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지나며 다람쥐가 풀밭에다 도토리 숨기는 것을 볼 시간이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겠는가?”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현대는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바쁜 일상에 끌려다니느라고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한 것인지, 우린 다람쥐가 풀밭에 도토리를 숨기는 서정적 그림을 잊은지 아득히 먼 옛날이다. 바쁜 일상에 쫓기느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Go, Go!” 외치면서 무작정 달리기만 하던 인생, 갑자기 들판의 하얀 고드름 저 너머 흰 눈이 새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하늘과 만나게 되면 주춤거리면서 당황스러워한다. 무얼 잃어버린 것일까,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부터 마음마저도 휑~ 하니 허전해 지는 것은 또 어인 일일까…

지식수준, 환경의 수준, 경제 수준, 나이별 수준에 따라, 모든 사람의 느낌이 꼭 같을 순 없을 테고, 확실한 이유야 알 수 없다지만, 돌이켜보면 지난해 특별히 성취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속절없는 세월 따라 나이만 자꾸 들어간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분 앞에 서야만 하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주 앞에 내어 드릴만한 일, 변변한 것 하나 없다고 하는 이 불편한 진실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만 초조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한해가 끝나는 시점이면, 우리(인간)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그 어떤 신앙도 가지지 않은 불신자이건, 마음이 연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神의 힘 같은 것에 매달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그간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悔恨), 그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이보다 더 잘해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 같은 것도 생기고, 새해가 되면 새로운 삶, 아름다운 오색 무지개를 꿈꾸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 그런 마음들이 연말연시가 되면, 그동안 생각조차하지 않았던 神,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힘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온갖 잡다한 미신적 행위가 방방곡곡에 유행병처럼 휩쓸고 지나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샤머니즘에 찌들대로 찌든 유교적 산물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듯,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삶이라고 하여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성도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자는 선한 취지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기독교는 ‘송구영신 예배’를 접목 하였고, 현대는 ‘송구영신 예배’가 정통 예배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그렇다면, 작금의 “송구영신 예배”, 과연 성도에게 필요한 예배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할까? “남이 장에 가니까 나도 장에 간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생각 없이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아테네 사람을 향한 바울 사도의 질책이 생각난다.(행 17: )20-23 참조)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늘은 송구영신 예배의 그 허와 실이란 주제로 함께 생각하면서 한 번쯤 꼼꼼히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고 조명하여 주심으로 깨달아지고 주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
송구영신(送舊迎新), 사전적 의미로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이며, 송구영신 (送舊迎新) 사자성어에 예배란 말을 덧붙인 것이다. 놀랍게도 송구영신 예배의 기원은 우리나라 선교초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예배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풍성한 정초 세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섣달그믐에는 모든 연중거래를 마무리하고 새해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날 저녁에는 ‘해 지킴’(守歲)이라 하여 집 안팎에 불을 밝히고 새벽까지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고는 했다.

정월 초하루는 '설날'이라 하여 연시제(年始祭)를 지내며 집안과 동네의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세배하러 온 손님들에게는 음식을 대접하고, 설날에는 덕담을 나누면서 서로 새해를 축하하고 축복하는 인사를 나누고는 했다. 이러한 전통 문화의 토양 위에서 자연스럽게 한국교회의 송구영신예배는 시작되었다”(『송구영신예배의 유래와 의의』라는 글에서 발췌) 우리 아멘넷엔 승려에서 개종하신 서재생 목사님께서 이미 세시에 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에, 더 자세한 내용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같고…송구영신예배의 기원만 잠시 살펴보자.

기록에 따르면 1887년 12월 31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사역하던 서울의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와 베델 교회(현 정동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드린 것이 최초의 송구영신 예배였다고 한다. 당시, 복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나 교회 역사에 대한 바른 안목이 모자란 상태에 있었던 초창기 우리나라 믿음의 선조에게 “송구영신 예배”는 한국 전통의 무속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고, 역으로 그동안 얽매였던 모든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도약한다는 깊은 의미도 내포되었을 것 같다.

송구영신예배에 대한 부정적 시각:
잠시 언급하였듯이,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다른 나라의 성도들이 송구영신(送舊迎新)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여지고 있는 특이한 현상인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처음 시작은 글자 그대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그 시간을 주님께 드리자는 좋은 취지로 생겼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상혼, 그동안 무속신앙에 젖어 살던 우리 민족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교묘한 악의 축이 교회 안에서도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해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뽑기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강대상 앞에 바구니를 놓고 그 안에 긍정적이고 축복된 성구들만을 성경에서 골라 뽑아 담아 놓는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한 사람씩 강대상 앞으로 나오게 하여,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성구 중 한 개를 집어내도록 권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성도가 집은 그 성구가 곧 그 해 그 성도와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새해가 되면 그해의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돈이 있는 자들은 유명한 점술가들, 혹은 유명한 절을 찾아 액을 물리치는 굿도 하고, 비싼 부적을 사서 1년이면 12달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는 점술가들을 찾기도 한다. 그들은 그해의 운수를 적어놓은 글귀들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잘 훈련된 새 한 마리가 나와 그 사람의 운수가 담긴 글귀를 물어다 준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해 그 사람의 운수를 가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샤머니즘 신앙에 찌든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어느 머리 좋은 인쇄소에서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교회에서 그런 사악한 무속신앙을 그대로 흡수, 접목하여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 버젓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속 신앙의 최고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제비뽑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어떤 교회는 마지막 주일에 신년감사 헌금 봉투를 두 개씩 나누어 준다고 한다. 하나는 신년 첫 주에 드리는 헌금 봉투이고 다른 하나는 송구영신 예배 때 드리는 헌금 봉투란 것이다. 그러면서 송구영신 때에 드리는 헌금 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어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 년 동안 담임 목사가 개인적으로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첨부한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담임 목사가 기도를 해 주지 않겠는다는 것인지….

이런 때, 교회를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이용하는 무당 신앙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고, 이런 기회를 '수입'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역시 기독교의 무속화를 부채질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성경적 개혁신앙이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행위를 교회에서 감행하는 한, 주님께서는 결코 그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앞에서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뿐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시 90: 2절 말씀).” 이런 세계관으로 온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의 왕으로 즉위하셨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신 지가 이미 2009년이나 지나갔다. 이렇게 주님께서 친히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해 오신 해(AD= Anno Domini)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부터 영원의 연속선상이다. 성도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혼합종교 풍토다. 주님의 교회가 더 이상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잘사는 ‘넓은 길'보다는 내가 조금 어렵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송구영신예배에 대한 긍정적 시각:

예배란 어떤 예배던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마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마음이면 모두 아름답다. 절기에 얽매이거나 억지로 드리는 마음이 아니라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답다고 본다.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요 4:24절 참조).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송구영신 예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하여 드림으로 '시간 중심'의 송구영신, ‘절기 중심’의 송구영신, ‘기복사상 중심’의 송구영신 보다는 '주님 중심'의 송구영신, 즉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영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것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옛 것이란 단순하지만, 불변의 진리인 성경적 가르침에(고후 5: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한 간점선에서, 뒤돌아보며, 지난 한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또 앞으로 나가야 할 다른 한해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묵은해의 마지막 끝자락과 새로 맞는 한해의 새벽 미명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드려진다면 송구영신 예배도 아름다운 것이다. 예배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드려지면 좋고, 그것이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드릴수록 더 좋다.

일 년이면 열두 달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내 가족,내 육신을 위하여만 사용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 기뻐하시는 주님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예배를 드리면 더욱 좋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우리다. 어느 특별한 날짜, 어느 중요한 한 시간을 따로 떼내어 그날만이라도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구속의 은총에 감사를드리는 예배 시간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은 또 절기에 얽매이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난날, 잘못 살아온 내 삶을 성찰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남은 삶을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각오와 연약한 나를 주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서원하는 마음이라면, 송구영신 예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 같다는 것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 이다(시 90: 1-2절 말씀).”


한기총, 다락방 류광수에 “이단성 없다” 우려 확산

2013/01/03 ㆍ추천: 0  ㆍ조회: 22      

예장합동을 비롯한 주요 교단들이 이단으로 간주한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에 대해 한기총 이대위가 ‘이단성 없다’는 결론을 내려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한기총이 3일 오전 코리아나호텔 7층에서 24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한기총 이단대책위원회는 총회 보고서를 통해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 건과 관련해 '이단성이 없다'고 보고했다.ⓒ뉴스미션

한기총 “신학적 미숙과 표현력 부족일 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이하 한기총)는 3일 오전 10시 코리아나호텔 7층에서 제24회 정기총회 및 시무감사예배를 가졌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이건호 목사, 이하 이대위)는 보고서를 통해 다락방 전도운동으로 이단 규정됐던 류광수 목사에 대해 “전문위원의 연구 검증 결과와 공개청문회를 거쳐 심의한 결과 ‘이단성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대위 전문위원회(위원장 김만규)는 검증보고서에서 “천사동원권과 사탄결박권은 신학적 미숙과 표현력의 부족으로 오해를 받았으나 내용을 검증한 결과 하나님의 권세로 하시는 일을 미숙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예수님의 무죄성과 관련하여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고 한 것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영접을 구별함으로 재영접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서 메시야를 언급한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류광수 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경과 및 사업보고 통과로 이대위 관련 건을 서류로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이단 규정 및 교류 금지한 교단들 반발 예상돼

류광수의 다락방 전도운동은 소속 교단인 예장합동에서 1996년 이단으로 규정됐다. 예장합동은 당시 제81차 총회에서 류광수 목사가 김기동의 귀신론과 권신찬, 박옥수 구원파의 구원론,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의 재영접설 등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고 간주했다.

특히 류광수의 주장 중 가장 문제가 된 사항은 사단결박권과 천사동원권에 대한 것으로, 당시 예장 고려파, 총신대 교수들,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의 최삼경 목사, 예장합동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연구위원회는 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현재 10개 교단에서 교류 금지 결의를 한 상태다. 때문에 이번 한기총 이대위의 류광수 이단 관련 결의는 향후 많은 논란을 불러올 전망이다.

한기총은 지난 해 10월, 다락방 전도총회를 영입한 예장개혁(조경삼 목사) 측을 회원 교단으로 받으며 교계 전체의 우려를 산 바 있다. 11개 교단 이대위와 각 신학대 교수들은 반대성명을 내고, 이단을 영입한 개혁측과 한기총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한기총이 이번 결의를 계기로, 논란이 되고 있는 다른 이단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재조사와 이단 해제가 이뤄질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윤화미 ⓒ 뉴스미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주일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1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2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4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6
                나를 보호하시며,7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8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9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10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11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12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13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14


1) 롬 14:8; 살전 5:9-10
2) 고전 6:19-20
3) 고전 3:23; 딛 2:14
4) 벧전 1:18-19; 요일 1:7; 2:2,12
5) 요 8:34-36; 히 2:14-15; 요일 3:8
6) 마 10:29-30; 눅 21:18
7) 요 6:39; 10:27-30; 살후 3:3; 벧전 1:5
8) 롬 8:28
9) 롬 8:16; 고후 1:22; 5:5; 엡 1:13-14
10) 겔 36:26-27; 롬 8:14; 고후 3:6,18; 요일 3:3
11) 마 11:28-30; 엡 5:8
12) 마 9:12; 요 9:41; 롬 3:9-10; 요일 1:9-10
13) 눅 24:46-47; 요 17:3; 행 4:12; 10:43; 고전 6:11; 딛 3:3-7
14) 시 50:14-15; 116:12-13; 마 5:16; 롬 6:12-13; 엡 5:10; 딤후 2:15; 벧전 2:9,12


제1부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제2주일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1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2

5문: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3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4


1) 롬 3:20; 7:7,23-24
2) 레 19:18; 신 6:5; 막 12:30-31; 눅 10:27
3) 롬 3:10,20,23; 요일 1:8,10
4) 창 6:5; 8:21; 렘 17:9; 롬 7:23-24; 8:7; 엡 2:3; 딛 3:3


제3주일

6문: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1
                또한 자신의 형상,2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3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4

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 우리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가
                낙원(樂園)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5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6

8문: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7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8


