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뮬러가 소개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 기도의 응답에 승리했던 사람들은 응답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과 인내와 신뢰로 기다린 사람들이다.*

<죠지 뮬러가 소개하는 7가지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첫째, 말씀을 정기적으로 묵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자주 발견하곤 했다.
말씀이 고아원 사역에 기둥이 되었고 그 길에 빛이 되었다.


둘째,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내적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급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주님의 뜻인지?" 묻는 습성대신에 언제나 먼저 성령님
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기도로 물어 보았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매순간 물어 보았다.
성령님은 가까이 임재하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기도할수록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성령이 주시는 내적 평강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합당하고 좋은 일이라도 심령 깊은 곳에
성령의 평강이 임하지 않고 의심이나 불안이 발견되면 계획했던
일을 추진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후 평강이 임하면 일을 추진했다.

넷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동기를 면밀히 점검받는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동기를 자주 기도 가운데 살펴본다.
그 목적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를 면밀히 검토한다.
혹시 자신의 심중에 극히 작은 부분일지라도 욕심의 그림자가
있으면 그것을 먼저 제거한 후에 일을 추진하였다.


다섯째, 주님 한 분만을 의뢰하며 바라본다.

갑자기 곤궁에 처하는 위기를 만날 때에도 세상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대신에 여호사밧처럼 주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역대하 20-12)"
그리고 기도한대로 오늘 하루를 무사히 도와주시라고 확신했다.
주님께서는 필요한 물품을 기적처럼 무사히 공급해 주셨다.

여섯째, 성령안에서 일을 진행해 나간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가능했다.
성령을 매우 가까이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큰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의 손길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하나님은 요술을 부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때때로
인간에 처한 환경을 다스리고
그 인생을 이끄시는 분이시다.
때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을 때는
환경을 통하여 막으시는 경우도 있었다.
환경을 변화시키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늘 바라보았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습니까?
내 지혜와 능력으로 안되는 문제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필요한 지혜는 어떤 자에게 임할까요?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는 줄 믿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겹줄로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주시고,
우리 앞의 풀무불을 하나님께서 직접 꺼주실 줄 믿습니다.


옥성석 목사의 ‘기도의 세 겹줄’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바빠지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바빠지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게 뭔가 부탁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잡니다만, 그때부터 부모가 바빠집니다.
자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기도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바빠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줄 믿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제일 먼저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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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구하는 사랑 참된 진리(드흐라프)

2) 요구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정당한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여러 방면에서 거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오직 주기만 하는 가장 숭고한 속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반대한다. 그들은 당장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 가운데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주셨다고 이해한다. 사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런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만일 인간적 사랑이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러한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 자체에는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사랑의 패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종종 우리들 중에는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아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모든 것을 주는 사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를 다시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 사랑 안에서 심지어 자신까지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신 만큼 또한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우리의 전심을 요구하신다.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자아-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할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하나님은 자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주고 요구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세우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신을 다 주신 후 그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랑의 응답을 율법 조항으로 넣으셨다. 그 조항은 아담에게 명령으로 요구되었지만 그는 그 조항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그 조항을 완벽하게 이루셨다. 이에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한때 언약을 통해 사람에게 하셨던 요구를 이루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언젠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사랑과 순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           

 

따라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은 사랑의 요구에 의해 얽매여 있었다. 지금 우리가 더 이상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그 명령의 권리나 요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그 권리에 기초하여 서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타당하다. 만일 우리에게 그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리의 기준을 하나님의 위치와 작정에 두지 않고 인간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게 하려는 것과 같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본성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며 그 결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본성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정하셨다. 주관주의는 사람의 본성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의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며 자가당착이다. 또한 역사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 권리도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거짓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으면 황제라도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잃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에 따라 주권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 삶에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시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에 각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었다. 지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이는 과거 한때 인간이 무분별하고 주의없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지만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의 방자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의 존재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부조리한 상태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합리한 상태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철저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함부로 바꾸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고의적인 불순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맞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이 부분은 이미 앞 과에서 다루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인류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리가 모두 개인주의자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은 날 때부터 죄성으로 인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후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접근을 취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적으로 부패하였을지라도 나의 생각만은 여전히 순수하고 건강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모두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아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내 스스로 내가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각은 처음부터 전부 잘못되어 간다. 이에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의 패턴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의 기능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형성된 죄악된 관점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게 되려면 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기 시작하며 인류 공동체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난관을 벗어나게 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가졌던 이의를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믿음을 통해 정화되어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리 문답의 답변에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주지한 것처럼, 교리 문답의 답변은 죄성이 제시하는 질문을 육신의 차원에서 반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하나님의 계시로 죄성을 대면하여 그 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아담 또는 우리라고 언급하지 않고 아담 안에서 공동 책임을 진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육신의 질문을 대할 때 교리 문답의 답변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 죄성에서 나오는 그러한 고의적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취해야 한다.

 

사람의 책임은 마귀의 꾐에 빠졌다는 이유로 줄어들지 않는다. , 사람의 책임은 온갖 종류의 외부의 요소들을 겪게 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모든 영향은 우리를 죄로 유인할 수는 있지만 죄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다고 해도 그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만일 외부의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여긴다면 인간은 그 어떤 책임도 부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로 유인하는 유혹과 범죄의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경우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리 문답은 마귀의 꾐을 말할 때 죄성이 사용하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로 언급한다. , 변명을 위해서 마귀의 꾐을 언급하지 않고 도리어 죄에 떨어진 범죄를 강력하게 조명하기 위해 언급한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여 마귀같은 존재에게 이끌리는 것을 허락한다! 그는 신성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을 선호한다. 사람은 신령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우리가 스스로 범죄하였음을 큰 소리로 고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한 숨에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마귀의 꾐에 빠지려고 마음을 활짝 열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음을 보여준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인간의 죄성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육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그 답변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법적인 결정에 따른 선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 자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결정하신 공의 앞에 항복하는 자세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한 눈에 무의식적으로 비참과 구원을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내 대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좇아오는 것과 굴복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며 그 공의의 기준을 변경시키려고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 자체를 아는 것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그 요구를 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안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함께 있어야 하며 서로 상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리과 공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권리와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 역시 그 공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공의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죄를 통한 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공의의 충족을 발견한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 맘으로 인정하게 된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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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과 절제
(Q 2) 기독교인은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을 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합니까?

