는 불사조(The Phoenix Bird is an ancient occult symbol)

 

 

7. 종교 개혁과 기독교 박해

a) 종교 개혁

유물과 교회 직책, 면죄부를 파는 일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큰 사업이었습니다.
교황 보니파스 8세는 A.D.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성 베드로 성당까지 순례를 하는 사람에게 면죄를
허가했습니다.
그 해에 이백만명이 로마로 몰려 들었고, 성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두 사제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았습니다.

교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많은 성과 저택을 구입함으로써 로마 사람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은 많은 도시와 땅을 소유했고, 교회에 강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카톨릭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해 준다는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에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은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죄를 용서하는 문서를 팔았습니다.
마틴 루터 당시에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했기 때문에 교황은 돈을 모으기 위해 더욱 면죄부 판매에 열중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도시를 방문해 교황의 공식 인가서와 교황의 깃발을 내 걸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줄을 섰고, 긁어 모은 돈은 큰 쇠금고에 넣었습니다.

돈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고통 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 받습니다."
부자들은 별 무리가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조상과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를 비롯한 카톨릭의 모순을 지적한 95개 조항을 캐슬 교회 문에 못 박았습니다.

카톨릭 신학 박사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면제부를 파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면죄부는 경건한 사기다. 면죄부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아무 효력을 주지 못한다."
면죄부가 엉터리라는 가장 큰 증거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라는 연옥이라는 영계 자체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아직까지도 돈을 받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b) 기독교 박해 (종교 재판)

중세시대에 카톨릭의 타락과 모순에 대항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정죄되어 참혹한 고문과 희생을 당했습니다.
A.D.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카톨릭과 카톨릭의 영향권에 있는 권력자들이
함께 이단자를 고문하고 화형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고문대를 사용하여 손과 발을 묶고, 밧줄을 감아 사지를
잡아 당겨, 사지가 떨어져 나가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고문입니다.

'철갑처녀로 알려진 이 고문기구는 속이 비어 있는데
안에 칼들을 꽂아, 안에 갖힌 사람이 꼼짝 없이 칼에
둘러 쌓여 온 몸이 베임을 당하게 하는 고문입니다.

그들은 집게로 손톱을 뽑아냈고, 남녀 성기를 불로 지져댔으며, 큰 롤러에 송곳을 달고 개신교도 위에서 굴렸으며,
고문기구로 손 마디와, 다리와 발가락을 뭉갰습니다.
또한 희생자의 옷을 벗긴 뒤 줄로 팔을 등 뒤로 묶었고, 도르레를 사용하여 몸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신체 부위의 관절이 떨어져 나가게 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귀와 입에 끓는 납을 부어 넣었고, 눈을 빼거나,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하거나, 긴 못이 박힌 낭떠러지에 던져 넣었습니다.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 당한 사람은 감옥에 벽의 쇠사슬에 묶였고, 피로 가득찬 고문실에 살고 있는 쥐와 해충의
먹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종교 재판은 점점 대량학살로 이어졌는데 A.D. 1209년 베지에르라는 도시에서는 6,000명이 칼로 살육당했고,
A.D. 1211년 라바우어에서는 10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메린돌 대 학살에는 500명의 여인들이 창고에 갖힌 채 불어 타 죽었고, A.D. 1562년 오렌지 대학살에서는
교황 비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A.D. 1572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만명의 성경대로 믿는 위그노 교도들(Huguenots)이 대학살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많은 이단자를 살육한 것을 감사하는 미사를 들였고, 교황청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교황청은 조폐소에 명령을 내려 위그노 대학살을 축하하는 기념 동전을 만들었는데, 동전에는 칼과 십자가를 든 천사와 그 앞에서 겁에 질려 있는 위그노 교도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네델란드의 종교재판에서 고문하는 모습으로 프로테스탄트가 고문대에 발이 낀 채 거꾸로 매달려 있고, 밑에 있는 화로에서는 그의 눈을 지지기 위한 쇠막대기가 달구어지고 있습니다.


종교재판에 사용되었던 3가지 주요 고문방법을
보여주는 버나드 피카르트의 종교재판 고문실
<도르래(풀리), 물고문, 불고문>

나무에 묶여 화형 당하는 개신교도
고문을 행하며 사제들은 십자가를 들고
이단자들이 자기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교황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단(異端)을 징치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의로운 성도들을 고문하거나 죽였습니다.
다음의 몇 인용문들을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헌에서 발췌된, 공언하고 있는 박해의 정당성입니다.

만약 교회의 어느 신자가 불신실하게 된다던가, 이단에 빠져들던가, 혹은 어떤 다른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이러한 교인은 그가 의존돼 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을 견책할 수 있는 권한 뿐만 아니라 교회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외적인 형벌로써 고통을 줄 수 있고
세속적인 권력에 의뢰할 수도 있다.

Schouppe, A Course of Religious Instruction, 74, cited by Gane, 53.

화폐 위조범이나 다른 범죄자들이 세속적인 당국자들에 의해서도 즉시로 합당하게 사형에 넘겨지거든, 하물며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야말로 즉시 파문(破門)할 뿐더러, 분명히 사형에 처해야 하지 않겠는가.
St. Thomas Aquinas, Moral Theology, cited by Gane, 53.

영적인 검과 물질적인 검 모두가 교회의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검도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영적인 검도 교회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즉 하나는 사제(司祭)의 손에 의해, 다른 하나는 왕들과 병정들에 의하여 사용되지만, 사제의 뜻과 승낙에 의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공공연히 이단임을 공언하고, 말이나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말하노니, 출교 뿐만 아니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Lepicier, De Stailitate et Progressu Dogmatis, 211, 212, 194, cited by Gane, 53.


* 그러면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이단자는 누구인가?

"이단자란 카톨릭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 가르치는 특정한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고집스레
반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언하는 영세 받은 신자이다."
M. 뮤럴,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설, 4권 1885년 판, 170, cited by A. J. Weaner, 성서 기초교리, 148.

이렇게 독선적(獨善的)으로 규정된 이단의 개념에 따라, 이단자로 정죄되면 행정을 맡은 시장이나 당국자들은 닷새
이내에 그를 나무에 달아 불태워 죽여야 햐며, 만약 당국자가 이를 지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그도 파문에 처해지고
이단자로 취급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카톨릭 백과 사전, "종교 재판소" 8권, 34, 성서 기초교리, 148.


* 이러한 제도 아래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이단들, 특히 성도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했는가?

스페인에서만도 종교재판에 의하여 고난 당한 사람들은, 산 채로 화형 당한 사람이 31, 912명으로 헤아려졌고,
소위 복종하도록 강요된 참회자가 291, 450명으로 계산되었다.
알비젠스인(Albigenses)들의 대학살에서는 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교황 인노센트 3세가 1208년 알비젠스와 왈덴스인 박멸을 위해 일으킨 십자군 당시 제수이트(Jesuits)제도가 처음
확립된지 30년 동안에 900,000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당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알바 공(公·카톨릭신자)의 지시에 따라 36, 000명이 보통 집행자들에 의해 신속히 사형에
처해졌다는데, 알바 공은 이러한 행위를 자랑했다.
찰스 5세의 치하에서는 50, 000명의 프랑드르인들(Flanders) 지금의 벨기에의 서부, 네델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중세기 국가와 독일 사람들이 교수형과 화형과 산 채로 매장당했다.
Guinness, Key to the Apocalyps, 92, 93, Albert Barnes, Notes on Daniel, 328.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살상 행위로 꼽히는 1572년 8월 24일 의 바돌로매(Bartholomew) 제일(祭日)의 대학살이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하여 저질러졌음을 세상이 알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프랑스의 어린 왕 찰스 9세의 섭정 태후였던 캐더린(Catherine)은 강력해져 가는
개신교도들인 위그노파를 제거하기 위해, 위계(僞計)를 써서 그들을 한 데 모아 놓고, 졸지에 살상을 감행하여
남녀노유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위그노면 모두 죽여!'라고 외치며, 파리 시내에서만도 일주일 이내에 8,000여명을
죽였고 2달 동안 전국으로 확대한 살육을 통해 8만명 이상을 죽였음은 가공(可恐)스러운 역사로 기록돼 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러한 살육의 소식을 들은 교황청과 스페인 황실에서는 도덕적인 극악성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열광적으로 대환영했고, 로마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기념 메달이 발행되었다.
[교황권의 한 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J. A. Wylie, The History of Protestantism, vol. I, 16.