1) 창 1:31        
2) 창 1:26-27
3) 엡 4:24; 골 3:10        
4) 시 8:4-9; 계 4:11
5) 창 3장; 롬 5:12,18-19
6) 시 51:5; 요 3:6        
7) 창 6:5; 8:21; 욥 14:4; 사 53:6; 딛 3:3        
8) 요 3:3,5; 고전 12:3; 고후 3:5


제4주일

9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1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2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3

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5

11문: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6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7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8



1) 창 1:27; 2:16-17
2) 창 3:4-6,13; 요 8:44; 딤전 2:13-14
3) 롬 5:12
4) 창 2:17; 출 20:5; 34:7; 시 5:4-5; 7:11-13; 나 1:2; 롬 1:18; 5:12; 엡 5:6; 히 9:27
5) 신 27:26
6) 출 20:6; 34:6-7
7) 출 20:5; 23:7; 신 7:9-11; 히 10:30-31
8) 나 1:2-3; 마 25:45-46; 살후 1:8-9        


제2부 우리의 구속(救贖)에 관하여

제5주일

12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3문: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3

14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4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5

15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참인간이고6
                의로운 분이시나7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8


1)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2) 사 53:11; 마 5:26; 롬 8:3-4
3)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4) 겔 18:4; 히 2:14-17
5)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6) 고전 15:21; 히 2:17                            
7) 고후 5:21; 히 7:26        
8)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제6주일

16문: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답: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1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2

17문: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3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4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5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6

18문: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7
        동시에 참인간이고8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9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0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11

19문: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12
        후에는 족장들과13 선지자들을14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15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16


1) 사 53:3-5; 렘 33:15; 겔 18:4,20; 롬 5:12,15; 고전 15:21; 히 2:14-16
2) 시 49:7-8; 히 7:26-27; 벧전 3:18
3) 사 9:6; 롬 1:4; 히 1:3
4) 신 4:24; 시 130:3; 나 1:6
5) 사 53:4,11; 요 10:17-18
6) 사 53:5,11; 54:8; 요 3:16; 행 20:28; 고후 5:21; 벧전 3:18
7) 렘 23:6; 말 3:1; 롬 8:3; 갈 4:4; 요일 5:20
8) 눅 1:42; 2:6-7; 롬 1:3; 빌 2:7; 히 2:14,17; 4:15        
9) 사 53:9,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4:15; 7:26; 벧전 1:19; 2:22; 3:18; 요일 3:5
10) 마 1:23; 눅 2:11; 요 1:1,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11) 고전 1:30; 고후 5:21
12) 창 3:15
13) 창 12:3; 22:18; 26:4; 28:14; 49:10
14) 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15) 레 1-7장; 골 2:17; 히 10:1,7
16) 롬 10:4; 갈 3:24; 4:4-5; 골 2:17; 히 1:1-2


제7주일

20문: 그러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답: 아닙니다.1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恩德)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2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3
        동시에 성신께서4
                복음으로써5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6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7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8
                믿는 것입니다.9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10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할 여지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들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줍니다.


사도신경에 관하여
23문: 사도신경의 조항들은 무엇입니까?
  답: I.  1.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
     II.  2.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믿사오니,
                3.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4.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5.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6.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7.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III.  8. 성신을 나는 믿사오며,
                9.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10. 죄 사함과
                11. 육신의 부활과
                12. 영원한 생명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마 7:14; 22:14        
2) 시 2:12; 막 16:16; 요 1:12-13; 3:16,18,36; 롬 3:22; 11:20; 히 4:2-3; 5:9; 10:39; 11:6
3) 요 17:3; 롬 4:20-21; 히 11:1,3; 약 1:6        
4) 마 16:17; 요 3:5; 행 16:14; 고후 4:13; 빌 1:19         
5) 막 16:15; 행 10:44; 16:14; 롬 1:16; 10:17; 고전 1:21
6) 시 9:10; 롬 4:16-21; 5:1; 10:10; 엡 3:12; 히 4:16        
7) 눅 1:77-78; 요 20:31; 행 10:43; 롬 3:24; 5:19; 갈 2:16; 엡 2:8; 히 10:10
8) 딤후 4:8
9) 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
10) 마 28:19-20; 막 1:15; 요 20:31


제8주일

24문: 이 조항들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둘째,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                         
        셋째,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한
                것입니다.        

25문: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는데,1
        당신은 왜 삼위,
        곧 성부․성자․성신을 말합니까?
  답: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2


1) 신 6:4; 사 44:6; 45:5; 고전 8:4,6; 엡 4:5-6
2) 창 1:2-3; 사 61:1; 63:8-10; 마 3:16-17; 28:19; 눅 1:35; 4:18; 요 14:26; 15:26; 행 2:32-33; 고후 13:13; 갈 4:6; 엡 2:18; 딛 3:4-6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관하여
제9주일

26문: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1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심을 믿으며,2
        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는 믿습니다.3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며,4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5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6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7


1) 창 1:1; 2:3; 출 20:11; 욥 38:4-11; 시 33:6; 사 40:26; 44:24; 행 4:24; 14:15
2) 시 104:2-5,27-30; 115:3; 마 10:29-30; 롬 11:36; 엡 1:11        
3) 요 1:12; 20:17; 롬 8:15; 갈 4:5-7; 엡 1:5        
4) 시 55:22; 마 6:25-26; 눅 12:22-24
5) 시 84:5-6; 롬 8:28        
6) 창 17:1; 18:14; 롬 8:37-39; 10:12; 계 1:8
7) 마 6:32-33; 7:9-11


제10주일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답: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1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2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3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4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5

28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6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7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8
        모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9


1) 시 94:9-10; 사 29:15-16; 렘 23:23-24; 겔 8:12; 마 17:27; 행 17:25-28
2) 히 1:3        
3) 렘 5:24; 행 14:17
4) 잠 22:2; 요 9:3        
5) 잠 16:33; 마 10:29-30
6) 욥 1:21-22; 시 39:9; 롬 5:3-4; 약 1:3        
7) 신 8:10; 살전 5:18
8) 시 55:22; 롬 5:4-5; 롬 8:38-39
9) 욥 1:12; 2:6; 잠 21:1; 행 17:25-28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에 관하여
제11주일

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救主)라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1
        또 그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2

30문: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聖人)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3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4


1) 마 1:21; 히 7:25
2) 사 43:11; 행 4:11-12; 딤전 2:5; 요일 5:11-12
3) 고전 1:13,30-31; 갈 5:4        
4) 사 9:7; 요 1:16; 골 1:19-20; 골 2:10; 히 12:2; 요일 1:7


제12주일

31문: 그분을 왜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신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
        그분은 우리의 큰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인 경영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시고,2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救贖)하셨고,3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시며,4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을 누리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5

32문: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6
  답: 왜냐하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어
                그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7
        나는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며,8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고,9
        또한 왕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10
                이후로는 영원히
                그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11


1) 시 45:7; 사 61:1; 눅 3:21-22; 4:18; 행 10:38; 히 1:9                
2) 신 18:15; 사 55:4; 마 11:27; 요 1:18; 15:15; 행 3:22; 엡 1:9-10; 골 1:26-27                
3) 시 110:4; 히 7:21; 9:12,14,28; 10:12,14         
4) 롬 8:34; 히 7:25; 9:24; 요일 2:1        
5) 시 2:6; 슥 9:9; 마 21:5; 28:18; 눅 1:33; 요 10:28; 계 12:10-11
6) 행 11:26
7) 사 59:21; 욜 2:28; 행 2:17; 고전 6:15; 12:13; 요일 2:27        
8) 마 10:32-33; 롬 10:10; 히 13:15        
9) 출 19:6; 롬 12:1; 벧전 2:5; 계 1:6; 5:8,10;
10) 롬 6:12-13; 갈 5:16-17; 엡 6:11; 딤전 1:18-19; 벧전 2:9,11
11) 딤후 2:12; 계 22:5


제13주일

33문: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분을 왜 “하나님의 독생자”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
                본질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1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2

34문: 당신은 왜 그분을
        “우리 주”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혈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救贖)하셨고,3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4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5


1) 요 1:1,14,18; 3:16; 롬 8:32; 히 1:1-2; 요일 4:9
2) 요 1:12; 요 20:17; 롬 8:15-17; 갈 4:6; 엡 1:5-6        
3) 고전 6:19-20; 7:23; 엡 1:7; 딤전 2:6; 벧전 1:18-19        
4) 골 1:13-14; 히 2:14-15
5) 요 10:28; 벧전 2:9        


제14주일

35문: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1
        성신의 사역(使役)으로2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人性)을 취하셨습니다.3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4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5

36문: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6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7


1) 마 1:23; 3:17; 16:16; 17:5; 요 1:1; 10:30; 17:3,5; 20:28; 롬 1:3-4; 9:5; 빌 2:6; 골 1:15-16; 딛 2:13; 히 1:3; 요일 5:20
2) 마 1:18,20; 눅 1:35                
3) 눅 1:31,42-43; 요 1:14; 갈 4:4                
4) 삼하 7:12; 시 132:11; 마 1:1; 눅 1:32; 행 2:30-31; 롬 1:3                
5) 빌 2:7; 히 2:14,17; 4:15; 7:26-27
6) 딤전 2:5-6; 히 9:13-15
7) 시 32:1; 사 53:11; 롬 8:3-4; 고전 1:30-31; 갈 4:4-5; 벧전 1:18-19; 3:18        


제15주일

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1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2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3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4

38문: 그분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定罪)를 받으셨으며,5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6

3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달리 돌아가신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7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은
                내게 임한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게 됩니다.8


1) 사 53:4,12; 딤전 2:6; 벧전 2:24; 3:18        
2) 사 53:10; 롬 3:25; 고전 5:7; 엡 5:2; 히 9:28; 10:14; 요일 2:2; 4:10        
3) 롬 8:1-4; 갈 3:13; 골 1:13; 히 9:12; 벧전 1:18-19        
4) 요 3:16; 6:51; 롬 3:24-26; 고후 5:21; 히 9:15; 10:19        
5) 마 27:24; 눅 23:13-15; 요 18:38; 19:4,11
6) 사 53:4-5; 고후 5:21; 갈 3:13                
7) 신 21:23
8) 갈 3:13        


제16주일

40문: 그리스도는 왜
        “죽으시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1
        우리의 죗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는
                달리 치를 길이 없습니다.2

41문: 그리스도는 왜 “장사”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가 진정으로 죽으셨음을 확증합니다.3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4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5

43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효(功效)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죽고 장사되며,6
        그럼으로써 육신의 악한 소욕(所欲)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7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8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1) 창 2:17                
2) 롬 8:3-4; 빌 2:8; 히 2:9,14-15
3) 사 53:9; 마 27:59-60; 눅 23:53; 요 19:40-42; 행 13:29; 고전 15:3-4
4) 시 49:7-8        
5) 요 5:24; 롬 7:24-25; 빌 1:23; 살전 5:10
6) 롬 6:6; 갈 2:20; 골 2:11-12
7) 롬 6:8,11-12
8) 롬 12:1        
9) 사 53:5
10) 시 18:5-6; 116:3; 마 26:38; 27:46; 히 5:7        


제17주일

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1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2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3


1) 롬 4:25; 고전 15:16-18        
2) 롬 6:4; 엡 2:4-6; 골 3:1-3; 벧전 1:3
3) 롬 8:11; 고전 15:20-22; 빌 3:20-21


제18주일

46문: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1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2
        장차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3

47문: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4
  답: 그리스도는 참인간이고
                참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人性)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5
        그의 신성(神性)과 위엄과 은혜와 성신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6

48문: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7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8

49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代言者)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9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10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肢體)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11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신을 우리에게 보내시며,12
                우리는 성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13


1) 막 16:19; 눅 24:51; 행 1:9                
2) 롬 8:34; 엡 4:10; 골 3:1; 히 4:14; 7:24-25; 9:24        
3) 마 24:30; 행 1:11        
4) 마 28:20
5) 마 26:11; 요 16:28; 17:11; 행 3:21; 히 8:4        
6) 마 28:20; 요 14:16-18; 16:13; 엡 4:8,11
7) 사 66:1; 렘 23:23-24; 행 7:49; 17:27-28
8) 마 28:6; 요 3:13; 11:15; 골 2:9                
9) 롬 8:34; 요일 2:1
10) 엡 2:6
11) 요 14:2-3; 17:24
12) 요 14:16; 16:7; 행 2:33; 고후 1:22; 5:5        
13) 빌 3:20; 골 3:1        