우리들은 훈련과 절제의 중요성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직면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둘째로는, 통제 불가능하며, 자유분방하고, 또 이기주의적인 우
리 사회의 본질이 그것을 바로 잡아 줄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개인의 훈련과 절제를 통하여서만이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보도되는 뉴스와, 기독교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영화, 그리고 묘하게 도덕을 타락하도록 만드는 텔레비전의 연속 코미디와 같은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특별히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도덕적인 현상에 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은 결국 내면의 훈련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로 귀결됩니다. 디모데후서 3:1-5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다급하게 그 항목들을 급하게 스쳐 지나갔다면, 아마도 당신은 “절제하지 못하며” 라는 말을 놓쳤을런지도 모릅니다. 이 항목들 가운데 있는 다른 모든 악한 행동들은 절제함의 결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예(例)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그러한 악(惡)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게서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5).
물론,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 번째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절제는 그 항목 가운데 마지막에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는 앞에 있는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 혹은 덕을 통제합니다. 통제함이 없는 사랑은 욕정이 됩니다. 과도한 희락은 천박한 것입니다. 자제함이 없는 화평은 나태함이 됩니다. 균형이 없는 오래 참음은 냉담함이 됩니다. 자비는 약점이 되며, 양선은 이기적인 것이 됩니다. 아무런 이유 없는 충성은 맹목적인 미신과 같습니다. 극단적인 온유는 겁쟁이가 됩니다. 세상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해있는 어두워진 마음은 경건한 삶의 거짓 그림자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절제에 대한 본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타락하고 악한 세상에서는, 절제는 신앙심이 없는 길로부터 완전히 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곳 바로 앞에서 육체의 일로 기록한 것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 (갈라디아서 5:19-21) – 은, 주님 앞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성령님께서 순화하시도록 함으로서, 우리들의 삶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훈련과 절제는 성품을 나타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가와 쾌락이 높은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과 휴식을 기독교인의 훈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 금식, 성경공부, 그리고 고귀한 것들에 대한 명상과 같은 것들과 얼마나 더 잘 균형을 유지해야만 할까요?
절제는, 편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다른 덕에 보태는 사치품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인을 확인시켜주는 표시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일곱 가지 덕 가운데 나열하였으며, 그것을 무엇보다도 믿음에 포함시켰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후서 1:8, 9).

관심사:
절제는 훌륭한 지도력을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자질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절제함에 대해 본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제함를 배우고 실천하도록 젊은이들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절제함에 대해 본이 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와 학부형들 또한 그들이 영적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들에게 절제함을 고취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20세 이하 젊은이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본질상 그들은 자연적인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별로 절제함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은 절제심에 대해 본이 되는 지도자를 더욱 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절제심에 대한 본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생활과 일관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분명히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절제하는 것에 대해 호소를 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히 절감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욕설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다지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절제가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다락방 류광수 목사, 이단 활동 여전
예수의 인성 부정, 배타적 교회관 그대로 묻어나

2013/01/18 ㆍ추천: 0  ㆍ조회: 69      

한국기독교총연합회(홍재철 대표회장)가 최근 다락방 류광수 목사를 이단 해제했지만, 류광수 목사(임마누엘서울교회)는 여전히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고 천사동원권을 가르치는 등 이단적인 내용을 설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락방 류광수 목사는 지난해 12월 28일 한기총이 주관해 열린 신학사상 검증회에서 "사과드린다. 진심으로 한국교회와 같이 가고 심부름하겠습니다"고 말한 바 있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대한 사실상의 사과였다. 하지만 류 목사는 여전히 이단성 있는 내용들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 계열의 서울 예원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류광수 목사가 작성한 전도 교재가 올려져 있었다. 자료에는 복음편지와 현장복음 등의 이름으로 류광수 목사의 설교 내용이 함께 실려 있었다.

교재 곳곳을 살펴보면 다락방이 참소망이고,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 센터라고 주장이 담겨있었다.

"소망의 모든 결론은 하늘나라이다. 참소망을 주는 곳이 다락방이다. 기독교 신자가 ‘어쩔수 있느냐? 죽으면 하늘나라 가야지...’ 이런 식으로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달으면 잘못 깨달은 것이다. 여러분에게 제일 좋은 곳이 하늘나라이다. 이 소망을 주는 곳이 다락방이다." <류광수 목사의 복음편지 중에서>

한국교회가 문제삼고 있는 배타적 교회관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에 다락방만이 유일하게 남을 것이라는 이른바 '램넌트' 사상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됐었는데,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박형택 목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단상담소장)는 "자기들 교회만이 이 시대에 남아있는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램넌트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성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다락방 교재에서는 또, 9개 주요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근거가 됐던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내용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류광수 목사 복음편지 중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성, 완전한 인성을 지닌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육신에 하나님의 영만 임한 것이라며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표현들이 여전히 많았다.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름이 예수님이시다" <류광수 목사 복음편지 중에서>

이단 전문가 이인규 권사(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 사무국장)는 "예수님의 영에 하나님이 들어온 것과 성도들에게 성령이 들어온 것을 똑같이 보는 것이다."며, "예수님을 GOD MAN의 첫 샘플로 보고, 우리 성도들도 결국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신화사상을 말한다"고 주장했다.

자료에서는 또, 이단시 되는 가계의 저주론을 그대로 믿고 있고 베뢰아 귀신론과 유사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는 것이 복음전파이다... 죄로 인한 병은 세가지인데 조상의 죄 - 우상숭배는 삼, 사대까지 이르는 병이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으며 의술로는 불치병으로 드러나게 된다."<류광수 목사 복음편지, 현장복음 중에서>

이처럼 류광수 목사는 한국교회와 함께 가고 싶다던 사과와는 달리 다락방 전도 방식을 수정하지 않고, 다락방교회도 해체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기총의 이단 해제가 한국교회의 전체 정서와 동떨어지고 졸속으로 이뤄진 것이란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셈이다.

한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지난 14일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 목사를 이단에서 해제한 것 대해 각 교단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총회장 정준모 목사)는 지난 16일 열린 임원회에서 "한기총의 이단 해제 결정과 상관없이 예장합동총회는 이단으로 규정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다"고 밝혔다.

예장합동총회는 지난 1996년 제81 총회에서 천사동원권,사탄 배상설,김기동 귀신론 유사 등을 이유로 류광수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한 바 있다.

또,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총회장 박정원 목사)는 '총회 유사기독교연구위원회' 이름으로 입장을 발표하고, "'류광수의 사상이 이단성 있는 불건전한 운동'으로 채택된 지난 1998년 연구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번 한기총의 이단 해제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고신총회는 또, 총회 산하의 교단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류광수 씨의 사상을 이단성있는 불건전한 운동을 규정한 총회의 기존 입장을 따라 줄 것을 권면했다.

예장합동총회와 예장고신총회가 류광수의 이단성을 재확인함에 따라 한기총의 이단해제에 대한 각 교단들의 반발이 뒤따를 전망이다.