일찍이 인간 가운데 존재했던 어느 다른 제도보다도, 로마교회는 더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
역사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진 개신교도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로마 교회의 허다한 핍박에 관한 기념물들이 지금은 너무나 없기 때문에, 그들에 의한 엄청난 희생자들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떠한 상상력을 가지고서라도 희생자들의 고통을 적절히 인식할 수가 없음이 분명해졌다.
William E. H. Lecky,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of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vol II, 35, 37.

로마 교황은 저희 신앙 때문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로마교회의 우상 숭배에 편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서를 높이 쳐들며, 저희 생명의 죽음도 불사하고 죄를 대항하여 피로써 항거한 5천만의 남녀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H. G. 게이네쓰, 시대의 임박한 종말, 204, 성서 기초교리, 152.

로마 교회는 이러한 대대적인 핍박의 수단으로 1179년에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최초로 그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력으로 박멸하기 위해 십자군(十字軍)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십자군이 짓밟은 지역의
뒤처리를 위해 1229년 툴루스 종교회의(the Council of Toulouse)의 결정에 따라 악명(惡名) 높은 종교 재판소
(the Inquisition)를 개설한 것이다.
Lenwick, 75.

주로 도미니칸 신부(修道僧)들에 의해 운영된 이 종교재판수는 비밀리에 기소되고 집행되는 무서운 살인 및 고문
기구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 개종시키거나 죽음을 선사했다.
Foxe's Book of Martyrs(London: The Protestant Truth Society, Inc.), 10-15.

처음에는 왈덴스인들과 알비젠스인들을 색출하여 박멸(撲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1542년부터 다시 예수회(Jesuits) 신부들에 의해 운영되어 개신교 박멸에 무서운 힘을 드러냈다.

 

<알프스여 증언하라!>

알프스 계곡들을 살펴 보라!
그리고 그 계곡들의 전설을 읽지 말고 그들의 역사를 읽으라.
지금은 달빛에 비쳐 은 빛으로 눈부신 백설(白雪)의 계곡,
그 아름다운 색조 위에 뿌려졌던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검붉은 핏방울들.
자유를 울부짖으며 계곡을 뛰어넘는 폭포들,
그것들은 지금 로마교회의 칼날에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한 많은 시체를 넘어 포효(咆哮)하느니......,
물 길도 영롱하게 계곡을 내리달리는 강들이여,
그것들은 바디칸이 죽인 순교자들의 재를 실어 나르며,
그 시체 더미 위를 소리치며 흐르거라.
바위 틈과 계곡을 편답(遍踏)하라.
그것들이 위대한 영웅들의 행적을 증언하리라. (......)
로마 교회가 여러 세기 동안 겨루어 왔던 진리의 요람,
그 장엄한 골짜기들,
너, 알프스야,
심판의 날에 목소리를 높이거라.
산들아, 삼림아, 거기 있는 나무들아,
영원한 언덕들아,
잠잠치 말고,
저주받은 도시의 피흘린 죄악을 심판날 하나님께 증언하거라.

1400년 알프스 프라겔라(Pragela) 골짜기에 은신했던 왈덴스인들이 로마 교회가 보낸 토벌군에 의해 기습을 받아
짓밟히고 살해당한 뒤,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은 엄동설한에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수도 없이 얼어죽었다.
1488년 교황 인노센트 8세의 왈덴스인 박멸령에 따라, 프랑스 군대들이 알프스의 로이스(Loyse) 골짜기에 덮치자,
왈덴스인들은 굴과 동굴로 피신했으나, 입구에 불을 놓아 3, 000여명이 질식해 죽기도 했다. Ibid., 6.

이 모든 죄악은 알프스에 의하여 심판날에 증언될 것이다.
로마 교회의 이러한 핍박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1949년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기관지(La Civilita Cattolica)는 진술을 통해, 로마 교회는 그들이 소수일 때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들이 압도적인 다수가 될 때에는 종교적 차별을 실천한다고 역설(力說)했다.
전해져 오는 역사의 증언대로, "로마 교회는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서는 양처럼 온순하고, 동등한 처지에서는
여우처럼 교활하지만, 번성하게 되면 이리처럼 사나워진다"는 교훈이 새삼스러워진다.
(Rome is a lamb in adversity, a fox in equality, and a wolf in prosperity.) Gane, 54.

 

* 참고서적 : 천주교의 유래 (우두로우 저, 정동수 역, 말씀과 만남)

* 관련자료 :

1. 로마 카톨릭의 비밀들

2. 로마 카톨릭에 대한 성경적 진실

3. 천주교의 종교 재판 약사

4. 왜 로마 가톨릭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였는가?

5. 로마 가톨릭 배교의 역사

6. 천주교의 미사에 힌두교 의식을 섞는 예배의 현장

7. 바티칸의 주인 용

8. 태양숭배를 위해 지은 바티칸

출처: 빛과흑암의 역사/  등대지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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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사랑 흰 눈처럼...  최송연
  
차갑게 얼어붙은 
내 영혼의  뜨락에
저 흰 눈처럼 보드라운 
당신 사랑이
소리도 없이 내려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순 없으나
주님 사랑이 그렇게
사르르 사르르 
내 영혼을 감싸며 쌓여가고

그 사랑으로 소복소복
내가 채워지니
주위의 모든 것들이
어찌 그리도 아름답고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지요

그동안
내가 문제였었나 봐요
만물이 못생겼다 
미웁다고 투정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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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카톨릭 배교의 역사

         박노찬

      연   도

      사    건

      내      용

      주 요 인 물

       220 경


      · 로마 감독 카릭스투스가 처음으로 마16:18을 근거로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으며 로마의 감독이 그의 계승자라고 증명하고자 함

      카릭스투스

      (218-223 로마교황)

       250 경


      · 원래 로마교회가 축출됨

         → 이들은 알프스로 들어가고, 코르넬리우스파가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행세하다가 콘스탄틴이 공식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로 인정

      · 성직계급제도(hierachy) 본격화됨

      · 주교의 직위가 법적인 규례가 됨(카르타고이 키프리안에 의해 발전)

      이교주의자 코르넬리우스파

       300 경


      · 죽은자를 위한 기도 시작

      · 십자가를 긋는 것 시작

      · 마리아 평생 동정녀 교리가 가르쳐지기 시작

      · 침례중생설 등장

      · 4세기경부터 평신도의 설교가 금지


       312.10.28

      멜비안다리 전투

      · 대 음모자 콘슨탄틴 황제가 하늘 나타난 십자가의 환상을 봄

      콘스탄틴

       313

      밀라노 칙령

      · 기독교 공인

         → 참그리스도인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술수

         → 교회와 국가의 통합

      콘스탄틴(태양신숭배자)

       320


      · 밀랍 초(Wax Candles) 등장


       321


      ·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

      콘스탄틴

       325

      니케아 종교회의 (1차)

      - 318名 참석

      - Ecumenical

           Councils

      · 교회의 세상권력 통제를 위한 새로운 체제 구축 (많은 주교들의 협조로 이루어짐)

      · 콘스탄틴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도록 명령함

      · 콘스탄틴은 "최고의 성직자" 칭호를 받음

      · 성찬식 집례가 성직자에게만 허용

      ·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감독을 최고의 대감독이나 교부(추기경)로 임명함

      · 동방교회 수립

      · 부활절 제정 / 유월절 거부 / 아리우스 정죄

        (참고)결의내용 : "성자는 성부와 함께 동등하며, 동일 본질이며 영원한 분이시다"

      콘스탄틴이 소집

      아리우스/ 알렉산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

       365

      라오디게아 종교회의

      · 결의내용 : "개인은 교회에서 찬송을 작시, 작곡할 수 없고, 부를 수 없다"

      · 이에 따라 정규적인 임명자 외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일반인들은 찬송을 부를 수 없게 됨.