제19주일

50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거기에서 자신을
                그의 교회의 머리로 나타내기 위해서
                하늘에 오르셨으며,1
        성부께서는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십니다.2

51문: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신으로
                그의 지체(肢體)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들을 부어 주십니다.3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4

52문: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내가 어떠한 슬픔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전에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사
                내게 임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분이
                심판자로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머리 들어 기다립니다.5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하실 것이며,6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7


1) 엡 1:20-23; 골 1:18                
2) 마 28:18; 요 5:22                
3) 행 2:33; 엡 4:8,10-12        
4) 시 2:9; 110:1-2; 요 10:28; 계 12:5                
5) 눅 21:28; 롬 8:23-24; 빌 3:20; 딛 2:13                
6) 마 25:41-43; 살후 1:6,8-9        
7) 마 25:34-36; 살전 4:16-17; 살후 1:7,10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하여
제20주일

53문: 성신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첫째, 성신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1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2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3
                나를 위로하고4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5


1) 창 1:2; 마 28:19; 행 5:3-4; 고전 2:10; 3:16; 6:19
2) 고후 1:21-22; 갈 4:6; 엡 1:13
3) 요 16:14; 고전 2:12; 갈 3:14; 벧전 1:2
4) 요 15:26; 행 9:31        
5) 요 14:16-17; 벧전 4:14


제21주일

54문: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1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2
                모든 인류 가운데서3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4 교회를5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6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7
                자신을 위하여
                불러 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8 믿습니다.
        나도 지금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肢體)이며9
                영원히 그러할 것을 믿습니다.10

55문: “성도의 교제”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11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12

56문: “죄 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와13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14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서15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16


1) 요 10:11; 엡 4:11-12; 5:25-26                
2) 시 71:17-18; 사 59:21; 고전 11:26                    
3) 창 26:4; 사 49:6; 롬 10:12-13; 계 5:9                       
4) 롬 8:29-30; 엡 1:3-5,10-14; 벧전 2:9                  
5) 시 111:1; 행 20:28; 딤전 3:15; 히 12:22-23              
6) 요 17:21; 행 2:42; 고전 3:16; 엡 4:3-6,13        
7) 사 59:21; 롬 1:16; 10:14-17; 엡 5:26                       
8) 시 129:4





지혜와 빛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풍경이 빛에 따라 무수하고
다양한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처럼
사람도 지혜를 통해
인생을 다양한 각도로 보게 되며
교훈을 얻게 된다.

- 쇼펜하우어의 《희망에 대하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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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최송연

       

       

                나는 왜 이렇게 땅에 엎드려져

                기어 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땅에서 기는 것을 다 배운 후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즐거운 때가 온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과 의심이

               안개처름 일어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런 수많은 고민과 고뇌들이..

               당신을 성숙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준답니다.

       

               내가 올라가야할 언덕이

               가파르고 숨이 가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가파른 언덕을 조금만 더 오르면..

               당신의 목적지인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답니다.

       

               시련의 밤이 깊고 고통의 흑암이

               온 천지를 덮을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제 곧 새벽동이 터 오르고..

               당신 창가에도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릴 테니까요.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눈물이 나며 잠 못이루는

               밤이 늘어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당신의 속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날로 새롭게 된답니다.(고후4:16)

       

               역사의 부조리와 천재지변이

               세상을 집어 삼킬 것만 같을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치시고 통치하시는

               소망의 날이 곧 온답니다.(계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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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동성애자를 위한 성경 “퀸제임스바이블” 출간

2013/01/02 ㆍ추천: 0  ㆍ조회: 4      


우려되던 게이바이블(동성애자를 위한 성경)이 드디어 출현했다! 이런 라인으로는 사상최초인 이 '성경'책 의 이름은 "퀸제임스바이블"(Queen James Bible, QJB). 표지 디자인도 흰 바탕을 꽉 채우는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갯빛의 커다란 십자가로 구성했다. 이 성경은 1769년도판 킹제임스바이블에 기초하여 편집했다.

금방 충분한 상상이 가듯, 이 '성경'은 동성애를 엄히 단죄한 성구들 8군데를 모두 중도적 또는 친동성애적으로 바꿔 옮겼다. 이에 대해 QJB 편집팀은 "우리는 이 8개 구절을 동성애혐오적인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편집했다"고 썼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그래도 아직 성경은 우리가 대처하지 않은 불평등과 심지어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덧붙여 주장했다.

편집팀은 또 "동성애(homosexuality)는 1946년 개정표준역(RSV) 성경에서 맨 처음 사용됐다"면서 "그전엔 어떤 성경도 동성애란 말을 쓴 적이 없었고 해석만 그래왔을 뿐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명하다. 1890년 이전엔 동성애 개념만 있었을 뿐 영어에 holosexuality라는 낱말이 존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1:27이 정죄하고 있는 동성애 개념은 거의 성경마다 또렷하다. 구약과 신약에 모두 있는 이 개념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구약의 예를 들면, 소돔-고모라 사람들의 대표적이고 중요한 죄는 동성애였다(창19:1-11). KJV 유다서 7절도 "그들 자신을 간음에 넘겨주고 다른 육체(정상과는 다른 몸 즉 동성의 그것)를 좇아서" 멸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QJB는 '다른 육체' 대신 '인간 아닌 육체'로 바꿨다. 하지만 소돔 사람들은 그들이 천사들인 줄 몰랐다.

QJB 편지팀은 또 레위기 18:22, 20:13 등에서 동성애가 혐오시된 이유는 단지 "몰렉의 신전"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변개시켰다. 성경학자들은 레위기 18장의 전체가 신전내 성행위를 뜻하는 것이 돼버린다며 그것이 과연 QJB 편집위가 애당초 바라던 번역이냐고 묻는다.

편집팀은 또 '가증함'(abomination 또는 혐오대상)은 실제로는 '의식상의 부정' 또는 '터부(금기)' 정도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증함'의 남자가 남자와 성교를 했다고 해서 사형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가증함'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QJB에 대하여 마이클 브라운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당신네들은 이젠 동성애 행위를 하고도 정죄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겠네요. 하지만 오직 이성간 결혼과 가족만을 확신시켜주는 수백 군데의 구절이 더 있는데 그것도 다루어야지요. 십계명의 하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지 '네 아버지/아버지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네요. 또 남녀 성구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성구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는 구절도 그러네요. 그런데 왜 둘러대나요?"

이 성경의 괴이한 이름에 관하여, QJB 편집팀이 변명 삼아 인용한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제임스1세는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였다고. 킹제임스 성경의 대표 편찬자였던 그에 관하여 역사가들 중 회자되는 말에 따르면, 성의식 내지 성정체성이 불분명한" 인물로 흔히 부각된다. 결혼은 했지만 하도 동성애 행각이 심하여 몇몇 친구들과 궁중에서는 '제임스 여왕'이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 모던 잉글랜드(1458-1714년) 역사에 관해 연구해온 로버트 부콜즈, 뉴턴 키 등 두 학자는 "본 이슈는 안개 속처럼 깜깜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성경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QJB 편집팀은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QJB 편집팀은 이 '성경'이 "예식, 성경공부, 설교, 선물증정용, 가정/교회의 전시용으로 완전하다"고 생색을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정확"하다고 믿을 LGBT(동성애자/양성애자/성전환자)들에겐 '큰 불행'일 것이라며 "그래도 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에겐 얼마나 매력적이겠냐?"고 브라운은 개탄한다.

'뉴아메리칸'의 마이클 테넌트 칼럼니스트에 따르면, QJV는 성경을 "엿장수 맘대로 뜯어고친" 시도의 첫 사례는 아니다. 돈이 되고, 어느 '편집팀'이라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나올 판이다. 과연 당신의 말씀이 인간에 의하여 "개선"되는 이 판국을 전능자는 숨을 죽여가며 내려다보고 계실지?

한편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을 중시하는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을 겁내어선지 비겁하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다음과 같이 출판 배경을 밝히고 있다. (본지 제휴 '교회와 신앙' 제공)

QJB 편집팀이 밝힌 이 성경의 출판배경

저자: 하나님
기고자: 예수 그리스도
발행자: 제임스 여왕
발행일: 2012년 11월 27일
KJV vs QJV
(한글역: 편집자 사역)

△ 창 19:5

KJV: "And they called unto Lot, and said unto him, Where are the men which came in to thee this night? Bring them out unto us, that we may know him."
"그리고 그들은 롯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에게 오늘밤 들어온 남자들이 어디 있소? 우리한데 이끌어 내시오. 우리가 그를 알아야(=동침해야) 하겠소.' 하니라."

QJB: And they called unto Lot, and said unto him, Where are the men which came in to thee this night? Bring them out unto us, that we may rape and humiliate them.
"그리고 그들은 롯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에게 오늘밤 들어온 남자들이 어디 있소? 우리한데 이끌어 내시오. 우리가 그들을 강간하여 망신을 주려고 하오' 하니라."

△ 유다서 1:7

KJV: Even as Sodom and Gomorrha, and the cities about them in like manner, giving themselves over to fornication, and going after strange flesh, are set forth for an example, suffering the vengeance of eternal fire.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들과 비슷했던 주변 도시들처럼 그 자신들을 간음에 내어주고 다른 육체를 좇다가 영원한 불의 응징을 겪으면서 본보기가 된 것이니라."

QJB: Even as Sodom and Gomorrha, and the cities about them in like manner, giving themselves over to fornication, and going after nonhuman flesh, are set forth for an example, suffering the vengeance of eternal fire.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들과 비슷했던 주변 도시들처럼 그 자신들을 간음에 내어주고 인간 아닌 육체를 좇다가 영원한 불의 응징을 겪으면서 본보기가 된 것이니라."

김정언 객원기자 (교회와 신앙)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알기
      (Kowing One Another in Christ)
      
      우리는 흔히 성만찬 식탁에 둘러앉기 전에 
      먼저 서로를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서로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 개인적으로 안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만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아는' 수준을 
      훨씬 초월하는 영적인 연합이 창조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석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성한
       신비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점차로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알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어야 할 열번째 이유는 성경은 가장 사악한 인간들조차도 변?쳔갭� 그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공동체에 축복을 가져다 주도록 만드는 성경의 입증된 능력때문이다. 성경은 이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여호와의 증거은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이다"(시편 19:7-9). 앞 장에서 우리가 논의했던 것처럼 그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성경은 실제로 인간들을 변화시켜 그들을 경건한 자들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매춘부는 개심을 하였고 술주정뱅이는 더 이상 술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성살한 자들로 변화되었다. 또한 연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으로 인해 그들에게  변화가 생긴 자들은 그때부터 성경을 듣고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언사이드(Dr.Harry A. Ironside)의 삶에서 그 좋은 예증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초기의 전도시절에 이 위대한 성경교사는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형제단"리고 불리는 일단의 신자들의 그룹과 같이 일을 하였었다. 어느 일요일, 그가 그 도시를 걸어가고 있었을 때 그는 시장 근처에서 모임을 열고 있던 일단의 구세군 옆을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다. 그 곳에는 6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는데 그들이 아이언사이드를 알아보고는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여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해 설교하였다.

그가 설교하는 중에 그는 군중들 속에 섞여있던 옷을 잘 차려입은 한 노신사가 그의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 위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언사이드가 그의 설교를 다 끝마쳤을 때 이 신사는 그에게로 다가와서는 그의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명함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명함 한 쪽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그것을 보자 아이언사이드는 그가 초기의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자로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언사이드는 그가 건네준 명함의 반대쪽에 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선생, 나는 당신과 '불가지론 대 기독교 신앙'에 관한 논쟁을 다음 주 일요일 오후 4시 과학학술원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는 바이요, 그에 따르는 경비는 내가 모두 지불할 것이요."

아니언사이드는 명함에 적힌 그 내용을 큰소리로 읽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 제의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소... 그러므로 나는 다음의 조건하에서 기꺼이 논쟁할 것에 동의하는 바이요. 즉 그 조건이란, 선생께서 이 논쟁이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 주 일요일 학술원 두 명의 사람을 같이 동행해 줄 것을 약속해 주어야겠소.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불가지론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진정 가치있는 것이며 또한 참된 인간의 특성을 회복하는데 있어 그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사람들이어야 하오."