CBS TV보도부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USA아멘넷



죄의 기본 개념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기독교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 성경에 관하여 ◈ 10. 죄 사람은 본래 상태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면 죄에 대한 성경 진리는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우선, 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요일3:4) 죄와 죄 아닌 것을 판단할 표준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다. 비록 인간 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죄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와 영광에 대한 모독이요 손상이요 침해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4) 죄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한 데서 나온다. 즉 죄의 원인은 불신앙과 교만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죄는 죄책(罪責, guilt)과 죄성(罪性,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죄책이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거나 그렇지 못하면 형벌을 받아야 할 법적 책임을 가리킨다. 죄성이란 죄악으로 향하는 실제적 성질, 즉 죄악된 경향성을 가리킨다. 죄는 이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죄는 죄악된 행위 뿐만 아니라 죄악된 마음 상태도 포함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아담의 첫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이었음(원죄)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처음 명령(창 2:16-17)을 어긴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죄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로 그 죄의 법적 책임(죄책 罪責)과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책과 죄성을 가진 죄인이다. 죄책(罪責)의 전가(轉嫁)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5:12-19에서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실상, 모든 사람)이 죽었고(15,17절) 정죄되었고(16, 18절) 죄인되었다(19절). 또한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이 사실을 확증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5-6) 죽음은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죄가 없어 보이는 어린 아기도 죽는다. 그것은 원죄의 사실을 증거한다. 죄성(罪性)의 전달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죄성도 그의 후손인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이 원죄의 죄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죄악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의와 선을 행하기에 완전히 무능하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17:9)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죄에는 형벌이 따름 죄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죄의 삯[보응, 형벌]은 사망이요.”(롬6:23) 이 죽음은 영적, 육신적, 영원적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사람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을 가리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둘째,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는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3:19)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 자손의 계보에는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하여 나오는데,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의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셋째, 사람은 죄로 인해 장차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회개치 않은 모든 죄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부수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의 수고와 고통, 그리고 땅의 저주도 사람의 범죄의 결과로 왔다. 창세기 3:1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을 것과 사람이 평생토록 땀 흘려 수고할 것을 선언하셨다. 또 그는 여자에게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것도 선언하셨다.(창3:16) 출처 : http://blog.daum.net/roadhistory/1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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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적 지도자들(Our Spiritual Leaders)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는 설교하고 치유하며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우리들을 주의 식탁으로 초대하며,
사랑의 서약으로 우리를 함께 묶으며,
사역을 위하여 우리를 파견하며,
우리가 병 들거나 죽을 때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며,
우리가 가치를 찾고 매일의 생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찾을 때 우리와 동행합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들에게 오신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면, 우리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장소와 모습에서 교회의 사역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아닌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토마스 왓슨

● 서평

오늘날 애석하게도 회개 없는 복음이 만연하고 있다. 아니면 거짓 회개를 참된 회개와 혼동하거나, 또는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를 바르게 분별할 수 없는 우리의 무기력함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아더 핑크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현실을 미리 내다보며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으로 비통한 오열을 토하게 될 것이다!”는 선지자적인 음성이 우리의 귀에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비행기의 양 날개와 같고, 한쪽이 없거나 부러졌다면 그 비행기는 결코 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에는 회개가 빠져 있다. 혹은 회개에 대해 말한다 해도, 회개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불신자들이 쉽게 믿음을 갖는데 방해가 된다거나, 또는 마음에 상처가 된다고 너무 염려한 나머지 그저 슬쩍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우선 믿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쉽게 믿는 믿음(easy-believism)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가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성경지식을 많이 쌓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회개없는 그러한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도 결코 한가지 죄라도 극복하는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개 없는 지식은 사람들의 지옥길을 밝혀주는 횃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지금 당장 자기 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해준다. 회개하기 전에는 어두운 구름과 폭풍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참된 회개는 밝은 광채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한다. 그 마음에는 잔잔한 평안과 행복이 넘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회개 없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으로 우리 자신의 회개를 점검해볼 것인가?

여기에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의 회개에 관한 놀라운 책이 있다.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에 대한 명쾌한 제시가 있다. 그리고 참된 회개를 권고하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회개의 화살을 무턱대고 쏘았지만 표적을 맞추게 해주사, 그래서 얼마간의 죄가 맞아 죽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심령을 울리고,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흐름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우리 모두의 간절한 기도로 승화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이종수)

● 요약본

1. 예비강화

나는 믿음이 먼저냐 회개가 먼저냐 우선순위를 놓고 논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회개는 먼저 그리스도의 생활 속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나는 믿음의 씨가 마음속에 먼저 역사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내가 믿음은 회개 전에 마음속에 씨눈으로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유는 회개는 은혜이므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떻게 영혼이 살겠는가? 그러므로 참회자의 마음속에는 먼저 얼마간의 믿음의 씨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죽은 회개이고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먼저건 회개가 먼저건 회개는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에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회개는 복음 아래서 요구되는 은혜이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율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첫 설교는, 아니 그의 설교의 첫마디는 ‘회개’(마 4:17)였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실 때에 남겨놓으신 고별사는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눅 24:47)라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 주장하였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막 6:12)

회개는 순수한 복음적 은혜이다. 행위의 언약은 아무런 회개도 용납하지 않았고, 거기서는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회개는 복음에 의해 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매입하신 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2. 거짓 회개

무엇이 참 회개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무엇이 거짓 회개인지 알아보겠다.
1) 회개의 속임수는 율법적인 공포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죄 가운데 지내왔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붙잡아 그가 얼마나 자포자기적인 위험한 짓을 감행해 왔는지를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고뇌로 가득차게 된다. 얼마 안가서 양심의 폭풍은 멎고 그는 평온해진다. 그러면 그는 얼마간 죄의 쓰라림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는 참다운 참회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속지 말라!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겁에 질린 죄인이 된다는 것과 회개하는 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2) 회개의 속임수는 죄를 안짓겠다는 결심이다.
사람은 결심을 하고 맹세를 하면서도 참회자가 아닐 수 있다. 사람이 병상에 있을 때 혹시 하나님이 자기를 회복시켜 주실까 하여 얼마나 확언을 잘하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알지만, 그는 예전에 똑같이 악하다. 그는 새로운 유혹 가운데서 옛날의 마음을 보여준다.
3) 회개의 속임수는 허다한 죄의 길에서 떠나는 것이다.
죄를 떠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죄가 사람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는 육욕을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을 포기하려 들 것이다. 죄는 포기할 수 있겠지만 회개함이 없이 그리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참다운 회개의 성격(Ⅰ)

다음에는 복음적인 회개는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겠다. 회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인데 회개로 인하여 죄인이 내면적으로 겸손해지고 가시적으로 개혁되는 것이다. 한층 더 상술한다면 회개란 다음과 같은 6가지 특수성분으로 구성된 영적인 내복약이다.
1) 죄의 발견
2) 죄의 슬픔
3) 죄의 고백
4) 죄의 부끄러움
5) 죄를 미워함
6) 죄에서 돌이킴

이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회개는 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성분 1: 죄의 발견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먼저 자기 죄가 무언지 깨닫고 깊이 생각해야 하며, 그리고 죄로 인해 적절히 겸손해질 수 있기 전에 그의 마음의 역병을 알아야 한다. 나는 추론하기를 죄의 발견이 없는 곳에는 아무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탐지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좋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 그런 것이 바로 죄인이 경우다.