       375


      · 천사, 죽은 성인, 형상 숭배


       378


      · 로마 감독 데마수스가 이교도 최고 제사장 직인 Pontifix Maximus (최고 승원장)로 선임됨

        (이 칭호는 Julius Caesar 에 의해서 바벨론 이교주의로부터 로마 황제들에게 유입되었던 것임)

      데마수스

       380

       

      · 기독교 국교 선포

      데오도시우스

       381

      콘스탄티노플 회의 (2차)

      - 150名 참석

      · 니케아 종교회의 결과 승인

      · 삼위일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음

      · 아폴리나리우스파 정죄

      데오도시우스가 소집

      멜레티우스

       394


      · 미사가 매일의 의식이 됨


       426


      · 암흑시대 시작


       431

      에베소 종교회의 (3차)

      - 250名 참석

      ·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 공인됨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의 가르침을 승인한 것임)

          → 원래 그 칭호는 "Isis"의 칭호였음

      ·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임

      · 유아세례 인정 ->어거스틴의 가르침

      · 교황이 소유하고 있는 열쇠가 곧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바로 그 권력의 열쇠라고 주장함

         (로마 교황이 Fontifix Maximus가 된 지 53년 후)

      데오도시우스2세

      발렌티안3세

       *

       451

      칼케돈 공의회 (4차)

      - 500~600名 참석

      ·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반복

          cf) 초기수백년간 교황들은 마리아숭배를 금했었음

        (참고)결의내용 :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하지 않고,나눠지지 않고,분리될 수 없다"

      레오1세/ 디오스쿠르스

      유티케스

       500


      · 사제들이 특별한 의복을 입기 시작


       526


      · 병자성사가 행해짐


       529

       

      · 몬테가시노 수도원이 설립됨

         → 이것은 후에 모든 수도원의 모델로 승인됨

      · 수도사들에게 가난과 독신생활 외에도 은둔생활이 부과됨(6세기경)


        553

      콘스탄티노플 회의 (5차)

      -165名 참석

      ·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임

         →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으로, 카톨릭이 주장하는 무천년설의 토대가 되었음

      · 이 공의회의 결정하에 세속 국가는 점차 로마의 종교가 다스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 제국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함

      유스티아누스 황제

      유티키우스

       593


      · 연옥 교리 등장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결하게 되는 장소가 있다고 함 )

       "우리는 연옥이라는 곳이 있음을 믿음으로 아나니, 그곳은 사소한 실수들이나 혹은 죄로 인한 일시적인 징벌을 면죄받는 곳이다."

      그레고리 교황 / 죠지 1세

       600경


      · 예배에 라틴어 사용 시작

      ·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바치는 기도 시작

      · 그레고리 대제가 새로운 중세 신학을 요약함 (행위에 의한 구원, 연옥, 미사 등 포함)

      · 그레고리는 처음으로 교회 군대를 결성하고 자금을 조달함


       610


      · 보니페이스 3세(Boniface Ⅲ)가 최초로 교황(Pope)으로 공포됨


       680-681

      콘스탄티노플 회의 (6차)

      · (참고)결의내용 : 단일신론 거부/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함

      콘스탄틴4세

       709

       

      · 교황의 발에 입마추는 관습 시작 (이전에는 이 관습이 단지 황제들을 위해서만 행해졌음)


       *

       787

      니케아 회의 (7차)

      ·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가 공인됨

      · 성상숭배를 합법화시킴

      ·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을 헌당할 수 없게 함)

      · 성자숭배

      콘스탄틴6세

      이레네 황후

       847


      · 중대한 위조 문서들이 모두 수집됨(이 모든 문서들은 교황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음)

         - 평신도는 주교에 대해 고소할 수 없다

         - 사제는 상급자에 대해 고소할 수 없다

         - 주교에 대한 유죄판결은 72명의 증인을 필요로 한다

         - 주교는 세속 재판관 앞에서 고소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

      이시도르

       848

      미욱스 회의

      · 유대인에 대한 법적 규율을 강화함

        (반셈족주의의 근원은 대주교 아고바르드(778-840)가 쓴 5개의 반유대인 편지)


       850


      · 소금을 녹인 성수의 권위 인정

      교황 레오4세

       858


      · 콘스탄틴의 거짓 기증 문서들 등장

         - 콘스탄틴이 로마에게 온 땅의 세속 권력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권을 부여했다는 내용


       *

       869

      제8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 지도적인 감독의 문제가 쟁점

      · 희랍정교회와 로마카톨릭이 분리됨

      바시리우스 마레도

       890

       

      · 성 요셉 숭배가 처음으로 나타남


       927

       

      · 추기경 대학이 시작됨

       

       965


      · 벨의 세례가 제정됨

      교황 요한14세

       995


      · 죽은성도들을 성자로 인정하는 것이 시작됨

      요한15세

       998

       

      · 금요일과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금욕이 부과됨


       1010-1012

      유대인 대학살

      · 루엔, 오를레앙, 리모게스, 마인즈와 로마 등지에서 발생


       1054

      카톨릭 - 정교회 분리

      · 로마 교황 레오4세가 콘스탄티노플 교부(그리스 정교회의 우두머리)를 파문함

      · 콘스탄티노플 교부 또한 로마 교황(희랍 정교회 교부)를 파문

      교황 레오4세

       1059

       

      · 추기경단(the College of Cardinals)조직

         → 교황 선출 기능을 담당


       1074

       

      · 독신생활 명령

       "로마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설되었고 로마 교황만이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만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심판당하지 않고 로마교회는 결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영원히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

      교황 그레고리7세

      →'이교도는 죽여도 좋다'고

       1096

      십자군 원정 시작

      · 팔레스타인을 회교도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 7차 이상에 걸쳐 행해짐)

      · 그리스정교인들 및 자기들과 입장이 다른 참 기독교 신자들을 대량 학살함

      · 십자군 원정의 결과 교황청의 권위가 격상됨

      우르반2세

       1100경


      · 미사를 드릴 때 사제에게 돈을 바치는 관습이 보편화됨(시작은 7~8세기 경)


       1123

      제1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서방교회 회의)

       -300名참석

      · 공식적으로 성직자에게 독신생활을 부과함

      교황 칼릭스투스2세

       1139

      제2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 교황권에 대항하는 불순응자들(페트로-불로시안파, 아놀드파)을 처단할 목적으로 소집

      교황 이노센트2세

       1170


      · 사제 앞에서만 유언할 수 있도록 법령 공포

         → 임종 시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

      교황 알렉산더3세

       1179

      제3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 왈도파와 알비겐파의 정죄를 위해 소집

      · 칼로 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함

      월터 맵

       1184

      베로나 공의회

      · 종교재판소(Inquisition) 인정

         - 교황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고문을 주도록 결정

      · 왈도파를 파문함

      교황 루시우스3세

       1190


      · 면죄부 판매 시작(십자군 원정시부터 유행함)

      · "선행", "연옥"

        cf) 면죄부는 원래 사죄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자선헌금이었으나 16C 초에는 교황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됨

      교황 클레멘트3세

       1215

      제4차 라테랑 회의

      - 412名의 감독과

      800名의 수도원장과

      부원장등 참석

      · 유대인들에게 노란'수치의 뱃지'착용 명령

      · 비밀 고해 제정

      · 화체설 공식 교리로 선포

      · 국가에게 이단자 처벌 권한을 부여함

      · 교황 이노센트 3세가 교황직의 세속적 위치를 역사상 그 절정에 올려놓음

       "베드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선택되었다. 그는 하나님보다는 아래, 인간들보다는 위에 위치한다"

      교황 이노센트3세

       1226


      · 성체 숭배가 시작됨


       1229

      톨루스 회의(발렌시아 공회)