"그 첫번째는 선생이 여러 해 동안 소위 우리가 '아주 버려진사람'이라고 불러 온 한 남자을 동행할 것을 약속해야 되겠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별히, 그의 삶을 파멸시키고 사회의 추방자로 만든 죄들의 정확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자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악한 습관에 빠져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생의 모임을 알게되어 불가지론자가 되어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탄핵하게 된 자를 말하는 것이요. 그는 선생의 말을 경청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아 자신이 불가지로론자가 된 것을 자신있게 이야기하게 된 결과 그의 삶에 있어 새로운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자라야 하오. 그가 한때 빠져있던 죄를 그가 증오하고 그의 삶에 있어 의와 선함이 새로운 이상이 되고, 새사람이 되며, 자신을 신뢰하고 사회에 새로이 적응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그가 불가지론자가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요."

"두번째로, 선생은 그 남자와 더불어 한 여자를 동행해 줄 것을 약속해야 되겠소, 아마도 남자보다는 여자를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오. 내가 말하는 여자는 한 때 불행을 당하여 삶이 엉망으로 되어 사회의 추방자가 되었으며, 또한 사악한 정욕에 사로잡히고 부패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들의 피해자가 되어 결국은 죄의 삶으로 인해 전적으로 버림을 당하고 파멸된 삶을 살았던 여자인 것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선생의 불가지론에 대한 설교를 듣고 성경의 메세지를 비웃게 되었으며, 그녀가 선생의 말을 듣는 동안 그녀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 불가지론만이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그녀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선생의 가르침을 좇아 불가지론자가 되었어야 하오. 그녀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타락된 삶에 혐오감을 갖게 되고 그녀가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던 불의의 소굴로 부터 빠져나와 오늘날 사회로 복귀해 깨끗하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불가지론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할 여자를 선생이 동행해 줄 것을 약속해 주어야 하겠소.

아이언사이드는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논쟁을 벌일 것을 제안한 그 노 신사를 주시하면서 계속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만일 선생께서 불가지론의 본보기로서 이 두 사람을 동행해 줄 것을 약속해 주신다면, 나는 다음 주 일요일 4시 과학학술원에서 당신과 만날 것을 약속하겠소.  나는 그 때에 한 때는 죄의 타락함 속에서 생활하다가 선생의 불가지론이 비웃는 복음을 믿게 됨으로 인해서 영광스럽게 구원받은 자들을 최소한 백여명 저도 같이 동행하게 될 것이요.  나는 이들을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구원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도록 할 것이요.

그리고 나서 아이언사이드는 구세군 사관인 한 여인에게로 돌아서서 "사관, 그 모임에 나와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자들이 있겠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우리 영문에서는 적어도 40여명의 사람이 같이 동행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행렬을 이끌 악단까지도 제공할 수 있어요"라고 열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좋습니다."하고 아이언사이드는 대답하였다. "선생, 그렇다면 이제 나는 이 도시의 각 기독교 단체로부터 나머지 60여명의 인원을 채우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내가 말한대로 두 명의 증거자를을 함께 동행할 것을 약속한다면 나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라는 노래를 연주하면서 기꺼이 논쟁을 벌이기 위한 행령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논쟁하는 일을 제안했던 그 신사는 진정으로 그럴 생각이 처음부터 없던 것이 분명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쓴 웃음을 짓고는 "없던 일로 합시다"라고 말하듯 손을 저으며 아이언사이드와 군중들 박수를 치고 있는사이 군중 속을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성령의 도우심을 얻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이것은 전 역사를 통하여 전해 내려오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경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사탄은 가짜 회개를 많이 만들어놓고 이 사람은 이 방법으로, 저 사람은 저 방법으로 속인다. 교묘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수능란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회개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실제로는 회개했는데도 자신이 회개하지 못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무엇이 회개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먼저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단지 이름뿐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교도이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기만 하면 회개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회개라면, 사데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을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신앙고백으로만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들에게는 '살았다 하는 이름'(계3:1)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단지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토하여 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계3:14-16).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不義)에서 떠나지 않고(딤후2:19),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딛1:16).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회개한 사람으로 여기실까? 죄에서 돌이켜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안에 사는 것이 정말 회개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신앙고백이라는 등(燈)으로 회개가 입증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마25:11,12).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한 설교자들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도 악을 행하기 때문에 쫓겨날 것이다(마7:22,23).

 

2.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5:20).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빌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눅18:11)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아무리 정당화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실 것이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박애를 포함하고 은혜가 이성을 포함하듯이 경건은 도덕성을 포함한다.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3.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도 배교할 수 있으며(히6:4-6), 총독 벨릭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떨 수도 있다(행24:25). 또 진리를 접했을 때의 헤롯처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막6:20). 그러나 단지 죄책감을 느끼며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다고 해서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본 사람들 중 대다수는 죄의 깨달음이 회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할것이다. 건축과 세상일에 몰두하여 죄책감을 잊을 때까지는 그도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미친 듯이 온 세상을 헤맸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단지 예의바른 것이 엄청난 차이를 알지 못한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기독교를 거의 받아들일 뻔했지만 결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양심의 채찍이 춤출 때에도 기도하고 설교 듣고 말씀을 읽고 죄를 멀리하지만 양심의 사자(獅子)가 잠들면 이내 죄에 빠진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동안에는 경건했지만 고난의 시기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님을 잊었다.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죄를 끊고 세상의 상스럽고 불결한 것들을 버렸지만 육욕적 본성이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4. 지금, 돌이켜라!

   죄인이여, 내말을 들어라! 살려거든 들어라! 당신은 왜 제멋대로 스스로를 속이는가? 어찌하여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당신의 소망을 두는가? 나의 직언이 당신의 거짓된 소망을 산산이 깨뜨릴 거라는 것을 잘 안다. 내 이야기가 당신에게 불쾌하게 들릴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사랑하는 친구의 다리가 썩어가는 것을 본다면 눈물을 머금고 그 다리를 절단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나를 이해해 달라. 나는 무너지기 직전의 집을 허물고 아름답고 튼튼한, 영원한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무너져 당신이 깔려 죽을 것이다. 성경은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잠11:7)라고 가르친다.

   죄인이여 ,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뒤늦게 눈뜨는 것보다는 지금 내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낫다.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소망을 붙들지 말라. 당신이 잘못된 것에 소망을 두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둔다면 나는 거짓되고 불충한 목자일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지하는가? 성직자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의지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을 의지하는가?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교인임을 의지하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아는것,교양 있고 예의 바른 것,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 깨끗하게 사업하는 것,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의지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언하건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결코 통하지 않는다. 선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신의 회개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제발 정신 차려라! 철저히, 신속하게 돌이키겠다고 결심하라!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다루실 때까지는 쉬지 말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물며 세속적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세속적인 사람들은나의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길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관심을 보인다면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너희는 하나님나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혜로운 처녀들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깨끗한 거래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더구나 거짓된 거래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불쌍한 죄인이여,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고발하지 않는가? 한 번 비췸을 얻고 종교적 의무를 형식적으로 준행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지옥에 간다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불쌍한 죄인들아!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들아! 돌이켜 회개하라! 의(義)로 당신의 죄를 깨뜨려버려라. 그리스도께 달려가 당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라. 당신을 주께 드리고 거룩함 가운데  동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내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라. 죄인이여,손을 씻어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워라(잠1:23,9:6;딛2:12;약4:8;사1:16,17). 명심하라! 계속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조셉 얼라인의 '돌이켜 회개하라' 중에서-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존스비치(Jones Beach State Park)에서 새해 첫날 해맞이는 흐린 날씨속에 예년과 같이 뚜렷한 해를 볼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변이 밝아짐과 동시에 해무리로 새해 첫 해가 인사를 했다. 존스비치는 새해첫날 만큼은 한국의 동해 유명 해변같이 새해맞이를 즐기는 한국인들이 대거 모여 신년해를 보며 새해 소원을 빌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많은 한인들이 새해맞이를 위해 해변으로 나왔다.


▲구름속에 해가 뜨고....


▲시간이 지나자 해는 더 높이 무리를 지우고...


▲뉴욕드림교회 성도들의 새해 해맞이


▲새해맞이를 하는 사람은 거의 100% 한인들이다.


▲예전에는 어땠나? 2011년 신년 해돚이

사랑하는 주님,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주제를 잡은 아멘넷,
목양연가 식구님들 개인의 삶 속에도,
고난(구름) 속에서도 해가 뜨듯
주님의 햇살같은 은총이
그득그득 넘치는 복된 한 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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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예언가 7명의 '한국'에 대한 예언

 

-한국은 통일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적,경제적 강국이 될 것이다...

한국이 세계 으뜸 국가 된다는 아래 예언을 보고 꿈과 희망을 가지고 분발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세계평화 중심국가를 만듭시다? ㅋㅋ

 

1. 신디 제이콥스(미국인목사. 여성예언사역자. 중보기도 사역자)

- 신디 제이콥스 목사님은 기독교 세계 3대예언 사역자 중 한분이며. 독일 통일 1년전에 정확히“1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저 독일은 하나가된다.” 라는 예언 외에 여러 예언들을 했는데 그 정확도가 매우 높아 신망이 두터운 분인데 한국에 대한 예언을 아래와 같이 함.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한국에 기름을 부어 줄 것이다. 내가 한국사람을 쓸 것이다.’하시고 한반도 위에 하느님의 숨결을 보이시고, 그 숨결이 강력한 바람이 되어서 중국까지계속 날아가고, 곧 모든 아시아 대륙과 전세계는 그 바람이 뒤덮는 것을 보았다.

또 하느님께서 북한에 있는 악의 권세가 무너질 것이며 기적적인 회복의역사를 북한에 허락하여 누구든지 북한에 가면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믿을수 없다. 정말 굉장한 일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북한을 흔드실것이고. 북한의문이 열릴 것이고. 한국은 통일이 될 것이며. 엄청난 영적, 물질적 부강함을 하나님께서 한국에 쏟아 부어 주실 것이고. 한국을 열강 중에뛰어난 나라로 세우실 것입니다.

 

2. 베니힌(유태계 미국인 목사.예언 사역자)

한반도 위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금대접에서 금빛 액체를 쏟아 붓는 환상을 보았다.

하느님이 한국을 쓰실 것입니다. 곧 북한이 해방될 것이며 자유가 올 것입니다.

또한 통일후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적,경제적 강국이 될 것입니다.

 

3. 하이디 베이커(영국인신학박사.여성 예언 사역자)

“북한이 해방되고, 한국은 영적강국이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4. 체안(중국인목사. 예언 사역자)

“하느님께서 장차 한국에 기름을 부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한국을 대 추수때 지도자로세웠다’고 하셨습니다.”

 

5. 샨볼츠(미국인예언사역자)

올 여름 천사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 천사가 50년 동안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 주며 북한에 많은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하고 이제 우리 세대에 휴전선이 사라질 것이다.

현재 남한 사람들은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와 경제가 악화될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얘기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경제의 영을 남한에 주실 계획으로

하나님께서 남한에 세 가지영역에서 신기술을 주시고 많은 나라에서 이것으로 인해 한국을 경제 파트너로 삼기 원하는 일이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이 모든것은 고비를 넘길때 가능합니다.”

 

6. 캐서린 브라운(미국인 여성예언사역자)

하느님이 주신 환상을 통해, 나는 서울 위의 하늘이 열려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위를 바라보자 하느님의 보좌가 보였고 그 광경은 분명했으며 장엄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두 천사가 서울 위 공중에 떠있었는데, 한 천사는 나팔을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금빛 용액으로 가득찬 사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두번째 천사도 그 사발을 남한의 수도에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곧 그 물길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하느님은 북한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길게 연결된 철책이 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련한 그들을 더 이상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지키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에 나의 이름을 입증할 것이고 나의 영광은 현재 감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그들은 감옥과 박해의 장소로부터 자유롭게 걸을 것이다.