성분 2: 죄의 슬픔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이는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고, 슬퍼하지 않고 회개할 수 있는 이는 자기의 회개를 의심한다(p19). 따라서 참다운 참회자는 자기의 마음을 슬피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시키려고 애쓴다. 이런 죄에 대한 슬픔은 피상적이 아니고, 이것은 거룩한 고뇌이다. 성경에서 이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불러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고 하였으며, 또 마음을 찢는 것이라 불러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욜 2:13)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슬픔이 다 참다운 회개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슬픔과 거짓 슬픔 사이의 차이는 샘에서 나는 단물과 바다에 있는 짠물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고후 7:9) 근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조건들이 있다.
1) 참다운 경건한 슬픔은 내면적이다.
이것은 마음의 슬픔이다. 또한 마음의 죄 즉 죄의 처음 발생과 용솟음에 대한 슬픔이다.
2) 경건한 슬픔은 솔직하다.
이것은 형벌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 범죄에 대한 슬픔이다. 하나님의 법이 침해당했으며, 그의 사랑이 악용당한 것이다. 이것이 영혼을 눈물로 녹인다.
3) 경건한 슬픔은 신뢰심이 두텁다.
죄에 대한 슬픔이 믿음과 섞인 것은, 마치 물을 머금은 구름 속에 찬란한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을 본 경험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슬픔으로 얼굴이 너무나 부어올라 자기 눈으로 밖을 거의 내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찔리운 아픔을 많이 느낄 때 우리의 놋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경건한 슬픔은 대단한 슬픔이다.
요시아가 죽던 날에 두개의 태양이 졌으며, 그래서 대대적인 장례식과 애통이 있었다. 그런 정도로 죄에 대한 슬픔은 끓어올라야 한다. 가장 깊은 마음 속으로부터의 탄식이다.
5) 경건한 슬픔은 어떤 경우 배상과 결부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배상이 없이는 용서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라티머는 연설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기침하여 토해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6) 경건한 슬픔은 영속적이다.
어떤 이들은 설교 때 쓰러져 울 것이지만, 이것은 4월의 소나기 같이 곧 끝나며, 또는 터졌다가 이내 다시는 멈추는 혈관과 같다. 참다운 슬픔은 계속적이라야 한다.

성분 3: 죄의 고백
슬픔은 너무나 격렬한 감정인고로 돌파구를 갖게 마련이다. 이것은 울음에 의해 눈에서 그리고 고백에 의해 혀에서 표출된다. 고백은 자기 고발인 것이다. 즉 나는 “범죄하였고”(삼하 24:17)라고 하였다. 겸손한 죄인은 자기 자신을 고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는 말하자면 재판석에 앉아 자기 자신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1) 고백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 고백은 샘에서 물이 나오듯 자유롭게 나와야 한다.
2) 고백은 양심의 가책으로 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깊이 죄를 분개해야 한다. 자연인의 고백은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듯 사람을 통해 지나갈 뿐이며 사람을 조금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참다운 고백은 사람에게 상한 심령의 감동을 남겨 놓는다.
3) 고백은 충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고백과 동행해야 한다. 위선자는 죄를 고백하면서도 그 죄를 사랑한다. 어거스틴은 회심 전에는 죄를 고백하고 죄를 이길 능력을 간구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내면으로부터 “아직 아닙니다. 주여”라고 속삭였다고 말했다.
4) 참다운 고백은 죄를 상세히 열거한다.
악한 사람은 자기가 일반적으로 죄인인 점을 인정한다. 악한 사람은 “주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적어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반면, 참다운 회심자는 자기의 세부적인 죄를 시인한다.
5) 참다운 참회자는 근원적인 죄를 고백한다.
그는 자기 성품의 오염을 시인한다. 우리의 성품의 죄는 선의 박탈일뿐 아니라 악의 주입이기도 하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쓸개와 쑥이 맺히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긍휼을 태어날 때부터 입게 만드는 것이다. 아아! 죄를 근원에서부터 고백하라!
6) 죄는 그 모든 전후사정과 가중죄와 함께 고백되어야 한다.
복음의 범위 안에서 범해진 죄들은 틀림없이 속속들이 염색되어 있다. 지식을 거스려, 은혜를 거스려, 맹세를 거스려, 경험들을 거스려, 심판을 거스려 지은 죄들을 고백하라. 이런 것들은 우리의 죄를 심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치명적인 가중죄들이다.
7) 죄를 고백할 때 우리 자신을 고발함이 하나님께는 변호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섭리가 혹독하고 피묻은 칼을 뽑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혐의가 없다고 해야 되고 그가 우리에게 부당 대우를 하지 않으셨다고 인정해야 한다.
8) 우리는 그런 죄들을 다시는 되풀이 행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자백으로 죄를 토해버리고 난 후에는 이 토한 것에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반역죄를 고백하고 나서 새로운 반역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어떤 왕이 용서하겠는가?

4. 참다운 회개의 성격(Ⅱ)

성분 4: 죄의 부끄러움
회개의 넷째 성분은 부끄러움이며, 그래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겔 43:10)라고 하였다. 마음이 죄로 검게 물들었을 때 은혜가 얼굴을 붉히도록 만들기 때문에,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 9:6)라고 하였다.
1) 모든 죄는 우리를 죄책 있게 하고, 그리고 죄책은 통상적으로 부끄러움을 낳는다.
2) 모든 죄에는 감사할 줄 모음이 많이 내포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워 할 일이다.
3) 죄는 우리를 벌거벗겼으며, 그것이 부끄러움을 일으킬 것이다. 죄는 우리의 거룩한 흰 세마포 옷을 벗겨버렸다.
4)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태양이 마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얼굴을 붉히듯 일식 때 얼굴을 가리는 것을 목격하고도 자기 얼굴은 붉힐 줄 모르는 자는 누구인가?
5) 우리가 범하는 많은 죄들은 마귀의 특별한 충동질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않는단 말인가?
6) 죄인들은 여우들(눅 13:32), 이리들(마 7:15), 들나귀들(욥 11:12), 돼지(벧후 2:22)에 비유된다. 한때 존엄성에서 천사들보다 조금 못했던 인간이 이제는 짐승들처럼 된 것이다. 우리의 죄는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고결하고 남자다운 정신을 빼앗아가 버렸다. 왕관은 우리 머리에서 떨어져 버렸고,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었고, 이성은 이지러졌으며, 양심은 둔화되었다.
7) 모든 죄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울 것이다.
8) 우리들의 얼굴을 붉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범하는 죄들을 이교도들의 죄보다도 훨씬 더 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빛을 거스려 행동한다.
9) 우리의 죄는 마귀의 죄보다 더 악하다. 타락한 천사들을 결코 그리스도의 피를 거스려 죄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으며, 그의 공로의 약은 결코 그들을 치료하기로 작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불신앙으로 그의 피를 모욕하였으며 깔보았던 것이다.