      · 평신도에게 성경 소유 및 읽기 금지

      · 이단심문소 허용

      · 자국어 성경 번역 금지

      교황 그레고리9세

       1234


      · 카메라 아포스틀르카(재정 담당부) 설치

         - 증식되는 교회 재산 관리를 위해 설치


       1245

      리용 회의

      · 독일황제 프레드릭1세 파문 목적

      교황 이노센트 4세

       1252


      · 고문을 인정함

      교황 이노센트 4세

       1274


      · 로마파와 희랍파의 통일 시도 -> 실패


       1287


      · 수도사의 어깨걸이 등장

      영국의 승려 시몬 스토크

       1300.2.22

      희년(Jubilee)선포

      · 교황 보니페이스 8세(성년의 창시자)는 이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고 성 베드로성당, 성 바울성당 방문자에게 "일체의 모든 죄를 아무런 보류사항 없이" 사해줄 것을 약속함


       1301


      · "Unam Sanctam"("하나 그리고 거룩"을 의미)

        "모든 인간들이, 일체의 예외가 없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하다"

         -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승복해야 한다

         - 물질의 검(劍)은 교회를 위해 빼야 하고, 영적인 검은 교회가 뺀다

         - 교황의 수위권이 세속적인 일에도 행사되어야 한다

         - 세속 정권은 교회를 상위 권세로 여기고 승복해야만 한다

      ·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참교회이고, 이 교회 밖에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함

      보니페이스8세

       


        참고 : 1320~1384 죤 위클리프 (영국)

                  1373~1415 죤 후스


       1378-1417

      교황청의 대분열

      (the Great Papal Schism)

      · 서로 경쟁하던 세 명의 교황, 즉 우르반4세, 클레멘트7세, 알렉산더5세가 서로 파문함


       1415

       

      · 죤 후스 화형 (보헤미야)


       1410-1418

      콘스탄스 회의

      · 교황 마틴5세에의해 세명의 교황이 쫓겨남

      · 교황 알렉산더5세는 볼로냐에 수감됨

      · 1414년회의에서 평신도들에게 주의 만찬시 포도주를 주는 것 금지가 선포됨(그레고리12세)


       1439

      플로렌스 회의

      · 연옥 교리 채택 (1548년 재확인)

      · 7가지 성사 한정

      유게니우스4세

       


        참고 : 1452~1498 사보나롤라 (이태리)


       1453-1454

      실레시아 대학살

      · 종교재판소장인 카피스트라노 성 요한에 의해서 시작됨


       


        참고 : 1481~1531 쯔빙글리 (스위스)

                 1483~1546 마틴루터 (독일)

                   - 1530년 멜랑크톤과 함께 루터교회 조직

                 1509~1564 죤 칼빈 (프랑스)

                   - 1541년 장로교회 출현


       1508


      · 염주

      교황 율리우스3세

       1521.1.


      ·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함

      교황 레오10세

       


        참고 : 1534(5) 영국 국교회 시작


       1540


      · 예수회 공인

      교황 바울3세

       1555

      "옥스버그의 평화"

      · 로마카톨릭과 루터교회의 상호 불간섭 협정


       


        참고 : 1560 죤 녹스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 설립


       1545-1563

      트렌트 회의

      (45 - 47)

      (51 - 52)

      (62 - 63)

      ·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지닌다고 선언

      · 외경들이 성서에 첨가됨 (외경 중 상당부분을 정경으로 인정)

      · 화채설 부인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 (구원에 필수불가결하다고 함)

      · 성인들의 중보 부인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

      · 죽은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미사 인정 (순교자들의 사체 숭배 결정)

         →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함

      · 연옥 개념을 교리화시킴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른다고 믿거나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완벽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파문당함

      · 면죄부의 유용성 재확인

      · 7성례전 고수

        cf) 로마 카톨릭 교리의 핵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

      교황 바울 3세 ~

      교황 피우스 4세

       1572.8.22

      성 바돌로메 대학살

      · 프랑스 왕의 여동생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꼴리니 장군과 결혼하게 된 사건이 발단

      · 결혼식 축하연 4일째 되던 날 한밤중에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모든 프로테스탄트 집에 난입

      · 처음 3일동안 만명 이상의 프로테스탄트 살해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인 위그노(Huguenots) 학살)

      · 파리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 총 7만명(혹은 10만명) 학살됨


       1600경


      · 스카플라리오 등장 - 모직으로 된 긴 천 조각을 옷의 안이나 위에 걸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이런 스카플라리오를 축복한 그룹들이 제공하는 면죄를 얻기 위한 것임


       


         참고 : 1611 킹제임스 성경


       1641.10

      아일랜드 대학살

      ·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베푼 향연에서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이 동시에 살해됨 (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약 40,000 명이 무참히 살해됨 )


       1648

      "웨스트라리아의 평화"

      · 로마 카톨릭, 루터교회, 장로교회간의 평화협정

        참고 : 16세기 말 세속정부에 의해 뒷받침된 다섯 개의 국교회들 즉, 로마카톨릭, 희랍정교회, 영국교회, 루터교회(독일교회), 스코틀랜드교회(장로교회) 모두가 재침례교도와 왈덴시스를 핍박하였음


       


        참고 : 1703 죤 웨슬레 / 1708 찰스 웨슬레 / 1714 죠지 화이트필드 / 1788 알렉산더 켐벨


       1814


      · 예수회(Jesuits) 부활


       1854.11.8


      · 마리아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가 임신하는 첫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특권과 은혜로 인해 원죄의 모든 더러운 흔적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

      교황 비오9세

       1856

       

      · 연옥협회 (Purgatorian Society) 설립

         → 죽은 후에 자신을 위해 미사를 드려주도록 미리 등록하고 돈을 지불케함


       1864


      · 80가지 죄의 요목 선언

         - 로마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종교나 양심이나 언어나 출판 및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억제함

       "하나님의 법에 관한 한, 어느 누구에게도 카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참 권한이 없고, 카톨릭 교리 이외의 다른 교회의 회원이 될 참 권한이 없으며, 카톨릭 교회가 명하거나 인가한 것 이외의 어떠한 다른 형태의 예배를 행할 권리가 없다"

         - 세상의 모든 규율에 대한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주장함

      교황 비오9세

       1870

      바티칸 회의

      · 교황 무오설 선포

         → "교황은 직무중의 그리스도로서 재판하고 권능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시다"

      교황 비오9세

       1908


      · 신랑 신부의 종교가 달라 천주교 사제가 집례하지 않는 모든 결혼을 무효화시킴


       1921

      평신도 사도직 운동 시작

      · 아일랜드 더불린 시에서 결성됨

      · 마리아 군단을 통해 시작됨

      · 목적은 니콜라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전임


       1924

      공산주의자들과 제1차 협상

      · 러시아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 바꾸겠다는 교황 비오9세의 계획을 레닌에게 전달

      ·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조치들이 만들어짐

      교황 눈시오, 유게니오 파셀리

       1929

      바티칸 - 파시스트 협약

      · 이탈리아독재자 뭇솔리니와 교황에 의해 체결

      · 추기경 파셀리는 자기 교회의 미래는 공산주의가 아닌 나찌와 함께할 것이라고 확언

      교황 비오11세

       1933.6

      히틀러 - 바티칸 협약

      · 교회 문서 16조

         →"나는 합법적으로 설립된 나찌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나찌정부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유해한 행동들을 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1946.5.13


      · "파티마의 숙녀"(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고 그녀를 "세상의 여왕"으로 공포함

      교황 비오11세

       1950.11.1


      · 마리아 몽소승천(蒙召昇天)(Assumption of Mary) 선언

         → "동정녀 마리아의 육과 혼이 천상영광으로 승천하셨도다" [교황교령]

      ·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줌

      교황 비오12세

       1960

      바티칸 - 모스크바 협약

      · 공산주의의 주요 적이었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공산주의와 제휴

      교황 비오11세

       1962  -1965

      제2차 바티칸 회의

      · 로마의 공식적인 이미지 재형성에 주력

      ·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성찬식 전에 먹고 마시는 것, 성체와 기타 다른 기물들을 만지는 것 등 예전에는 행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들이 폐지됨