 

7. 릭 조이너(미국인목사.예언 사역자)

한국은 장차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요충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북한에 놀라운 변화의 문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분단된 국가가 재연합하는 역사가 일어나게될 것이고, 그때 한국은 영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면에서 지구상의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국가들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동북아시아의 경제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강력한 지역이 되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일본과 독일을 뛰어넘게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올 혼돈의 때에국가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남북한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열강의 억압을 겪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도 두 나라는 권위에 대해놀랄 만한 경의를 표해 왔고 이로 인해 앞으로 다가올무법이 성행할 시기에 빛의 역할을 할 것이다.”

“만약 영적파수꾼들이 그 때가 이르기 전에지쳐 버리거나, 그들의 경계 태세를 소홀히 한다. 큰 위험이 도래할 것이다"

출처: 밝힐 수 없음




새해 좌우명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대신 
오늘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는 대신 새로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 하겠습니다.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아픔을 견디겠습니다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겠습니다.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겠습니다. -작자 미상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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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의학(헤르만 바빙크)

 본 책에서는 역사적으로 또는 교리적으로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개혁주의의 특성이 어떻게 변천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21세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의 개혁주의는 역사적인 전통도 없이 교리적으로 난무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본 책을 정리하면서 역사적으로 바른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예정론에 대한 고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이미 독일 종교개혁과 스위스 종교개혁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1529년 Marburg에서 평화 조인되었으나 다만 서류 위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츠빙글리가 죽고 칼빈이 루터의 존경과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 그에게 가까운 접근에도 츠빙글리의 편에 서 있었을 때, 루터주의 개신교와 개혁주의 개신교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커져 있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새시대가 되어 둘 사이의 특징적인 구별에 대한 역사와 연구들이 거기에 원리에서부터 기초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음을 명백히 증명하였다. 저자가 언급한 이런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될 때 보다 엄밀한 개혁주의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중요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되기도 한다. 개혁주의자는 신론적이며,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가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이루시느냐?"을 언급한다. 이것은 또한 이교주의,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의 원인을 추적하며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터주의자는 인간론적이며,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치 않으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고, 이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는 것이다. 또한 유대주의, 행위 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됨을 배울수 있다. "인간중심"인가 ? 아니면 "하나님" 중심인 ? 가의 중요한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즉 개혁주의는 위의 사상에 입각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로 우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주의 교의학에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은 쯔빙글리와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이다. 쯔빙글리의 근본사상은 다음과 같다. 신학적 출발, 인간의 완전한 의존성, 예정, 그리스도의 인성, 교회와 성례의 영적인 견해, 종교 개혁의 윤리적 정치적 의미등이 그에게 이미 현존하였다. 이런 그의 신학의 약점은 그의 사상의 판명성과 명료성이 깊이에 있어서 결여를 메꿀 수 없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하나도 완전하고 종합된 체계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개혁주의 교의학은 쯔빙글리를 시작으로 이것을 체계화시킨 칼빈으로 넘어간다. 칼빈은 모든 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이념들을 청산하고 가능한 한 엄밀하게 성경과 결합시켰으며, 그리스도적인 종교의 객관성,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경, 교회와 성례에 관한 객관성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강하게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육과 영 사이의 츠빙글리의 대립성과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루터의 대립을 극복하였고 단 하나의 견해에도 금욕적인 점이 없었으며, 그리스도적인 삶과 결합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칼빈은 계속해서 성만찬 이론과 예정론을 독자적 입장에서 끌어들였다. 이후에 베른은 제네바, 취리히, 바젤, 샤펜하우젠의 입장과 똑같이 칼빈과 관계하고 있다. 이 16세기 스위스의 교의학은 전체적으로 칼빈의 정신안에서 Beza의 신학논총(Tractationes theol 1570), Petrus Martyr Vermiglius의 보편 교의논제들(Loci communes, 1576), Muscullus의 보편 교의논제들(Loci comm. 1560, 1567), Aretius의 신학문제들(Theol. problemata 1579)에 의해 다루어 졌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스위스로부터 프랑스로 확장되었다. 1536년 "기독교 강요"를 한 서문을 가지고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였고 프랑스 종교 개혁을 목적하기도 했다.

 

이 세기에 뛰어난 프랑스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Chandieu 159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de verbo Dei), 그리스도의 제사직에 관해서(de Christi sacerdotio), 속죄에 관해서(de remiddione peccaorum)

 

Marlorat 1562--> Feugueraeus에 의해 1574년에 편집된 사실과 교의들의 보편논제들로 엮은 성경보전(Thesaurus S.Scripturae in locos comm. rerumet dogmatum)

 

du Plessis Mornay 1623--> 교회론 논고(Trait de I'Eglise 1578), 기독교 진리에 관한 논고(Trait de la verite de la religion, 1581), 부패의 신비 다시 말하면 교황주의 역사(Le myste re d'iniquite c' est a dire lhistoire de la papaute 1611)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칼빈주의가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것은 로마 카톨릭과의 투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를 통하여 기도되었던 종교개혁과의 갈등이었다. 메리 여왕 아래서 대륙으로 피신 온 종교개혁 성향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칼빈, 불링거, 마르티르 등의 교리와 친밀하게 되었고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영국 종교개혁에 고심하였다. 교리에 있어서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도들은 근원적으로 하나인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영국 국회의 신학은 왕정회복의 17세기 초기까지에는 칼빈주의 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대학들에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가르쳤다.

 

영국의 개혁주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장로교회적 형태의 케임부리지 교수 Thomas Cartwight가 1570년에 해임되고 1603년에 사거였으며, William Perkins1602, William Whitaker1595 가 엘리자베스 자문관인 Whitgift에게 제출하였던 람베스 9개항안에 예정론을 고집하고자 했으나 고위성직적이고 펠라기우스적인 견해들이 승리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빈주의가 죤 낙스(John Knox1572)와 죤 크레이그 (John Craig1600)를 통하여 강하게 영향을 끼쳤고, 궁극적으로 1581년 왕을 통하여서도 공인되였다.

 

독일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적지않게 칼빈에게 의존적이다. 그 신학적 특색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Pareus, Ursinus, Olevianus, Hyperius, Boquinus, a Lasco의 신학은 많은 점들에서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Prof. Gooszen교수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대한 구 연구서들(1890,1893)과 Dr. Van‘t Hooft의 불링거의 신학(De Theol. van Heinrich Bullinger, 1888)을 통하여 취리히의 츠빙글리의 계승자로부터 그것에 관한 결론이 아주 잘 내려졌다. 하이델베르그에는 Ursinus, Olevianus 곁에 엄격한 칼빈주의자인 Zanchius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미 16세기 말쯤에 개혁주의 신학내에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이 생겼다. 우리가 칼빈, 히페리우스, 쏘시니우스에게서 직면하는 대로 교의들의 단순한 취급은 계속해서 불만적이었다. 이 시대의 개혁교회에서는 교의학이 학술적인 방식으로 취급되었다.

 

17세기와서 영국에서는 고()교회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확실한 지반을 얻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감독주의를 옹호하면서 칼빈주의에 머물렀던 많은 신학자들이 영국국교회 안에 있었다.

 

영국에서는 국교 반대자들 사이에서든 영국 국교회주의자들 사이에서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더불어서 프랑스에서 아미랄드주의가 영국에 전해졌다. 두 사상은 종종 함께 흐르며 중요하고 지루한 논쟁에 동기를 주었던 신 율법주의의 이론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연합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에 관련하여 영국신학의 중심점은 교의적인 연구에 있지 않고, 성서적이고 교회사적이며 교부학적이고 고고학적인 실제적인 연구에 있다. 저절로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관계들이 거기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비교적 좀더 풍부하고 강한 교의적인 생명력이 스코틀랜드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칼빈주의가 적절한 터를 발견하였고 엄밀하고 긍정적인 정신안에서 좀더 발전되었다.

 

이런 개혁 교의학의 긍정적인 발전은 확실한 의미에서 도르트회의 결정들(1618-19)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1646), 스위스 공동고백(1675), 발크 신앙조항들(1693)에서 그 절정과 동시에 궁극점에 도달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적 형태들은 후대에 칼빈으로 시작해서 17세기 까지의 중요한 개혁주의적 독특성을 결정하게 해주는 중요한 신학적 발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중요한 신학적 발전 뿐만 아니라 반대적으로도 17세기에 이미 개혁주의 신학을 훼파하고 몰락시킨 원리들이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주의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종교개혁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 즉 윤리 종교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적이고 심미적인 원리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학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하여 헬라 로마문화의 부흥에서 인간의 조화적인 발전을 위한 한 방도를 보았던 자들 이외에도 다른 두 가지 분파들이 일어났다. 즉 그들은 바로 스위스, 네델란드, 영국,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에 모든 시대를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재세례바들과 소키누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신비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들을 종교와 신학 안에 현실화시켰다. 소키누스주의는 자연과 은혜를 궁극적으로 완전히 결합하였던 모순대당 관계로 바꾸었다. 재세례파들도 같은 근본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자연적인 것과 초 자연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서로 조화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소키누스주의는 자연을 위해서 은혜를 버렸을 지라도 , 재세례파는 자연을 은혜에 희생시켰다. 이런 정서적인 경향들은 철학적 영역에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하여 원리에 있어서 모든 권위와 객관성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전 우주를 인식이론적으로 주관과 그의 생각으로부터 세워 보려고 하였다.

 

여기에 방법에 있어서 참으로 데카르트주의에 가까웠던 Coccejus주의가 일어났는데 그는 츠빙글리, 불링거, 올레비아누스 등에게서 일어났고, 네덜란드에서도 스네카누스, 고마루스, 그렐카티우스, 클로펜부르그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어 났으며, 언약론이 아니라 언약론주의적인 방법이었다. 그의 언약에 관한 교리대요(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o,1648)는 성경역사적인 교의학이었고 성경을 원리로 뿐만 아니라 교의학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성경신학을 전통신학과 대조시켰고 언약을 작정에, 역사를 이념에, 인간론적인 방법을 신학적인 방법에 대조시켰다. 이 방법의 위험은 그것이 영원하고 변치아니하는 실체(substantia foederis)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oeconimia foederis)의 흐름 안에 떨어뜨리고, 되어지는 것의 이념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도 했다.

 

스콜라주의는 자신의 시대를 갖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번성은 지나갔다. 코케이우스주의자들이 대부분의 교수직 자리를 차지하였다. 1720년 위트레히트에 람페의 등용은 코케이스주의자들이 승리였다.

 

영국에서는 비국교도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장로파들은 웨스트민스터회의 이후, 수에서뿐만 아니라 영향에 있어서 몰락해 갔고, 이미 16세기에 Robert Browne, Johnson, Ainsworth와 John Robinson을 통하여 포용되어졌으며 시민전쟁 동안에 그 힘과 수에 있어서 증가하였던 독립파를 위한 여지를 남겨야 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여전히 장로파들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단지 독립파들은 소수의 분할을 얻었다.

 

침례교 역시 영국에서 이미 16세기에 드물게 일어 났었으나 1633년 이래 처음 자신의 교회들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677년에 침례교도들은 교회 정치와 세례에 있어서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사보이 선언으로부터 벗어난 신앙고백서를 내었다. 이 고백서에 기초하여 1693년 William Collins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한 요리문답이 제시되었다.

 

칼빈주의적인 침례주의자들 중에는 일반적인 침례교도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 혹은 자유의지 침례교도들이 구별되고 있기도 하다.