성분 5: 죄를 미워함
회개의 다섯 번째 성분은 죄의 미움이다. 죄에 대한 참 미움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사람의 영이 죄에 대항할 때
혀가 죄를 향해 맹렬히 비난할 뿐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질색하는 것, 그래서 아무리 교묘하게 죄가 착색되어 보인다 하여도 그 추악함을 간파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참다운 미움은 보편적이다.
- 미움은 기능면에서 보편적이다. 다시 말하면 판단에서 뿐 아니라 의지와 정서에서도 죄를 싫어함이 있다.
- 미움은 대상면에서 보편적이다. 한 가지 죄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 위선자들은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다소의 죄들을 미워하겠지만, 참 회심자는 모든 죄들, 유리한 죄들, 허울 좋은 죄들, 바로 부패를 부추기는 것들 그 자체를 미워한다.
3) 죄에 대한 참 미움은 모든 형태의 죄에 대한 것이다. 거룩한 마음은 죄를 그것의 본질적인 오염 때문에 혐오한다. 죄는 영혼 위에 오점을 남겨 놓는다. 중생한 사람은 저주 때문 뿐 아니라 감염 때문으로도 죄를 혐오한다.
4) 참 미움은 인정 사정이 없다. 이것은 죄와는 이 이상 도저히 화해되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화해되겠지만 미움은 그렇지 못하다.
5) 참다운 미움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반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죄도 반대한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못하였다(계 2:2). 바울은 베드로가 비록 사도였지만 그의 허위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였다.

성분 6: 죄에서 돌이킴
회개의 여섯 번째 성분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참다운 회개는 질산처럼 죄의 쇠사슬을 산산이 부식시킨다.
1) 마음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전인적인 마음으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바라신다.
2) 모든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참회자는 죄의 길 밖으로 돌이켜서, 모든 죄를 버린다.
3) 영적인 이유로 인한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죄의 행동을 억제하면서도 올바르게 죄에서 돌이킬 수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다운 참회자는 신앙적인 원칙에 의해, 이를테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죄로부터 돌이킨다.
4)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참다운 회개에서는 바늘이 북극을 가리키듯 마음이 똑바로 하나님을 향한다.
5) 참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죄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본국을 버리는 것과 같이 다시는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다.

5.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들, 완악한 자에 대한 경고를 곁들여
다음에는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들에 대해 계속 말하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
회개는 재량권이 아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선택권에 맡겨지지 않았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하늘 나라의 최고 법원에서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아무 죄인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셨고, 그는 손수 만드신 자신의 법을 어기지 않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순경한 성품은 회개치 않는 피조물과의 친교를 거부한다.
죄인이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과 죄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회개하기 전의 죄인과 평화롭게 지내신다면 하나님은 죄인이 저지른 모든 짓을 좋아도 하시고 승인도 하시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에 역행하게 될 것이다.
3) 계속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범위 밖에 있다.
그리스도는 임금과 구주이시지만 사람들이 회개하건 안하건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구원하는 구주는 아니시다. 마치 왕은 반역자들이 회개하고 자기들의 군주의 자비를 바라고 투항하면 용서해주고, 만일 공공연히 도전하기를 끝까지 고집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우리는 죄로 하나님께 해를 끼쳐 드렸다.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께 해를 끼쳤으며, 우리는 그의 영광을 가렸었다. 우리는 그의 법을 위반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마땅히 어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우리는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
5)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을 회개하지 않아도 무차별 구원하신다면, 그러면 이 규칙에 준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야 한다.
이것은 인간들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구원하셔야 하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택함과 유기의 명령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6. 회개를 촉구하는 엄숙한 권고

1) 회개는 필수적이다.
회개는 하나의 자격으로서 요구된다. 회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사랑받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사랑받으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죄의 쓴맛을 알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단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
2) 회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 이것은 높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높은 사람들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친다. 지도자들의 죄는 선도적인 죄이며, 따라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
- 회개는 나라 안의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속임수 쓰는 패거리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교양인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위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하나님의 친 백성, 참다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참 이스라엘인들에게 필수적이다.
3) 회개는 모든 죄에 대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원죄에 대해 주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며 애통하자.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저 순수한 영혼의 본질적인 상태를 잃어버렸고, 우리의 성품은 부패로 오염되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감정의 부패를 통탄하자. 우리는 자범죄를 주님 앞에서 엄숙히 회개하자.

7. 회개의 강력한 동기들

1) 마음의 슬픔과 감동은 우리의 모든 거룩한 의무에 잘 어울린다. 죄 덩어리로 굳어진 마음은 아무 짝에도 못쓰지만 이것이 회개하여 녹아질 때 이것은 쓸모 있게 된다, 녹는 마음은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녹는 마음은 순종하기에 적합하다. 회개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의지에 찬성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2) 회개는 귀하게 받으심 직하다. 주님은 튼튼한 마음보다 상한 마음을 존중하신다.
3) 회개는 우리의 모든 봉사를 하나님께 상달케 한다. 경건한 슬픔의 쓴 나물로 조미한 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다. 또한 죄의식으로 감동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 기도도 하나님의 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4) 회개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어떤 이들은 지식을 축적해 가지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회개없이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한 가지 죄를 극복하는 것이 모든 신비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낫다.
5) 회개의 눈물은 향기롭다. 회개는 그 자체는 쓰라리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달콤한 것이다. 회개는 내면적인 평화를 가져온다.
6) 큰 죄도 회개하면 긍휼을 얻을 것이다. 큰 죄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을 때 용서를 얻었다.
7) 회개는 영적 축복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회개는 우리를 은혜로 풍요롭게 하는 구실을 한다.
8) 회개는 현세적인 축복도 맞아들인다. 회개는 모든 축복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며, 이것이 황금의 수확을 가져오는 것이다.
9) 회개는 땅위의 심판을 예방한다. 하나님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실 때, 참회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제지시킨다.
10) 회개는 하늘나라에 기쁨이 된다. 찬양은 하늘나라의 음악인 것처럼 회개는 하늘나라의 기쁨이다.
11) 우리 죄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생각하라.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깊이 생각하면 우리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게 될 것이다.
12) 회개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모든 고난의 목표가 된다. 그것이 몸의 병이 되든지, 또는 재산상의 손실이 되든지 그는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각성시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13) 우리의 애통의 날들을 곧 끝날 것이다.
14) 회개에 뒤따르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보상. 회개는 육신적인 부위에게 쓴 것 같지만 달콤한 열매를 보라. 그것은 영생이다.
15) 회개의 마지막 동기는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8. 신속한 회개를 권고함