      · 주제는 에큐메니즘(세계 종교일치)

         - 종교통합을 위한 진일보가 이루어짐

      · 공산주의와 제휴

      · 교리의 재확인 :

         - 교황수위권

         - 로마 카톨릭 사제직

         - 미사의 화체설

         - 고백성사

         - 성유지순례

         - 성례전적인 (sacramental) 믿음+행위복음

         - 성경과 동등시되는 카톨릭 전승

         - 그리스도와 공동대속자이자 하늘황후(하늘의 여왕)인 마리아

         - 연옥

         - 죽은자를 위한 기도

         - 죽은자에게 하는 기도 등

      · 외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교회 교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사실상 그것을 강화했음

      교황 요한23세

       1965


      ·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

        "교회의 동정녀가 이제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

       1967


      · 카톨릭 교회 내에서 오순절 은사운동이 시작됨


       1970년대


      · 에큐메니즘의 확산

      · 기독교인들을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함


       1973


      · 빌리그래함의 "Key 73" 집회를 기점으로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의 최초의 중요한 합작이 시작됨

       

       1980년대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 21회에 걸친 세계 순례

        (미국, 한국, 중앙아메리카, 극동 지방의 국가들, 스위스, 캐나다 등 포함)


       1982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암살 미수사건

         →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이 때 입은 심한 상처로부터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마리아라고 함


       1984


      ·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에서 마리아에게 이 세상을 봉헌


       1987


      · 마리아 숭배를 위한 해로 지정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6


      · 교황이 진화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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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카톨릭 배교의 역사

         박노찬

      연   도

      사    건

      내      용

      주 요 인 물

       220 경


      · 로마 감독 카릭스투스가 처음으로 마16:18을 근거로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으며 로마의 감독이 그의 계승자라고 증명하고자 함

      카릭스투스

      (218-223 로마교황)

       250 경


      · 원래 로마교회가 축출됨

         → 이들은 알프스로 들어가고, 코르넬리우스파가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행세하다가 콘스탄틴이 공식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로 인정

      · 성직계급제도(hierachy) 본격화됨

      · 주교의 직위가 법적인 규례가 됨(카르타고이 키프리안에 의해 발전)

      이교주의자 코르넬리우스파

       300 경


      · 죽은자를 위한 기도 시작

      · 십자가를 긋는 것 시작

      · 마리아 평생 동정녀 교리가 가르쳐지기 시작

      · 침례중생설 등장

      · 4세기경부터 평신도의 설교가 금지


       312.10.28

      멜비안다리 전투

      · 대 음모자 콘슨탄틴 황제가 하늘 나타난 십자가의 환상을 봄

      콘스탄틴

       313

      밀라노 칙령

      · 기독교 공인

         → 참그리스도인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술수

         → 교회와 국가의 통합

      콘스탄틴(태양신숭배자)

       320


      · 밀랍 초(Wax Candles) 등장


       321


      ·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

      콘스탄틴

       325

      니케아 종교회의 (1차)

      - 318名 참석

      - Ecumenical

           Councils

      · 교회의 세상권력 통제를 위한 새로운 체제 구축 (많은 주교들의 협조로 이루어짐)

      · 콘스탄틴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도록 명령함

      · 콘스탄틴은 "최고의 성직자" 칭호를 받음

      · 성찬식 집례가 성직자에게만 허용

      ·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감독을 최고의 대감독이나 교부(추기경)로 임명함

      · 동방교회 수립

      · 부활절 제정 / 유월절 거부 / 아리우스 정죄

        (참고)결의내용 : "성자는 성부와 함께 동등하며, 동일 본질이며 영원한 분이시다"

      콘스탄틴이 소집

      아리우스/ 알렉산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

       365

      라오디게아 종교회의

      · 결의내용 : "개인은 교회에서 찬송을 작시, 작곡할 수 없고, 부를 수 없다"

      · 이에 따라 정규적인 임명자 외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일반인들은 찬송을 부를 수 없게 됨.


       375


      · 천사, 죽은 성인, 형상 숭배


       378


      · 로마 감독 데마수스가 이교도 최고 제사장 직인 Pontifix Maximus (최고 승원장)로 선임됨

        (이 칭호는 Julius Caesar 에 의해서 바벨론 이교주의로부터 로마 황제들에게 유입되었던 것임)

      데마수스

       380

       

      · 기독교 국교 선포

      데오도시우스

       381

      콘스탄티노플 회의 (2차)

      - 150名 참석

      · 니케아 종교회의 결과 승인

      · 삼위일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음

      · 아폴리나리우스파 정죄

      데오도시우스가 소집

      멜레티우스

       394


      · 미사가 매일의 의식이 됨


       426


      · 암흑시대 시작


       431

      에베소 종교회의 (3차)

      - 250名 참석

      ·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 공인됨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의 가르침을 승인한 것임)

          → 원래 그 칭호는 "Isis"의 칭호였음

      ·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임

      · 유아세례 인정 ->어거스틴의 가르침

      · 교황이 소유하고 있는 열쇠가 곧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바로 그 권력의 열쇠라고 주장함

         (로마 교황이 Fontifix Maximus가 된 지 53년 후)

      데오도시우스2세

      발렌티안3세

       *

       451

      칼케돈 공의회 (4차)

      - 500~600名 참석

      ·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반복

          cf) 초기수백년간 교황들은 마리아숭배를 금했었음

        (참고)결의내용 :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하지 않고,나눠지지 않고,분리될 수 없다"

      레오1세/ 디오스쿠르스

      유티케스

       500


      · 사제들이 특별한 의복을 입기 시작


       526


      · 병자성사가 행해짐


       529

       

      · 몬테가시노 수도원이 설립됨

         → 이것은 후에 모든 수도원의 모델로 승인됨

      · 수도사들에게 가난과 독신생활 외에도 은둔생활이 부과됨(6세기경)


        553

      콘스탄티노플 회의 (5차)

      -165名 참석

      ·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받아들임

         →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으로, 카톨릭이 주장하는 무천년설의 토대가 되었음

      · 이 공의회의 결정하에 세속 국가는 점차 로마의 종교가 다스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 제국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함

      유스티아누스 황제

      유티키우스

       593


      · 연옥 교리 등장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결하게 되는 장소가 있다고 함 )

       "우리는 연옥이라는 곳이 있음을 믿음으로 아나니, 그곳은 사소한 실수들이나 혹은 죄로 인한 일시적인 징벌을 면죄받는 곳이다."

      그레고리 교황 / 죠지 1세

       600경


      · 예배에 라틴어 사용 시작

      · 마리아, 죽은 성인들, 천사들에게 바치는 기도 시작

      · 그레고리 대제가 새로운 중세 신학을 요약함 (행위에 의한 구원, 연옥, 미사 등 포함)

      · 그레고리는 처음으로 교회 군대를 결성하고 자금을 조달함


       610


      · 보니페이스 3세(Boniface Ⅲ)가 최초로 교황(Pope)으로 공포됨


       680-681

      콘스탄티노플 회의 (6차)

      · (참고)결의내용 : 단일신론 거부/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함

      콘스탄틴4세

       709

       

      · 교황의 발에 입마추는 관습 시작 (이전에는 이 관습이 단지 황제들을 위해서만 행해졌음)


       *

       787

      니케아 회의 (7차)

      ·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가 공인됨

      · 성상숭배를 합법화시킴

      ·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을 헌당할 수 없게 함)

      · 성자숭배

      콘스탄틴6세

      이레네 황후

       847


      · 중대한 위조 문서들이 모두 수집됨(이 모든 문서들은 교황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음)

         - 평신도는 주교에 대해 고소할 수 없다

         - 사제는 상급자에 대해 고소할 수 없다

         - 주교에 대한 유죄판결은 72명의 증인을 필요로 한다

         - 주교는 세속 재판관 앞에서 고소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다

      이시도르

       848

      미욱스 회의

      · 유대인에 대한 법적 규율을 강화함

        (반셈족주의의 근원은 대주교 아고바르드(778-840)가 쓴 5개의 반유대인 편지)