 

아르미니우스적이고 침례교적이며 천년주의적이고 반율법주의적이며 자유사상적인 감정들조차도 출구를 찾았고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퀘이커교 안에서 이것은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전통과 고백과 교회연합으로부터 해방이 신자마다 자기 자신 위에 기초되어 있고,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그 자신 안에, 영 안에, 내적인 빛 안에 그의 종교적 생활과 지식의 원천을 소유하는 것에서 성취되었다. 모든 객관적인 것 즉 성경, 그리스도, 교회, 직임, 성레는 제외시 되었다. 결국 이런 것은 이신론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위의 영향으로 대략 1750년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은 어디에서나 확인되었다. 이미 전 시대에 현존하였던 결합되지 않은 요소들은 종결되었고 교의학을 손상시켰다. 네덜란드에서 코케이우스주의가 승리를 거둔 이후 1740년부터 1770년까지는 관용의 시기가 왔다. 진리의 힘은 거절되었고 사람들은 신앙 고백으로부터 성경으로 되돌아갔다. 원죄책, 행위언약, 특별한 구속 등과 같은 특별한 개혁주의 교리 내용들은 사라졌다. 다양한 항변주의적이고 소키누스주의의 오류들이 아름다운 형태와 성경적인 명목하에 등장하였다. 개혁주의 종교의 고백자들은 기껏해야 기존의 것들 안에 안주하였으나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고 소리를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옛날 교의학은 역사적 탐구의 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770년 이래 신신학(neologie)의 영향은 영국 이신론과 프랑스의 불신앙, 독일의 합리주의가 수확의 터전을 발견하였다. 혁명은 개념들에 있어서 전면적인 회귀였다. 정통주의는 합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온건한 성서적 초자연주의의 형식에서 19세기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런 것으로서 뛰어난 대표자는 신학요강의 도식(Schema Instituutionum theol. 1773-75)을 쓴 P. Cheval!lier, 이론신학요강(Instit. Theol. theor. 1788)을 쓴 Br. Broes, 12권의 종교요강(Onderwijs in den godsdienst, 1780)을 쓴 J. van Nuys Klinkenberg, 신학의 요리문답(Katechismus der H. Godg. 1780)을 쓴 Samuel van Emdre, 신적 직관(Beschouw. Godg. 1790)을 W.E. de Perponcher 등과 특별히 기독교 신학의 이론적 부분(Pars theologiae Christ. theoretica, 1800)을 쓴 H. Muntinghe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더 이상 특별한 개혁주의 신학이 없었다. 낭트칙령의 폐지가 나라 밖에서 최선의 힘들을 결집하였다. 18세기에서는 Paul Rabaut와 Antoine Court가 프랑스에서의 개혁주의 교회의 재건의 명예를 얻었다. 프랑스 설교자들은 대부분 로잔에서 그들의 교육을 받았고 거기에 앙투완느 큐르의 계획에 따라 프랑스 신학생을 위한 자신의 신학교를 세웠다.

스위스에서는 1675년의 스위스 공동고백(Consensus Helveticus)이 합리주의를 방해할 수 없었다. 바젤에 있었던 J.R.Wetttstein과 그의 아들, 취리히의 J.C.Suicerus와 그의 아들 Henricus, 제네바의 Mestrezat와 Louis Tronchin이 이 고백에 대한 모든 오류들을 주장하였다. 이미 1685년에 그들을 열외시키고자 하는 기도들이 진행 중이었다. 18세기 와서 이들이 제네바, 바젤, 아펜젤, 취리히, 베른 등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Neufchatel의 설교자인 J.F.Osterwald가 17세기적인 정통주의로부터 18세기의 합리주의에 이르는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의 오늘날 그리스도인 안에 지배되고 있는 부패의 원천에 관한 논고(Traitte des sources de la corruption, qui re gne aujourdhui parmi les Chre tiens, 1700), 요리문답(Cate chisme,1702), 기독교 신학의 편람(Compendium theol. Christ. 1739)등에서 그는 죽은 정통주의와 아름답게 엮어진 교의들에 대해서 탄식하였고 많은 교리내용들, 예를 들면 선택론을 취소하며 도덕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영국에서는 교의학이 이신론에 의해서 정돈된 예언과 이적, 계시에 대한 의문들에 의해서 취급되었다. 변증학은 종종 합리적으로 채색되었을지라도, 그것은 많은 대표자들을 가졌고 그들 중에 역시 어떤 뛰어난 대표자들이 있었다. S. Clarke, N. Lardner, J. Butler, R. Bentley, W. Whiston, A.A. Sykes, T.Sherlock, D. Waterland, J. Coneybeare, J. Leland, J. Foster, W. Warburton, R. Watson, 기독교 변증(Evidence of Christianity,1794)과 자연 신학(Natural Theol, 1802)을 쓴 W. Paley(1805) 등이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들 중에서 선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총체](A complete body of divinity, 3 vol., 1773) 4차원의 국가(Fourfold state, 홀란드 번역 1742), 은혜언약에 대한 견해(A view of the covenant of grace, 꼼리에에 의한 홀란드 번역 1741)를 쓴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아담 깁(Adam Gib), 첫 번째 다섯 분리주의자들이며 그들의 저서들이 역시 화란어로 번역된 피셔(Fisher), 윌슨(Wilson), 몽크리프(Moncrieff), 형제인 랄프와 에벤에젤 어스킨(Ralphen Ebenzer Erskine) 등이다.

19세기 초기에 개혁주의 신학은 어디에서나 슬픈 몰락의 길로 돌아갔다. 네덜란드에서는 신학이 초자연적인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실행되었다. V. Palm, V. Voorst, Borger, Clarisse, Kist, Hengel, Abresch, Cheval!lier, Muntinghe, Ypey, Heringa, Royaards, Bouman, Vinke, Dermount, Broes, D. Curtius, Senden, Egeling 등과 같은 유능하고 뛰어난 설교자들과 스톨피아 특사(1787년)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이런 초자연적인 경향은 이성적이기를 원하였지만, Wegscheider, Rohr, Paulus의 의미에서 합리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시를 주장하였고 다양한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근거 위에서 그것의 필연성과 가능성과 진리를 증명하였다. 그것은 성경적이기를 원하였고, 반고백적이고 반철학적이고 반칼빈주의엿다.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이신론적이고, 인간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이며, 기독론에 있어서 도덕적이고, 교회론에 있어서 동료적이며, 종말론에 있어서 쾌락주의적인 교의학을 가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점점 신학 영역에서의 발전을 불신앙쪽으로 나가게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현대신학에는 더 이상 교의학이 없을 정도로 치달았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많은 현대주의자들의 경우에 교의학에 있어서는, 결핍이 있고 스스로 신앙고백과 교회조직체에 눈이 띄었다.

 

Ds. Fleischer가 1902년 4월 현대신학자들의 모임에서 그것을 천명하였고 Dr.J.van den Bergh는 1903년의 모임에서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회의 연합에 이르는 조직화에 대해서 변호하였고, Dr. Knappert가 현대고백을 선호하는 소리를 높였으며, Dr. Goenewegen은 종교철학 안에 형이상학의 권리와 철학적 교의학을 설립하였고, Dr. Bruining은 교의학의 방법에 관한 연구를 썼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증명을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의학을 향한 이런 열망이 빨리 만족될 것 같지 않다. 지성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현대인 사이에서도 계속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교의학적 물음에 관해서 ( 신론과 인간론, 인간의 근원과 불멸성, 죄와 그리스도의 인격, 구원관 등) 견해들이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혼합주의 양상에 빠지고 일반 종교적 입장 때문에 기독교의 특별한 입장을 포기하였던 일 자체가 이미 일어났었고, 1903년에 암스테르담 자유주의자들의 회의에서 더 명백히 밝혀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이 점점 더 몰락하게 되었다. 계몽주의가 일어났을 때, 칸트, 슐라이어마허 등의 철학 영향의 결과로 1718년 연합교회가 생겼고 독일에서의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을 완전히 몰라케하였다. 이 세기의 초기에 개혁주의 의식으로부터도 몇 가지 깨달음이 일어났다. 에어랑겐으 크랍트, 엘버필드의 크롬마허, 뤼벡의 가이벨, 브레먼의 말레트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주 크지 않다.

 

에러랑겐의 에브라르트(1888), 마르부르크의 헤페(1879)와 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멜란히톤주의를 통하여 개혁주의적인 것에 큰 해를 끼쳤다. 할레의 비켈하우스(1858), 프랑크푸르트의 칼 쉬드호프(1865), 비인의 뵐, 스투트가르트의 짠, 데트몰의 텔레만, 엘버펠트의 콜브루게1875)와 기타 다른 사람들이 개혁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다. 지금에는 독일에 개혁주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어떤 신학대학이나 학교가 없다.

 

스위스와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로부터 거기에 심어진 부흥을 통하여 재생이 일어났다. 그 부흥은 강력한 정신적인 운동이지만, 원래 비교회적이고 반고백주의적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독교 기초 위에 있고 좀더 개인적이고 귀족적이며 감독주의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성격을 통하여 인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선택(C?sar Malan1864, 그의 전기는 Malan Jr. Amst. Hoveker 1874에 의해서 됨)과 영감(Merle d' Aubigne', 1872, Gaussen, 1863)에 강조를 두었다.

 

Alexandre Vinet(1797-1847)는 신학적으로 생의 원리는 기독교와 신앙의 조화였고, 계시가 인간에게 종교적 도덕적 필요들을 선물하신 충만한 만족이었으며 복음의 엄밀한 '자연성'이었다.

 

기독교의 주된 진리들 위에 확고히 서서 강하게 교의와 도덕의 연합, 진리의 윤리적 편에 강조를 두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그가 기독교의 진리성을 기독교적인 경험의 기초 위에, 양심의 증거 위에 의존하도록, 그리고 선택을 버리고 신인협동설 위에 서서 일반적으로 중심점을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넘어가도록 하는데 점점 더 이르렀다.

 

E.Scherer는 처음에는 엄밀한 전통주의였으나 점점 더 자신의 마지막 것과 결별하여 완전 불신앙 속에서 그의 생을 끝마쳤다.

 

1849년 E.Scherer의 등장 이래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 원리들이 비네로부터 철저히 연구되고 그리고 후에 칸트와 리츨의 영향이 연구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중용적이고 온건한 정통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유주의는 Pressens?, Asti?, S?cr?tan, Sabatier, Leopold Monod, Chapuis, Dandiran, Lobstein

 

정통주의는 Godet부자, Porret, Berthoud, Martin, Doumergue, Bertrand, H.Bois, Gr?tillet

 

두 파벌 사이의 논쟁은 하나는 종교에 관한 권위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즉 이것이 성경에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는 것인지 혹은 이성과 양심에 있는 것인지에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련된 것으로서, 즉 아무리 역시 다른 이들에 따라 영지를 통해서 분석될지라도 그가 참된 하나님이신지 그렇지 않으면 혹은 그는 다만 인간이었는지, 그가 역시 완전하게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어서 전형 흩어짐이 없이 나누어진 한 인간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영국에서 감리교회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John Wesley(1703-1791)는 과학적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을 개인주의화하고 매 사람에게 영생물음을 묻게 하였던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George Whitefield(1714-1771)를 통하여 생긴 감리교회는 우선 39개조항들에서 한 두 가지 점에서 벗어난 점에 있지 않고, 기독교 진리 전체를 두 가지 점 즉 죄와 은혜의 갑작스럽게 의식된 경험, 다시 말하면 개인적 회심과 두 번째로 전혀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소한 일들로부터 회심함과 다양한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만두는 것을 통하여 표현하였고 이생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에 있다. 이런 일방성이 점점 더 다양한 교의들이 논쟁되고 변경되거나 종속적인 가치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식이 되었다.

 

감리교회가 성공회와 장로교회, 독립교회, 침례교회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웨슬리는 영국 미국 개신교형(het Engelsche en Amerikaansche Protestantisme)의 창시자요, 그의 등장 이래 계속 개신교 안에서 반복하게 된 대각성운동의 중개역할자이며 "빈민굴의 대주교"요, 내적 선교의 아버지요, 기독교 사회운동의 기초자이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주로 민중에 제한되었다. 좀더 높은 사회층에서나, 정치, 철학, 인문학에서는 차디찬 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그와 반대로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영역에서 옥스퍼드 운동 내에 옮겨진 로마 가톨릭(W.Scott, Southey, S.T. Coleridge,1834)으로부터 반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6세기로부터 기원하여 상당히 강화된 고교회적인 정파를 갖고 영국 국교회 안에 로마 가톨릭 교리와 의식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Spencer Jones는 1902년 런던에서 Right Hon. Viscount Halifax 자작의 서문을 가지고 출판된 영국과 교황청(England and the holy See)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공적으로 영국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세상의 빛(Lux Mundi, 1890)의 저자, Canon Holland, Moore, Illingworth, Talbot, C.Gore 등이 퓨지주의를 새롭게 하고 동시에 기독교 교의들을 새 시대의 빛에 삽입시킴을 통하여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고교회적인 종파 곁에 수평교회적인 종파가 등장하여 이미 17,18세기에 광교주의(het Latitudinarisme)를 통하여 준비되었다.(Thomas Arnold(1842), Hampden(1868), Maurice(1872), Ch.Kingsley(1874), Whateley(1863), F. W. Robertson(1853), A.P.Stanley(1881)) 저교회적인 종파의 감리교를 꺼려 그들 모두가 진지하고 고상한 방식에서 기독교와 문화와 화해를 향하여 노력하였다.