하나님은 자기들의 인생의 청춘과 전성기를 성별해 드리는 젊은 시절의 참회자들을 사랑하신다.
1) 지금은 회개의 시기이며, 만사는 제 시기에 이루는 것이 최상책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참회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마음을 가지셨으며, 그는 지금 주실 여유가 있으시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날이며, 지금은 하나님께서 평화의 백기를 내거시고 죄인들과 기꺼이 담판하신다.
2) 당신은 더 속히 회개할수록 그만큼 더 적은 죄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3) 속히 회개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우리가 적시에 죄에서 돌이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생애의 첫 열매를 드리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소비하며 또 소비된다.
4) 회개를 더 오래 끌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지연은 위험을 초래한다. 회개를 지연시키고 연기시키는 것이 위험한 것은 곧 만료될 세 가지 날이 있기 때문이다.
- 복음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 사람의 개인적인 은혜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 생명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9. 회개의 시험기준과 참회자가 얻는 위로

누가 회개하였노라가 말할 때, 그것은 참된 회개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험기준은 다음과 같다.
1) 회개의 시험 기준
- 조심하기: 모든 죄의 유혹을 조심해서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을 청산하기: 죄가 자기의 양심 속에서 곪아 터지도록 놔두지 않고 자신을 판단한다.
- 분개: 죄를 가지고 마음에 노심초사하는 상태를 말한다.
- 두려움: 회개하는 영혼은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총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 열렬한 갈망: 죄를 이기는 권능을 갈망하며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 열심: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이 고무된다.
- 복수심: 참다운 참회자는 거룩한 적의를 가지고 자기의 죄를 추격한다.
2) 필요한 권고
로마 카톨릭은 회개를 성례로 삼고, 회개를 공로로 삼는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용서의 공로를 쌓을 수 있다. 비록 회개가 죄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데 도우미 되지만, 그래도 죄의 죄책성을 씻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다. 회개를 우상화하지 말라.
3) 회개하는 죄인에게 주는 위로
-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다.
- 하나님은 대사면령을 승인하실 것이다. 죄를 용서해주시되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고 하였다.
- 양심은 이제 화평을 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은 기도 가운데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를 심판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바라볼 수 있다.

10. 회개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에는 10가지가 있다.
1)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2) 교인들은 회개하는 것을 쉬운 일로 상상한다.
3)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주제넘은 생각
4) 무기력하고 나태한 기질
5) 죄의 근질근질한 쾌감을 좋아함
6) 회개는 기쁨을 없애버린다는 생각
7) 또 다른 회개의 방해물은 마음의 낙담이다.
8) 하나님이 그냥 처벌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9)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
10) 과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11. 회개를 위한 방법적 처방

1) 죄가 무엇인지 심각히 생각해 보라.
- 모든 죄는 하나님에게서 물러가는 것이다.
- 죄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 죄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 침해이다.
- 죄는 심층적인 무지이다.
- 죄는 더러움으로 뒤범벅이 되게 한다.
- 죄 속에는 흉악한 배은망덕이 있다.
- 죄는 손상이다.
- 죄는 짐이다.
- 죄는 영적 질병이다.
- 죄는 노예화이다.
- 죄는 영적인 죽음이다.
- 회개 없는 죄는 최후의 지옥 파멸로 향해 있다.
2) 회개를 이루기 위한 둘째의 심각한 고찰은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군주의 관대함이 흉악범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심판으로 몰아치는 동안 줄곧 당신에게는 그의 긍휼로 구애해 오셨다.
3) 세 번째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고난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라.
4)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얼마나 많은 것을 책임지게 될지 깊이 생각하자.
모든 설교가 고발장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깨끗이 씻어줄 것이며, 값없는 은혜의 두루마기가 우리를 덮어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마지막 날에 모두 보고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직접 그것들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12. 회개를 위한 방법적 처방

만일 누가 회개한다면 당장 그는 자기 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의 것이고 모든 것이 평화다. 따라서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를 떠나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회개하기 전에는 구름과 폭풍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얼굴에는 구름이요 양심에는 폭풍이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얼마나 날씨가 바뀌는가! 위에는 얼마나 빛나는 햇빛이! 안에는 얼마나 잔잔한 평온이 넘치는가!

 

 

 http://cafe.daum.net/khc23467

 

 


 

베니 힌 목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벨탑에 갇힌 복음

행크 해네그래프 지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제1부 진리를 신화로 바꾸다 33
1장 이단인가 이단적인가? 43
이단은 어떻게 되는가? 44 | “이단적인” 과 “이단”의 차이 47 | 오류들의 극과 극 48
2장 은사운동인가 이단운동인가? 51
3장 믿음운동의 핵심 인물들 55
이섹 윌리엄 케년 59_케네스 해긴 61_케네스 코플랜드 68_베니 힌 72_조엘 오스틴 83_

조이스 마이어 91_존 해기 98_크레플로 달러 104_T. D. 제이크스 110_로드 파슬리 114_

프레데릭 K. C. 프라이스 119_존 아반지니 122_로버트 틸튼 125_마릴린 히키 128_찰스 캡스 130_

제리 세이빌 133_모리스 설루로 135_폴 크라우치 137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0158502AL

 

 

 

[책 소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 Counterfeit Revival

행크 해너그라프 저   

부흥과개혁사, 잘못된 기독교 분별시리즈 06  

 

이 책은 존 윔버, 베니 힌, 존 아놋, 밥 존스, 마이크 빅클, 릭 조이너 등 거짓 부흥 운동 지도자들의 비성경적인 주장과 행동을 통해, 성령 운동의 3의 물결이라 불리는 빈야드 운동과 최근 신사도 운동 등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기독교 왜곡 현상을 보여 준다.

http://www.rnrbook.com/

 

 

TBN 창설자인 폴 크로치는 치유 전도자 베니 힌의 얼굴에 금가루가 덜어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외쳤다.

"저 금가루는 분명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폴 크로치는 계속해서 이렇게 외쳤다.

"하늘 문이 빠끔 열려서 길거리의 먼지 일부가 베니 힌의 얼굴에 떨어진 것이다."

베니 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예배 가운데 모든 성도에게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의 영혼을

채우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나타나신 것처럼 이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베니 힌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내면 깊은 곳에서 케냐 나이로비에서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집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제 예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몇몇 교회와 집회 그리고 수많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원하십니다."

 

행크 해너그라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부흥과개혁사, pp22-23. 

 

 

은사운동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지금도 다 계속되고 있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었었고 베니 힌이 한 예이다.

그는 미국의 TBN 방송프로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TBN을 보다가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며 장례식을 취소할 것이며

죽은 자들을 관째 가지고 와 텔레비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만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수천명씩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김효성, 현대교회문제, 옛신앙, p86.