       850


      · 소금을 녹인 성수의 권위 인정

      교황 레오4세

       858


      · 콘스탄틴의 거짓 기증 문서들 등장

         - 콘스탄틴이 로마에게 온 땅의 세속 권력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권을 부여했다는 내용


       *

       869

      제8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 지도적인 감독의 문제가 쟁점

      · 희랍정교회와 로마카톨릭이 분리됨

      바시리우스 마레도

       890

       

      · 성 요셉 숭배가 처음으로 나타남


       927

       

      · 추기경 대학이 시작됨

       

       965


      · 벨의 세례가 제정됨

      교황 요한14세

       995


      · 죽은성도들을 성자로 인정하는 것이 시작됨

      요한15세

       998

       

      · 금요일과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금욕이 부과됨


       1010-1012

      유대인 대학살

      · 루엔, 오를레앙, 리모게스, 마인즈와 로마 등지에서 발생


       1054

      카톨릭 - 정교회 분리

      · 로마 교황 레오4세가 콘스탄티노플 교부(그리스 정교회의 우두머리)를 파문함

      · 콘스탄티노플 교부 또한 로마 교황(희랍 정교회 교부)를 파문

      교황 레오4세

       1059

       

      · 추기경단(the College of Cardinals)조직

         → 교황 선출 기능을 담당


       1074

       

      · 독신생활 명령

       "로마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설되었고 로마 교황만이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만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심판당하지 않고 로마교회는 결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영원히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

      교황 그레고리7세

      →'이교도는 죽여도 좋다'고

       1096

      십자군 원정 시작

      · 팔레스타인을 회교도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 7차 이상에 걸쳐 행해짐)

      · 그리스정교인들 및 자기들과 입장이 다른 참 기독교 신자들을 대량 학살함

      · 십자군 원정의 결과 교황청의 권위가 격상됨

      우르반2세

       1100경


      · 미사를 드릴 때 사제에게 돈을 바치는 관습이 보편화됨(시작은 7~8세기 경)


       1123

      제1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서방교회 회의)

       -300名참석

      · 공식적으로 성직자에게 독신생활을 부과함

      교황 칼릭스투스2세

       1139

      제2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 교황권에 대항하는 불순응자들(페트로-불로시안파, 아놀드파)을 처단할 목적으로 소집

      교황 이노센트2세

       1170


      · 사제 앞에서만 유언할 수 있도록 법령 공포

         → 임종 시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

      교황 알렉산더3세

       1179

      제3차 라테랑 회의(서방 공의회)

      · 왈도파와 알비겐파의 정죄를 위해 소집

      · 칼로 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함

      월터 맵

       1184

      베로나 공의회

      · 종교재판소(Inquisition) 인정

         - 교황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고문을 주도록 결정

      · 왈도파를 파문함

      교황 루시우스3세

       1190


      · 면죄부 판매 시작(십자군 원정시부터 유행함)

      · "선행", "연옥"

        cf) 면죄부는 원래 사죄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자선헌금이었으나 16C 초에는 교황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됨

      교황 클레멘트3세

       1215

      제4차 라테랑 회의

      - 412名의 감독과

      800名의 수도원장과

      부원장등 참석

      · 유대인들에게 노란'수치의 뱃지'착용 명령

      · 비밀 고해 제정

      · 화체설 공식 교리로 선포

      · 국가에게 이단자 처벌 권한을 부여함

      · 교황 이노센트 3세가 교황직의 세속적 위치를 역사상 그 절정에 올려놓음

       "베드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선택되었다. 그는 하나님보다는 아래, 인간들보다는 위에 위치한다"

      교황 이노센트3세

       1226


      · 성체 숭배가 시작됨


       1229

      톨루스 회의(발렌시아 공회)

      · 평신도에게 성경 소유 및 읽기 금지

      · 이단심문소 허용

      · 자국어 성경 번역 금지

      교황 그레고리9세

       1234


      · 카메라 아포스틀르카(재정 담당부) 설치

         - 증식되는 교회 재산 관리를 위해 설치


       1245

      리용 회의

      · 독일황제 프레드릭1세 파문 목적

      교황 이노센트 4세

       1252


      · 고문을 인정함

      교황 이노센트 4세

       1274


      · 로마파와 희랍파의 통일 시도 -> 실패


       1287


      · 수도사의 어깨걸이 등장

      영국의 승려 시몬 스토크

       1300.2.22

      희년(Jubilee)선포

      · 교황 보니페이스 8세(성년의 창시자)는 이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고 성 베드로성당, 성 바울성당 방문자에게 "일체의 모든 죄를 아무런 보류사항 없이" 사해줄 것을 약속함


       1301


      · "Unam Sanctam"("하나 그리고 거룩"을 의미)

        "모든 인간들이, 일체의 예외가 없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하다"

         -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승복해야 한다

         - 물질의 검(劍)은 교회를 위해 빼야 하고, 영적인 검은 교회가 뺀다

         - 교황의 수위권이 세속적인 일에도 행사되어야 한다

         - 세속 정권은 교회를 상위 권세로 여기고 승복해야만 한다

      ·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참교회이고, 이 교회 밖에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함

      보니페이스8세

       


        참고 : 1320~1384 죤 위클리프 (영국)

                  1373~1415 죤 후스


       1378-1417

      교황청의 대분열

      (the Great Papal Schism)

      · 서로 경쟁하던 세 명의 교황, 즉 우르반4세, 클레멘트7세, 알렉산더5세가 서로 파문함


       1415

       

      · 죤 후스 화형 (보헤미야)


       1410-1418

      콘스탄스 회의

      · 교황 마틴5세에의해 세명의 교황이 쫓겨남

      · 교황 알렉산더5세는 볼로냐에 수감됨

      · 1414년회의에서 평신도들에게 주의 만찬시 포도주를 주는 것 금지가 선포됨(그레고리12세)


       1439

      플로렌스 회의

      · 연옥 교리 채택 (1548년 재확인)

      · 7가지 성사 한정

      유게니우스4세

       


        참고 : 1452~1498 사보나롤라 (이태리)


       1453-1454

      실레시아 대학살

      · 종교재판소장인 카피스트라노 성 요한에 의해서 시작됨


       


        참고 : 1481~1531 쯔빙글리 (스위스)

                 1483~1546 마틴루터 (독일)

                   - 1530년 멜랑크톤과 함께 루터교회 조직

                 1509~1564 죤 칼빈 (프랑스)

                   - 1541년 장로교회 출현


       1508


      · 염주

      교황 율리우스3세

       1521.1.


      ·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함

      교황 레오10세

       


        참고 : 1534(5) 영국 국교회 시작


       1540


      · 예수회 공인

      교황 바울3세

       1555

      "옥스버그의 평화"

      · 로마카톨릭과 루터교회의 상호 불간섭 협정


       


        참고 : 1560 죤 녹스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 설립


       1545-1563

      트렌트 회의

      (45 - 47)

      (51 - 52)

      (62 - 63)

      ·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지닌다고 선언

      · 외경들이 성서에 첨가됨 (외경 중 상당부분을 정경으로 인정)

      · 화채설 부인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 (구원에 필수불가결하다고 함)

      · 성인들의 중보 부인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

      · 죽은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미사 인정 (순교자들의 사체 숭배 결정)

         →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함

      · 연옥 개념을 교리화시킴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에 이른다고 믿거나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완벽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파문당함

      · 면죄부의 유용성 재확인

      · 7성례전 고수

        cf) 로마 카톨릭 교리의 핵심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

      교황 바울 3세 ~

      교황 피우스 4세

       1572.8.22

      성 바돌로메 대학살

      · 프랑스 왕의 여동생이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꼴리니 장군과 결혼하게 된 사건이 발단

      · 결혼식 축하연 4일째 되던 날 한밤중에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모든 프로테스탄트 집에 난입