 

의식주의, 다양한 이단들과 분파들, 거대 사회의 필요와 특별히 이미 Colenso주교를 통하여 영국땅에 입성하게 되었고 Rob. Smith, T.K. Cheyne, S.R.Driver를 통하여 선전되었던 고등비평이 수평교회적인 경향에 우위를 제공하였다.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수석사제인 F.W.Farrar, 침례교회주의자인 J. Clifford, 구 복음주의와 신 복음주의(The old Evangelicalism and the new, 1889)를 쓴 회중교회주의자인 R.W.Dale, 런던에 있는 Joseph Parker, 현대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The place of Christ in modern theology, London 1893) 기독교 종교철학(Philosophy of Christian religion)을 쓴 맨스필드 대학의 Dr. Fairbairn, 장로교 성직자들 중에는 영적 세계에 있어서 자연법(The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최고 선(Summum bonum) 등을 쓴 Prof. Henry Drummond, 성경, 그 근원과 본성(The Bible, its origin and nature, Edinburgh 1905)을 쓴 Marcus Dods, 변증학 혹은 변호적인 진술된 기독교(Apologetics, or Christianity defensively stated, Edinburgh 1905」를 쓴 A.B. Bruce, 현대 기독교사상의 진보성(The progressiveness of modern Christian thought, Edinburgh Blackwood, 1892)을 쓴 James Lindsay,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카르타고 신학(Alexandrinian and Carthaginian Theology, Edinb. Clark)을 쓴 J.B. Heard, 훌시안 강의(Hulsean lectures)를 펴낸 Clark, 성육신에 집중된 대로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기독교적인 견해(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as centring inthe incarnation, Edinb. Elliot 1893」를 쓴 James Orr 등이 속해 있다.

 

스코틀랜드의 국교회(de Establ. Church)의 Flint, Milligan, 자유교회의 Brown, Rainy, Davidson, Salmmond, Laidlaw, G.A. Smith, 연합장로교회의 Cairns, Muir, Thomson, J. Smith가 속해 있다.

 

스테아드는 그가 사회 전체개혁을 인도하고 극장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체를 자신 안에 수용하고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종말의 교회'를 소망하였을 때, 참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 그 때 종종 무덤 저편에 있는 만물을 회복하는 소망이 이것을 수반하고 있다.

 

엄밀한 칼빈주의는 땅에서 날마다 잃어가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글래스고의 헤이스티 교수의 저작은 참으로 중요하고 주의깊게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신학적 학문 안에 칼빈주의 재흥으로서 영접되기 보다는 크게 라이덴 교수인 스콜텐 교수의 영향하에 서 있다.

 

이신론이 이미 이적들, 예언들과 계시에 대한 방대한 비판을 시도한 이후 다윈이 종 이론, 스펜서의 불가지론, 스튜어트 밀의 경험주의, 틴달의 물질주의의 영향하에 이런 종교적 변질과정이 좀더 계속되었다. 기독교 교의들의 비판과 회유하며 화해하는 관계를 확증하였다.

 

미국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은 원래 아주 다른 형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교회들이 영국과 유럽의 모교회로부터 미국과 캐나다에 계속적으로 전수되었다. 1607년 버지니아로 이민온 감독교회가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교회이고, 허드슨과 맨하탄 섬이 1609년에 발견된 이래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거기에 확증되고 있다. 독립교회주의자들 혹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처음 1620년에 Plymouth에 상륙하였다. 퀘이커교도들은 1680년 윌리암 펜을 통하여 펜실베이니아로 안내되었다. 침례교도들은 1639년 Roger Williams를 통하여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에 확고한 발을 딛었다. 루터교 독일교회와 같이 개혁주의 독일교회도 18세기 중엽 이래 확증되고 있다. 장로교회는 다양한 그룹들으로 구분되고 있다. 거의 모든 이런 교회들과 그 안에 있는 종파들이 칼빈주의 근원으로부터 왔다. 모든 종교적 운동들 중에서 칼빈주의가 미국에서는 가장 힘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양한 변화에도 회중교회, 침례교회, 홀란드 및 독일 개혁교회들 안에 생명을 불어 넣는 기본요소이다. 모든 방면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홀란드, 독일로부터 그것이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그것이 식민지 시대 동안(1620-1776)에 뉴잉글랜드의 성격을 형성하였다.

 

미국에 웨슬 리가 이르기 전 1734년에 노샘프턴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후에 그의 친구 휘트필드와 함께 여러 번 같은 각성운동을 주도하였고 변호하였다. 신학적으로 그는 특별히 뉴잉글랜드에서 Daniel Whitby와 John Taylor의 저서들을 통하여 유입된 그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싸움을 주도하였다. 그는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사변들을 통하여 칼빈주의를 강화하였으나 실제 이미 Cameron에게서 일어났던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중대성과 의지의 자유, 원죄와 속성에 대한 특별한 이론을 통하여 그것을 약하게 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교리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소무르학파의 경우와 같이 원죄의 거절과 속죄의 보편성을 그것과 연합시켰던 어드워즈주의자들, 새신학의 사람들, 새 빛들의 아버지였다. 그의 아들 조나단 에드워즈(1745-1840)는 속죄론에 있어서 사실의 본질에 있어서 그로티우스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나다니엘 에몬스(1745-1840, Works, Boston 1842)가 홉킨스주의의 가장 뛰어난 옹호자였다. Timothy Dwight,(1752-1817)와 Nathaniel W.Taylor, 1786-1858)의 경우 에드워즈의 체계가 펠라기우스적인 의미에서 변경되고 있고 '신학파'의 이름을 얻고 있다.

 

1808년에 세워진 앤도버의 신학교에서 교회사교수 에그버트스미스의 지도하에 그것은 진보적인 정통주의와 내세 시련에 관한 교리로 인도되었다. 뉴잉글랜드의 신학에 있어서 구학파는 무엇 보다도 구칼빈주의를 변호하는 Dr. Bennet Taylor(1783-1858)와 Dr. Leonard Woods(1774-1854)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점점 더 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수준으로부터 떨어졌다.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미국의 회중교회 대회에서 12개조항의 새고백이 준비되었는데 그 안에서 특징적인 개혁교회 교리들이 빠졌다. 이 새로운 교리성명은 25인 신학자들의 위원회에 의해서 발생되었다. 유명한 두 설교자인 W.E. Channingg(1780-1842)과 하트포드의 Horce Busnell(1802-1876)이 청교도주의에서 떨어져 나갔다. 채닝이 미국에서 유신론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변자가 되었고, 부쉬넬은 삼위통일성에 관한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새롭게 하였고 속죄를 다만 하나의 도덕적 행위로 파악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병행적으로 발전해 갔다. 여기에서도 구빛과 새빛의 신학자들 사이에 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 대화와 뉴욕대회의 교회들(1741-1758)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다. 첫 신학자의 한 사람은 John Dickkinson(1688-1747)으로서 그의 유명한 저서는 항변파에 반대하는 5개 조항에 대한 변증이었다. 특별히 구학파는 1812년 총회에 의해서 세워진 프린스틴 신학교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거기에서 Dr.Archibald Alexander(1772-1851), Dr. Charles Hodge(1797-1878)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London and Edinb, 1873, 3 vol.)을 통하여 대변되었다. 찰스 하지의 계승자는 그의 아들인 Archibald Alexander Hodge(1823-1886)로서 신학개요 (Outline of Theology, ed. by W.H. Gold, London, Nelson 1866)와 복음주의 신학(Evangelical Theology, 1890)을 썼다. 이러한 형태는 17세기 칼빈주의의 재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린스턴 신학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스위스 공동고백에 기록되고 특별히 F. Turretinus의 담화신학(Theol. Elentica)을 통하여 보급된 대로, 17세기 칼빈주의의 재생이었다. 같은 체계가 역시 남부 신학자들인 James H. Thornwell(1812-1866), Robert J. Brekinridge(1800-1871), Robeut L. Dabney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구학파의 대표자 한 사람은 교의신학(Dogmartic Theology, 2 vol. New-York, Scribner 1888)을 쓰고 1890년 이래 뉴욕 유니온 신학교 은퇴 교수인 W.G.T. Shedd다. 그러나 하지와 쉐드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언약론주의자요, 창조론자였으나, 후자는 실재론자요 유전론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선택을 아주 넓게 파악하고 그 아래 요사한 어린이들을 포함시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하고 있다.

 

교의학은 기독교 신학 체계(System of Christian Theology, ed, by W.S.Karr, 4 ed. New-York Armstrong 1890)를 쓰고 구학파와 신학파 사이의 중재를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찾았던 Dr. Henry B. Smith(1815-1877)를 통하여 배웠다. 그의 제자인 Lewis French Stearns(1892)는 1893년 뉴욕에서 출판된 현대신학(Present da Theology)이란 작품을 써서 그 안에서 영감, 섭리, 영지(kenosis), 예정, 축복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을 제시하였다.

 

프린스턴 장로교 신학교로서 전혀 독립적으로 대학과 함께 거기에 존속하여 교회 고백과 결합되어 있었고 교수들의 특별한 결속(Warfield, Vos, Dick Wilson, Greene)이 있었으며 신학잡지(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안에서 영예로운 개혁주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정신이 북장로 교회 안에도 침투되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질서 속에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개정은 1903년에 결정되었다. 거기에 단지 적은 변경들이 제안되었을지라도, 첨가된 것들과 삭제된 것들, 수용된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한 두 개의 새로운 장들, 개혁주의 교리의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을 다시 헛되게 부정하는 선언문 모두가, 신앙고백 가운데 가르쳐지고 있는 특수은총론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 구속, 복음의 선포, 은혜의 제공, 성령의 역사, 어릴 때 죽은 모든 어린이들의 축복의 보편 은총론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제공된 개정은 두 측으로부터 논쟁되고 있다. 클락스빌 신학교 교수인 Dr. R.A.Webb와 같은 몇몇의 개혁주의자들과 Reev. Dr. S.M.Templeton와 같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개정의 보편은총론이 원 신앙고백의 특별은총론과 충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에 일치하고 있다.

 

각각의 경우에 주목할 것은 개정이 결정된 2년후 1905년 5월에 이루어졌던 북장로교 일반대회에서, 1770년 각성운동으로부터 태어났고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던 컴벌랜드 장로교회와 교회연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 제한된 구속, 선택과 유기,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의들은 은밀히 부정되거나 역시 공공연히 거절되고 있다. 칼빈주의에 대한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위에서 처럼 종교개혁에서부터 분명하게 들어난 개혁주의는 17세기를 넘어서면서 점차로 그 독특성이 변질되어져 갔으며 급기야 19세기 미국에 와서는 전혀 다른 개혁주의적 특징을 드러내게 되었다. 몇몇 학자들을 통하여 17세기적 개혁주의 독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시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흐름의 맥이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개혁주의적 특성을 이어 받은 한국의 기독교도 엄밀한 개혁주의적 전통을 상실하고 변질된 개혁주의적 특색을 갖게되엇다고 생각한다. 본 책을 통해서 개혁주의적 독특성이 어떻게 시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났었는지 또한 그러한 독특성들이 어떻게 해서 단절되게 되었는지를 배우면서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 신학을 배우는 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어디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할 것인가?와 또한 어떻게 그 방법을 취할 것인가?가 무엇 보다도 매우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2012. 12. 31. 송구 영신 예배] 죽음 이후의 상태 | ▶설교 본문

2013.01.01 01:58

 죽음 이후의 상태

 요한계시록 7:9-17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7: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왔느냐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시록 21장을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납니다. 노아의 홍수를 지나면서 이전 하늘과 이전 땅에 사라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과 이 땅이 생겨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지금 이 하늘과 이 땅은 사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임하는 장면으로서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그림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완전하게 임하는 그림이 계시록 21장입니다. 죄와 저주와 마귀와 악령들과 불신자들은 다 불못에 들어가고 아무런 해나 죽음이나 병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저주가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통일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에는 부활체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천사에 대한 묘사나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사망이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망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부활체를 입은 주의 백성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 날에 하늘이 땅과 완전하게 통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 임하는 날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3:2-3)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또한 계시록 21장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새롭게 된 만물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은 불못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21 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 15절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전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구약 광야에서 지어졌던 성막은 하늘의 장막의 모형 또는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8:1-2, 5; 참조, 9:23-25).