 

 

로마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의 미신으로 변질시켜버리게 된 주된 원인은

그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자들을 앞세워 기복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르친 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계의 지도자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몇몇 인물들은

지금도 성도들의 헌금을 남용하며 화려하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부패한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됨으로써 현재 미국 의회의 조사대상이 되고 있는 베니 힌(Benny Hinn)과 같은 인물을 초청하여

대형 은사집회를 여는 등 성도들의 영성을 개발한다는 명목 하에

개신교 내에서 신비주의를 조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http://christianherald.tv/WZ_NP/section/view.asp?seq=1031&tbcode=SEC12

 

 

신사도운동(NAR) 사역자들은 예언과 신유 운동을 일으키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는데
그들 중 몇은 부끄러운 추문을 남겨놓고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1980년대 말에 대예언자(great prophet)로 알려진 폴 케인은 술중독과 마약으로 말년을 보냈으며
피터 와그너가 ‘사도’로 임영한 테드 해거드 목사는 동성연애자로 작년에 교회를 사임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드 베이커는 47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유사역자로 소문난 베틀리, 신디 제이콥스, 베니 힌, 릭 조이너..등이 중심이 되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일곱 권역으로 나누고 중보기도 운동을 통해 신사도운동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http://www.sjcentral.org/central/main.asp?content=contents/freeboard/freeboard.asp&fbaction=showandlist&keepsession=yes&menu=sermon&posttype=pastorcol&viewid=8473

 

 



베니 힌 목사는 '안녕하세요 성령님' 이라는 책의 저자입니다.

 

 

 

 

 

베니 힌 목사는 여러 차례 한국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베니 힌 목사 성령컨퍼런스 성료

국민일보|입력2005.10.18

 

세계적인 복음주의 부흥사인 베니 힌 목사가 지난 14∼16일 서울 여의도와 잠실,인천 주안교회 등에서 2만여 성도가 모인 성령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이번 컨퍼런스는 전국 각 지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대거 참석해 영성을 재충전하고 사역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 됐다. 참석자들은 베니 힌 목사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설교에 감동했고 기쁨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렸다.

http://media.daum.net/culture/art/newsview?newsid=20051018154019726

 

 

 

 

12만 성도들, 잠실벌을 뜨겁게 달구다

크리스천투데이 2007.10.19

 

19일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회개와 영적각성을 위한 기도대성회’가 열렸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주최로 열린 이번 대성회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12만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영적 회개와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주강사로 조용기 목사가 나섰으며 그 외에도 베니 힌 목사, 리처드 버날 목사, 헤롤드 카발레로스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http://www.chtoday.co.kr/view.htm?id=188208

 

 

 

 

 

 

 

행크 해너그라프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에서 베니 힌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가짜 부흥 운동에 걸려든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처음 그들을 끌어들인 주변의 압력은 그들이 영적인 거젓에 동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베니 힌이 주관하는 화려한 텔레비전 쇼에 참여했던 명망 있는 은사 운동 지도자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힌이 사람들을 '영적 능력으로' '마구 쓰러뜨리더니' 갑자기 이 사람이 있는 쪽으로 왔다. 그에게 손을 뻗으며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하고 소리쳤다. 즉시 이 사람은 뒤에 있던 '잡아 주는 사람' 쪽으로 쓰러졌다.

나중에 이 사람은 그날 자신이 한 경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주변의 압력 때문에 그는 일부러 쓰러지는 척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명망 있는 은사 운동 지도자가 카메라맨에게 자신이 일부러 쓰러진 장면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자, 카메라맨은 낄낄거리며 그렇게 일부러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힌과 마찬가지로 가짜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르도록 집단 압력을 이용한다. 힌은 사람들에게 결과는 상관하지 말고 그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강요한다.

 

행크 해너그라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부흥과개혁사, pp406-407

 

 

 

 

 

'쓰러뜨림'은 가짜 부흥 운동의 여러 가지 현상 중 하나입니다. '쓰러뜨림'을 실시하는 목회자가 '쓰러뜨림'이 가짜 부흥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생활


조엘비키 박사_청교도 개혁신학원 학장


2008년도 합신 목회대학원 여름강좌에서 ‘청교도의 신학과 설교’라는 주
제 아래 진행된 조엘비키 박사의 강의 중 일부를 요약쪾발췌한다.
-편집자 주-



성경의 가르침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
강력한 칼빈주의 기초한 예배 중심 생활해


보통 많은 사람들이 퓨리탄(청교도)은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이었다.
1560년에 시작된 퓨리탄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당
시의 교회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여겼다. 그녀는 아직도 교회
가 덜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퓨리탄이라는 이름은 비난하는 이름으로 쓰여졌다. 청교도의 아버지 퍼킨스
는 이를 두고 악한 정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인 단어였다. 청
교도들은 청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 중 어떤 사람은 언약 사상이 핵심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회심
이 중심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예정하시는 하나님이 중심이라고 한다. 하지
만 청교도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성경 신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I.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청교도들의 모든 신학적인 면을 함축하고자 하면, 칼빈의 신학 사상을 하나
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청교도의 사상을 정의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
다. 그러나 청교도를 정의할 때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이 다음 5가지 영역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읽고, 설교하며 그 말씀대로 살았
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확신을 가지
고 살았다. 그 안에 담겨진 어떤 주제를 선정하여 성경에서 발견된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적용하려 하였다.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러한 부류는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그토록 관심 있어하던 사람
들이었음
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말씀으로 적용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2. 열정적인 삼위일체의 신학을 가졌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도들의 삶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
떤 사람들은 청교도가 내면적인 것을 중시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개인
의 경험을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커는 이들
이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경험으로 이것을 종결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모든 목적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는 것이었음을 갈파했다.

3. 교회의 유용성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
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경에 부합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
므로 이들은 설교에 대해 복잡하지 않고 마음에 담는 설교를 강조하였다. 그
러므로 모든 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였고 예배
의 개혁을 추구하
였다.
특별히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간략한 예배로 돌아가는 일을 시행하였
다. 제정된 예배 의식을 주장하였는데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것 이외에
는 어떤 추가적인 것도 수용하지 않았다. 동시에 교회의 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교회의 덕을 위해 교회는 신약교회와 한 선상에서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4. 어떻게 한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당시 시대의 정황 가운데서의 위기가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갖게 하
였다. 왕이 어떤 권한이 있는가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고, 의회는, 시
민들은 어떤 권리가 있는가를 알기를 원했다.

5. 개인의 신앙에 대해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개개인이 중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장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부딪히도록 그들의 의식을
자극하고 죄인들에게 경각심을 주라 하였으며 모든 이들이 믿음으로 회심할
것을 말하였다. 개개인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그들을 더 성숙하게, 그래
서 그들이 과연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주제로 많이 다루었다. 매

의 삶 가운데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다.
윌리암 구즈는 <가정 내에서의 의무>라는 책을 통해 어떻게 설교를 적용하
며, 참된 신자로서 예배하며, 직장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사회의 일원으
로 어떻게 살 것인가… 즉 모든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자로서의 삶을 살
것이며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사고까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야 한다고 강
조했다.