      · 처음 3일동안 만명 이상의 프로테스탄트 살해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인 위그노(Huguenots) 학살)

      · 파리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 총 7만명(혹은 10만명) 학살됨


       1600경


      · 스카플라리오 등장 - 모직으로 된 긴 천 조각을 옷의 안이나 위에 걸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이런 스카플라리오를 축복한 그룹들이 제공하는 면죄를 얻기 위한 것임


       


         참고 : 1611 킹제임스 성경


       1641.10

      아일랜드 대학살

      ·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베푼 향연에서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이 동시에 살해됨 (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약 40,000 명이 무참히 살해됨 )


       1648

      "웨스트라리아의 평화"

      · 로마 카톨릭, 루터교회, 장로교회간의 평화협정

        참고 : 16세기 말 세속정부에 의해 뒷받침된 다섯 개의 국교회들 즉, 로마카톨릭, 희랍정교회, 영국교회, 루터교회(독일교회), 스코틀랜드교회(장로교회) 모두가 재침례교도와 왈덴시스를 핍박하였음


       


        참고 : 1703 죤 웨슬레 / 1708 찰스 웨슬레 / 1714 죠지 화이트필드 / 1788 알렉산더 켐벨


       1814


      · 예수회(Jesuits) 부활


       1854.11.8


      · 마리아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가 임신하는 첫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특권과 은혜로 인해 원죄의 모든 더러운 흔적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

      교황 비오9세

       1856

       

      · 연옥협회 (Purgatorian Society) 설립

         → 죽은 후에 자신을 위해 미사를 드려주도록 미리 등록하고 돈을 지불케함


       1864


      · 80가지 죄의 요목 선언

         - 로마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종교나 양심이나 언어나 출판 및 과학적 발견의 자유를 억제함

       "하나님의 법에 관한 한, 어느 누구에게도 카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참 권한이 없고, 카톨릭 교리 이외의 다른 교회의 회원이 될 참 권한이 없으며, 카톨릭 교회가 명하거나 인가한 것 이외의 어떠한 다른 형태의 예배를 행할 권리가 없다"

         - 세상의 모든 규율에 대한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주장함

      교황 비오9세

       1870

      바티칸 회의

      · 교황 무오설 선포

         → "교황은 직무중의 그리스도로서 재판하고 권능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시다"

      교황 비오9세

       1908


      · 신랑 신부의 종교가 달라 천주교 사제가 집례하지 않는 모든 결혼을 무효화시킴


       1921

      평신도 사도직 운동 시작

      · 아일랜드 더불린 시에서 결성됨

      · 마리아 군단을 통해 시작됨

      · 목적은 니콜라 체제를 굳히기 위한 작전임


       1924

      공산주의자들과 제1차 협상

      · 러시아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 바꾸겠다는 교황 비오9세의 계획을 레닌에게 전달

      ·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조치들이 만들어짐

      교황 눈시오, 유게니오 파셀리

       1929

      바티칸 - 파시스트 협약

      · 이탈리아독재자 뭇솔리니와 교황에 의해 체결

      · 추기경 파셀리는 자기 교회의 미래는 공산주의가 아닌 나찌와 함께할 것이라고 확언

      교황 비오11세

       1933.6

      히틀러 - 바티칸 협약

      · 교회 문서 16조

         →"나는 합법적으로 설립된 나찌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나찌정부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유해한 행동들을 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1946.5.13


      · "파티마의 숙녀"(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고 그녀를 "세상의 여왕"으로 공포함

      교황 비오11세

       1950.11.1


      · 마리아 몽소승천(蒙召昇天)(Assumption of Mary) 선언

         → "동정녀 마리아의 육과 혼이 천상영광으로 승천하셨도다" [교황교령]

      ·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줌

      교황 비오12세

       1960

      바티칸 - 모스크바 협약

      · 공산주의의 주요 적이었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공산주의와 제휴

      교황 비오11세

       1962  -1965

      제2차 바티칸 회의

      · 로마의 공식적인 이미지 재형성에 주력

      ·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성찬식 전에 먹고 마시는 것, 성체와 기타 다른 기물들을 만지는 것 등 예전에는 행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들이 폐지됨

      · 주제는 에큐메니즘(세계 종교일치)

         - 종교통합을 위한 진일보가 이루어짐

      · 공산주의와 제휴

      · 교리의 재확인 :

         - 교황수위권

         - 로마 카톨릭 사제직

         - 미사의 화체설

         - 고백성사

         - 성유지순례

         - 성례전적인 (sacramental) 믿음+행위복음

         - 성경과 동등시되는 카톨릭 전승

         - 그리스도와 공동대속자이자 하늘황후(하늘의 여왕)인 마리아

         - 연옥

         - 죽은자를 위한 기도

         - 죽은자에게 하는 기도 등

      · 외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교회 교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사실상 그것을 강화했음

      교황 요한23세

       1965


      ·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

        "교회의 동정녀가 이제 교회의 어머니가 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

       1967


      · 카톨릭 교회 내에서 오순절 은사운동이 시작됨


       1970년대


      · 에큐메니즘의 확산

      · 기독교인들을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함


       1973


      · 빌리그래함의 "Key 73" 집회를 기점으로 로마 카톨릭과 기독교의 최초의 중요한 합작이 시작됨

       

       1980년대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 21회에 걸친 세계 순례

        (미국, 한국, 중앙아메리카, 극동 지방의 국가들, 스위스, 캐나다 등 포함)


       1982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암살 미수사건

         →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이 때 입은 심한 상처로부터 목숨을 구해 준 것이 마리아라고 함


       1984


      ·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에서 마리아에게 이 세상을 봉헌


       1987


      · 마리아 숭배를 위한 해로 지정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6


      · 교황이 진화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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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 얻은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는가? (가룟 유다, 사울 왕, 히6:4-9의 경우)

      [질문]

      히브리서 6장 4 - 9절을 근거로 해서 가룟 유다와 사울의 경우처럼 한 번 잃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연 한 번 얻은 구원을 잃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까?

      [답변]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사실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이 인간의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잃고 안 잃고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구원했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 준 구원을 언제든 취소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채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 질문이 성립되려면 구원 받은 인간이 구원 이후에 하는 짓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 하나님이 구원했을 때의 그 심정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이 구원 되었을 때의 상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상태입니까?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롬5:8)

      간혹 질문자가 적시한 대로  히브리서 6:4-9절을 근거로 해서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예를 들어 구원 받은 사람도 그 구원이 취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성경의 진리를 추적해서 과연 그런 주장이 옳은 지 살펴 보기로 합시다.

      사울 왕의 경우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 삶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하나님의 인류 전체를 향한 구속사를 진행 시킴에 있어서 일정 부분의 역할만 담당 시키기 위해 선택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는 상관 없이 악역 배우 역으로만  등장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할 줄 아셔야 하는데 사울과 유다의 경우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사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래 의도는 완전한 신정 국가였습니다. 세속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라고 줄기차게 사무엘에게 요구했습니다. 실망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7)고 그 사태를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재차 그들에게 세족적 군주 제도의 폐해를 열심히 설명해 준 후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8:18)고 까지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사무엘더러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비록 성경 기록에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 보았노라”(삼상9:16)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사울 개인에 대한 구원의 언급은 없습니다. 자기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초대 왕의 역할을 할 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선택에 주권적 간섭을 했다고 해서 사울을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기준에 합당한 왕으로 사울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왕 다윗을 예비 해 놓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뽑은 왕 사울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과 극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해 그를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울의 무엇을 보고 왕으로 뽑았습니까?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9:2) 그들의  기준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다”에 가장 적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세울 때에 사무엘에게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백성의 요구에 맞게 고른 왕일 뿐 내 참 의도와는 상관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삼상16:12) 신체적 조건을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얼굴이 동안이었고 눈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전쟁과는 전혀 상관 없는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자기들을 앞서 나가 싸워줄 전쟁의 용사를 왕으로  구했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세울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에 맞추기 위해 신인동형법(神人同型法 Anthropomorphism) 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구원했다가 취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을 했다는 것(삼상16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구약 시대는 알다시피 성령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었고 승천하시기 전 주님이 약속했던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 이후 신약시대는 성령이 신자에게 한 번 임하면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개인의 구원과는 상관 없이 성령이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에 특정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왔다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우는 절차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며 또 본인을 좀더 강건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당신의 뜻을 거슬려 세속적 왕을 세워주지만 전혀 자격과 능력도 없는 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악인이라도 일반적 은총으로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망하게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자격 없는 자를 세웠거나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를 변화시키기 원한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기골만 장대했지 성격은 매우 부끄러움이 많은 자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택함을 받고도 숙부에게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삼상10:16)했으며 모든 백성이 모인 중에 왕으로 선출되었음에도  행구 사이에 숨었습니다.(10:22) 그러자 백성 중 일부는 심지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10:27)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좀더 담대한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구원 받은 자라면 처음부터 악신이 그를 괴롭힐 수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본인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왕이 되고 여러 사건을 겪고 난 한참 후에야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삼상14:35) 고 합니다.