 이처럼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및 지성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장막이 새하늘과 새땅의 세상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사람이 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실제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1:22-23).

 이때 하나님의 장막인 새 예루살렘 성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21:27).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장은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고, 하나님 보좌 주변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장막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감으로 그들 위에 그 장막이 쳐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백성이 죽음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영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들을 향한 배척과 핍박이 진행될 것입니다. 특히 역사 끝에 이르면 대환난이있어서 그때 교회가 겪게 될 고통과 핍박은 로마 시대보다 더 심할 것이며,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심한 핍박이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일제 식민 기간에 기독교는 심한 탄압을 받았고,6.25 사변 등과 함께 공산당이 임시적으로 한반도를 차지할 때 그때 교회가 당한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박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순교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마저도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사업을 할 때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어려움을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분위기를 깨는 예수 쟁이라는 등, 함께 부정직하게 살지 않기에 미워하는 등, 예수님 만이 길이라고 외치는 점에 대한 미움, 지옥을 말할 때 혀를 차며 어리석게 여기는 조롱 등, 사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난은 인류 역사 끝에 있게 될 대환난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불편과 고난은 대환난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장 하나님의 보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그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 7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시록 7장은 신자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계시록 7장을 듣게 될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주를 향한 믿음의 정절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 자신의 운명이 어떠할지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7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보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영적인 세상으로서 천사가 있고 네 생물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당장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세상이 바로 계시록 7장이 묘사하는 세상입니다. 그곳에는 어린 양이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봅시다.

먼저 9절에서 말하는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계시록에 반복되는 표현으로서 이는 꿈의 장면이 넘어가는 것처럼 요한이 보는 환상이 장면을 바꾸며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 환상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2)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보는 때는 밧모 섬에 있던 때로서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때입니다. 대략 A.D 95년 이나A.D 96년 경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A.D.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유다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유대 민족이 로마의 식민국이 된지 대략 20년 이상이 지난 때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예루살렘 핍박 때에 유대에서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로 다 흩어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세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의 핍박은 계속 진행되는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세상 모든 민족으로부터 허다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환상을 보며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하 엄청난 핍박이 성도들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진행되지만 도리어 모든 민족과 나라로부터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름떼처럼 많구나!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늘의 별들처럼, 땅의 모래알 처럼 많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12:3).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도다( 15:5-6).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어떻게 이방 민족 가운데 성취되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은 모든 이방 민족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7-8, 14, 29)

 그러므로 계시록 7 9절에서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와 환상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으로써 모든 나라와 족속, 그리고 온갖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하늘의 별들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많은 백성이 구원을 얻는 사실을 묘사인 것입니다.

 또한 9절에서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14절에 보니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씻겨주시고,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를 믿음 가운데 옷 입은 자들이 흰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완전한 의의 옷을 입고 죽음을 지나기 때문에 승리의 상태가 됩니다. ,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손에 종려 가지를 든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준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감사와 영광과 환호를 외치기 위해 손에 종려를 든 상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종려 나무를 들고 환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큰 무리가 따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12:13)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는 불신자들도 끼어서 덩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였고 또한 예수님이 세상 나라의 왕으로서 오신 것이 아닐까 하여 환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흰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진정 거듭난 자들로서 영원토록 그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환영하며 외치는 자들입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흰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죽게 되면 곧바로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하늘로 들어가서 감사와 감동 가운데 그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외치게 될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들은 무엇에 대한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율법의 저주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들이 승리를 확신하는 100% 증거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는 영원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지만, 죽음을 지나고 보니 어린 양을 믿고 따르던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그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보니 장로들이 있습니다. 24장로입니다. 구약의 12지파 대표이며, 신약의 12사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네 생물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곁에 영원토록 서 있는 존재로서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그들을 그룹 이라고 부르며 가장 뛰어난 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네 생물이 어떤 존재들인지 우리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큰 소리로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들과 모든 천사와 네 생물이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외쳤습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아멘

네 생물과 장로들과 천사들은 흰 옷 입은 큰 무리의 찬양에 화답하는 찬양을 돌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보좌와 나라는 구원 받은 백성들과 모든 천사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찬양으로 계속 울리면서 영원한 영광과 복이 차고 넘치는 상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장로 중에 한 분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요한에게 알려주었습니다.그 장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라고 물은 후에 친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15절의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하나님과 쉬지 않는 교통과 사랑을 나눈다. 하나님의 장막이 그들 위에 있다. 그들은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상함도, 해함도 없다. 또한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왜요? 바로 14절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14절에서 언급되는 큰 환난은 역사 끝에 있게 될 특이한 환난으로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철저하게 탄압하는 때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본 그때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큰 환난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온 세상에 진행될 것이며 또한 계속 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대적을 당하면서 곳곳에서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완전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 직후에 우리가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나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는 내 영혼 전체가 완전한 만족과 평강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염려도 사라질 것이며 그 어떤 실패가 속상한 일들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어 우리 영혼은 끝없는 생명수를 마시며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안식의 상태로 있다가 인자의 날에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장막이 이 땅에 내려오는 새하늘과 새땅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면 다시는 죽음도 애통도 아픔도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 온 땅의 모든 피조물들도 완전한 평화와 건강과 사랑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모든 동물을 포함한 만물 역시 인자의 날을 기다리며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8:18-23).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는 더 늙어갑니다. 이렇게 한해 한해 보내다 보면 어느날 반드시 죽음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생각보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세월이 지날수록 죽음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얼마 후에 죽음을 지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죽음을 지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병에 걸려 죽음을 지날 수 있고,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죽음을 지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늙어서 죽음을 지날 수 있고,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안전 사고에 의해 죽음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주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가 죽음을 지날 때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만 오늘 이 밤에 점검합시다.

여러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의의 옷을 입고 있는가?
나는 흰 옷을 입은 그 큰 무리에 속하고 있는가?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흰옷을 입은 것을 의식하는 자들마다 행동이 매우 조심스러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수천만원짜리 고급 양복과 양장을 입은 과소비형 신사 숙녀는 그 깨끗하고 비싼 옷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물며 완전한 의인이신 어린양 예수께서 그 피로 값주고 사셔서 주신 흰 옷을 입은 우리들!만일 그 흰옷을 의식한다면 과연 그 흰 옷이 더러워지도록 함부로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그 흰 옷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결단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2012년 한 해를 보내며 201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죽음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왔구나 하는 것을 의식하며 어린 양 예수님 앞에 설 날을 더욱 준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대문용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최송연

    주님,
    이 새해 새 아침에…
    당신의 영을 내게 부어주소서

    주의 순백한 영으로
    내 삶에 순수성을 잃지 않고
    날마다 영원을 향해 피어나는
    새순(筍)이기 원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갉아 병들게 하고

    숨겨진 죄악은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시꺼멓게 더럽힐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인생이 가꾸어야 할 초원을
    바싹 마른 검불로 태워 사위고

    매서운 역경의 된서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쉽게 낙담하는 연약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은 좋으나
    당신의 도움없이도 잘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며

    사람을 사랑하되
    그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한 점 죄악도 가슴에 숨겨두지 않도록
    분초마다 내 안과 밖을 살피시사
    견인(牽引)해 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리하시옵소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목양연가에 들어오신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Happy New Year to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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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Savior's Love
    구세주 날 사랑했네

    1. I stand a - mazed in the pre - sence
       Of Jesus the Naz - a - rene,
       And wonder how He could love - me
       A sinner - , con - demned, un - clean

       How mar - ve - lous, How won - der - ful
       And my song shall e-ver be
       How mar - ve - lous, How won - der - ful
       Is my Savior's love for me
      
       나사 - 렛 예수님 오 - 사
       그-귀 - 한 얼굴드사
       더럽 - 고 추한 이몸 - 을( 무한히 넓으신 사랑으로), (추한 죄인을 용 - 납하사)   , (무한 - 넓으신 사 - 랑으로)
       사랑 - 으로 감 - 쌌네    ( 죄인 구원 하 - 셨네),       ( 주품 - 으 - 로 감 - 쌌 - 네), (추한 죄인 감 - 쌌 - 네)

       놀 - 랍도다, 귀 - 하도다
       내 노래의 주제라.
       놀 - 랍도다, 귀 - 하도다
       구세주 날 - 사랑 했네

    2. When with the ran -somed in glo -ry
        His face I at last shall see,
       Twill be my joy through the a - ges
       To sing of His love-for-me

        How mar - ve - lous, How won - der - ful
        And my song shall e-ver be
        How mar - ve - lous, How won - der - ful
        Is my Savior's love for me

       찬송 - 과 영광중에 -
       내주 - 님 얼굴 - 뵈오리 -
       영원 - 히 주 - 님 찬양-
       함이 무한기 - 쁨되리,
      
       놀 - 랍도다, 귀 - 하도다
       내 노래의 주제라.
       놀 - 랍도다, 귀 - 하도다
       구세주 날 - 사랑 했네


     

    경계를 무너뜨리기
    (Breaking Through the Boundaries)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뜻하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에는
    나이, 피부색, 인종, 성, 정서, 경제적 신분,
    또는 사회적 배경에 관계 없이 우리들을 하나의 몸으로
    묶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성만찬은 이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연합과 공동체의
    활기찬 상징으로서 세상에 살아 계신 한 몸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요한복음 17:21)

    성만찬은 모든 인간들 가운데 살아 있어야 할
    주님과 신성한 연합의 성례전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복스러운 소망 교의의 중요성:

    이 교의는 증인으로서의 삶과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주된 동기를 부여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참으로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휴거 (“들림 받음”)이라고 흔히 불리는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의 변화 혹은 들림 받음은 질고, 고통, 그리고 어려움에 종지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때에 주님과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살아있지 않지만, 영혼은 잠자지 않고 늘 주님의 존전에 살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는 휴거는 복스러운 소망이 아닙니다. 뒤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항적이고 불순종한 세상을 판단할 때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용서함을 구하고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짐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지우셨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것을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셨습니다. 교회의 주된 사명이 다가올 심판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휴거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가시적으로 오실 때에 따라 옵니다 (스가랴 14:5; 마태복음 24:27, 30; 요한계시록 1:7, 19:11-14, 20:1-6).
    이 천년 통치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과 (에스겔 37:21-22; 스바댜 3:19-20; 로마서 11:26-27), 우주적 평화의 확립을 가져옵니다 (시편 72:3-8; 이사야 11:6-9; 미가 4:3-4).

    이 교의의 중요성:
    사탄이 이 세상을 그의 손아귀에 그토록 꽉 붙들고 있어서 때때로 그러한 형편을 개선하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재림하시기 전 그리고 마지막 때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기 전에 이 세상의 형편이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죄와 범죄, 그리고 자연의 재해들이 해마다 증가할지라도 우리들은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을 예언하였지만, 그러나 그 말씀은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승리자가 될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천년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하심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정부의 모든 실패한 체제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계속적으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미래의 어떤 날에 많은 수의 유대인의 마음이 그들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신 메시야에게로 돌아 올 것을 믿고 있습니다.

    @ 마지막 심판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때 죽었던 사악한 사람들 - 그리스도의 구원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 - 이 부활하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을 기록한 명단)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이 끓는 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마태복음 25:46; 마가복음 9:43-48; 요한계시록 19:20, 20:11-15, 21:8).

    이 교의의 중요성: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와 사악한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없습니다. 한 거짓 가르침은 의로운 사람이건 의롭지 못한 사람이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이 교리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로마서 6:23),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마련하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영원토록 의인이 거하며 통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3; 요한계시록 21:22).

    이 교의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그분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약속들은 매일의 삶의 고투와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천년통치 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며 아름답고 새로 단장된 세계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교의는 우리들이 장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도 훨씬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옮긴 글
    USA아멘넷 게시판/잠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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