      사울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한 직후를 포함해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 완전히 겸비하게 무릎 꿇은 적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구원 받으면  반드시 진정한 회심이 따르며 삶에서 실제 행동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구원을 위해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세움 받은 것 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 받지 않은 자였으므로 구원이 취소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하나님이 인류 구속사를 진행시키는 과정 중의 한 역할만 맡기려고 뽑았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더욱 명백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雇價)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13) 스가랴 선지자는 주님 오시기 500여년 전에 이미 유다의 배반을 예언했습니다. 예언대로 유다가 배반했었으므로 그 예언의 역할을 맡을 자로 뽑힌 것이지 처음부터 구원을 전제로 선택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또 다시 이왕 씻겨져야 관계가 생긴다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겨 줘서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덤벼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목욕했는가, 식사 전에 손 발을 씻었는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택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듯이 구원 받은 자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가 있는데 그것도 매일 주님께 씻음을 받고 또 제자들끼리 서로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요13:11)라고 유다는 목욕하지 않은 자 즉 구원을 위해 택한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 이제 문제는 배반할 줄 알고도 선택한 주님 쪽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입니다. 그럼 유다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고, 또 설사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유다를 삼 년간 같이 다니면서 깨끗게 해서 구원해 줄 수도 있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맞습니다.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유다는 반드시 언제 어디나 있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인류 구속의 신비는 영원을 꿰뚫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유다라는 한 특정인의 입장에서 이 경륜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의로 유다를 택해 그가 배반토록 하고 비극적인 자살로 강제적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배반했을 때 이미 그 모든 되어질 상황을 알고 계셨지만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말리지 않거나 미리 사탄의 흉계를 막아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치 않게 하려면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뺏고 전부 로보트 같은 인간으로 만들든지 사단을 아예 없애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해 자신을 배반할 줄 알아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이 준비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다가 배반할 자인 줄 알지만 그를 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사 가운데 제 3, 제 4의 유다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의 어느 집단에나 배반자는 반드시 있습니다. 수난 받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야 스승에게 로마를 무찔러 주는 메시야를 기대했던 유대인 제자 중에서 배반자가 한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시고도 유다에게 3년간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도 않았고 차별 대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계라는 중책을 맡겼습니다. 아마 여러 번 그에게 마음을 고쳐 먹을 기회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고 심지어 유다가 그 배반할 제자가 자기인가 물었을 때도 “네가 말하였도다”(26:25)라고 직접적으로 마지막 경고까지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완악하여져 죄 짓는 것 조차 하나님이 막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유다가 배반할 줄 알고도 택한 것을 가지고 유다에게만 마치 불공평하게 대한 것으로 착각하셔선 안 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 뿐 아니라 제자 12명 다 예수님을 버리는 자로 선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수제자 베드로마저 세 번 부인했지 않습니까?

      이것은 유다에 대한 주님의 형평성의 문제도, 유다가 구원을 받고도 구원이 취소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2제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베드로마저 저주하며 부인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삼년을 가르침을 받고 동고동락을 해도 그 깨우침만으로 절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목욕시켜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목욕시킨 후 내 쫓아 내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왜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까? 목욕은 일회로 충분하고 발만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 발을 안 씻었다고 목욕한 사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4-9

      그런데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드는 성경 근거는 히브리서 6:4-9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 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지은 책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인 수신자가 유대인들이었으며 본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할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신 말씀도 들었고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이후의 유대인들(지금 히브리서의 수신자)도 똑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여 선조들이 예수님을 못박은 것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못 박았던 자들과 다름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본 구절들의 표현이 마치 구원을 얻은 자가 타락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 같이 “한 번 비췸”, “맛보고”, “참예 한바 되고”, “맛보고” 네 번 모두 일회성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부흥회나 은사 집회 가서 말씀에 은혜 받고 심지어 병이 낫고 방언도 터졌는데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밭에서 채소를 내면 구원을 얻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는다고(히6:7,8) 했는데 신약 성경 전체적 맥락에서는 나무가 다르면 다른 열매를 맺는 것이지 나무가 노력한다고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저자가 앞장에서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고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6)라는 구절이 논란이 될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한 자들은 거룩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타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용서 받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살피면 예수님을 못 박는 잘못을 하는 타락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끝까지 거부하고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타락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가 하면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가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고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성령님이 타락을 막아 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경은 분명히 자연인에게 성령의 간섭이 있어야만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라면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본 구절이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타락한 자를 지칭한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구원과 상관이 없었던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히브리서 본문과 같은 설명은 이곳과 벧후 2:20-22 두 군데 뿐입니다. 베드로 후서의 경우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신자들이 선한 생활을 하며  복음을 따르는 듯 하다가 다시 이단 사설에 넘어가 배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지 거듭난 성도들의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구절에 조금 오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이 있을 때는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완전히 거듭난 신자를 두고 윤리적 타락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원 자체의 취소에 대해선 어느 곳에도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로 인해 미혹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범죄한 것을 회개케 하여 죄인을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자체를 새롭게 바꾸어 범죄 한 것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이자 새 피조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구원된 신자를 다시 죽이면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자들이 교회도 나오지 않고 도저히 돌아 올 수 없는 것 같은 타락한 겉 모습만 보고는 마치 구원 받은 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됩니다.  교회 안에 거듭난 신자는 사실10-20%에 불과하거나 더 낮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본인만이 압니다.

      예수 믿었다는 것, 거듭났다는 것, 구원을 얻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그 형벌을 면한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어떤 선한 행위나 경건한 제사로도 도저히 구원은 불가능했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만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 자이며 두 번 다시는 죄의 종과 사단의 노예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돌아 갈 수도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확신이 있는 자에게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몰랐을 때의 생각과 생활로 다시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백이면 백이 ‘노(No)’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죄를 안 짓고 윤리적으로 타락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원죄 아래로 돌아가 사단의 종이 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그러지 않겠다는데 왜 하나님이 구원해 놓은 자의 구원을 취소하겠습니까?    

      박신목사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 소로우의 일기》 중에서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 (One Body with Many Parts)
        교회는 한 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만일 모두 한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디입니까? 그래서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고린도전서 12:19~20)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몸의 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에 속하는 기능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손에게 보라고, 눈에게 들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각자는 전체에서 담당할 역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제한된 그러나 참된 역할을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영적 분별력 (강의자료) / 1of 2

       

      영적분별력- 1 of 2.ppt

       

       

      o 로마 카톨릭(천주교)

       

      1. 은사운동

      2. 신사도운동

      3. 신비주의

      4. 마케팅교회 운동

      5. 이머징교회 운동

       

      o 에큐메니칼 운동(교회연합운동)

       

       

      출처: 영적분별력/ 생명수 쉼터/ 한아름 님


      영적 분별력 (강의자료) / 2of 2

       

       

      영적분별력- 2 of 2.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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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영적분별력/생명수 쉼터/한아름 님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출처:USA아멘넷/ 허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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