선포된 설교는 기록하여 실생활에 적극 적용
설교에 대한 건설적 비평 설교자와 나누기도



II. 청교도들이 가졌던 관심들

청교도들의 특성은 당시 영국의 사회 속에서 그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
결을 위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적 설교
당시 그들은 말만 무성한 설교에 대해 식상해하고 있었다. 교리는 강하고 능
력이 있어야 하며, 백성들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경건의 필요성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성경적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의 필요성을 중시했다.

3) 성경적인 단순성
특별히 모든 교회의 삶에 연관된 부분에 있어서 단순성을 추구했다. 만일

교도들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그들은 요즘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예배
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교리적으
로 청교도는 강력한 칼빈주의에 기초했다. 둘째, 경험적인 면에서는 따뜻하
고 힘이 있었다. 셋째, 복음적인 면에 있어서는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 넷
째, 교회적인 면에서는 하나님 중심이었고 예배를 중시했다. 다섯째, 정치적
인 부분은 성경적이었으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청교도들의 10가지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
써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점을 공헌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실제적으로 생
각해 볼 때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이해한다면 청교도들에
대한 기본적 서론이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제시된 10가지의 서론
이 끝난 후에는 이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도 설명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살아야 하는 방향

어떤 분이 말하기를 성경 66권의 책들은 성령님의 서재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방편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신 편지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신분으로 아들
에게 주는 것으로 자식의 삶을 훈련,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어떤 청교도는 말했다. “모든 성도들은 매일매일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누
구든 숨겨진 보화를 찾는 심정으로 읽고, 읽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잘 준비
해야 한다. 묵상하고 읽은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삶속에 적
용해야 한다. 믿음으로 기도로 행동으로...”
토마스 왓슨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전에
는 영적인 배고픔을 가지고, 준비된 마음으로 영향을 받을 준비를 가지고,
그리고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
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집에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모습을 계
속 유지하도록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청교도의 설교는 적용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많은 청교도
들은 말씀을 잘 기록했다. 특별히 부모들이 설교 말씀을 열심히 기록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 후에 저녁에 자기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다시 설명을 했다. 이런 점에서
한 주간에 가장 중요한 행사가 설교였다.
청교도들은 주일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시장이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시장
에 가서 음식을 사와서 한 주를 살았었는데, 마찬가지로 주일날 교회에 가
서 영적인 음식을 잘 쌓아두었다가 한 주를 살았다.
우리의 믿음과 행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리처
드 백스터가 <성도들의 삶의 규례>라는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썼는데, 어
떻게 성도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
운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상
황 속에서 어떻게 양심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핸리 스미스는 “통치를 받아야 할 모범, 규례로 성경을 두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만 믿고, 설명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
이 말씀이 금지하는 것을 증오하고, 그밖의 모든 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
고 했다.
청교도들의 책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히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들은 하박국이나 레위기를 읽는 것을 복음서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읽었다.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읽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살려고 했다
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교리와 실제적인 삶의 연결

이를 위해 3가지 일을 했다.
1) 마음을 향해 설교했다.
마음은 믿음의 궁전이라 생각했다.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척추가 없는 사람
과 같다. 개인의 경험에 대해 강조한 만큼이나 그들은 반지성적 복음이 결국
은 공허한 복음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성도들이 믿는 것
과 불신자들이 믿는 것이 유사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성도들이 은혜교리에 대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
는 “은혜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성도와 불신자가 차이가 없
을 것”이라고 말했다.

2) 양심에 대한 정면 대결
청교도들은 설교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무화과 뒤에 숨었던 아담처
럼 죄로부터 숨어 있는 성도를 잘 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죄를 잘 드러내
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세워
야 한다고 말했다.
3) 따뜻한 사랑
그들의 설교와 글을
통해 이렇게 양심을 정면 대결할 뿐 아니라 따뜻한 사랑
으로 접근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 맡겨준 영혼들, 그래서 예
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요소와 장엄성에 대해 그들은 항상 열려져 있었다. 그
들은 성도들에게 예수님께 와서 더 사랑하고 충실한 삶을 살고 그러한 삶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었다.

3. 예수 그리스도 중심

토머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요약한 분이다”고 정의했다. 앰브
로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영혼이자 그 범위다”라고 말했다. 그들
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했다. 새무엘 러더포드는 “만일 이 세상의 모
든 낙원을 하나로 통합하여 모든 좋은 것을 한 곳에 모아 둔다 해도 그리스
도의 아름다움과 비교했을 때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토마스 굿윈은
“천국에 가지만 그곳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곳은 지옥과 같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청교도의 글을 더 읽도록 하라.

4. 어떻게 역경을 성경적으로 이기는가를 강조

보통 “Happy New Year”라고 인사할 때 앞으로는 역경이 없기를 바라는 마
음으로 한다. 하지만 청교도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
고 인사했다. 이것은 어려움과 역경을 주실 때 이 역경을 통해 당신이 더 성
화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선물로 여겼다. 고난은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
을 더 의존하고, 죄가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고, 하나님께 인도하는 효과가
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에게로 더 잘 이끄신다고 말했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형을 잘 그려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그들은 이 고통으로 성화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두 세계를 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제


하나는 도래하지 않은 세계,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살
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미래에 초점을 두고 있는 눈은 바로 이
세상의 초점에 의해 제어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성이라
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여기서 성도가 어디로 여행하고 있는가? 그것
은 영원으로 가는 여행이다. 그 길에서의 모든 경험은 최종의 목적인 도피성

으로 가는데 방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 영원을 준비하
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배우는 제일 중요한 주제라 했
다.
특별히 모든 죄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
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나라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묵상할 때 천국
은 그들이 선호했던 주제였다. 그들은 진정한 천국을 자기 집으로 삼았다.

6. 어떻게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성도의 행동을 해야 하는가

청교도들은 행동을 중시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모토 중 하나였던 “기도하
고 일하라”를 강조했다. 물론 기도를 제일 중시했다. 어떤 청교도는 친구에
게 말하기를 “내가 내일 할 일이 많은데, 그래서 오래 기도해야겠다”고 했
다. 청교도들에게 기도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존 번연은 “기도한 후에 더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
하기 전에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는 행
동을 추구했다. 그들은 수동적 경건이 아닌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경건을 가
졌다. 그들은 모든 삶의 영역을 마음에 두고 살았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

을 위해 살았다.

7. 성경적인 가족 생활

가정이 평안할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혼인 지침서로, 가정 지침서로 성경
을 삼았다.

8. 영적인 형제애

성도들간의 공유되는 친교를 말한다. 목사는 잘 조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들은 같은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하고 성도들과 서로 건설적 비
평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만나고 목회의 어려운 점을 나눴다.

9. 강단을 회복하는 것

위대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설교자 자신이 주님과 아주 좋은 관계
를 맺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어떻게 설교자로 살아
가야 하는가?”를 강조했다.

10. 오직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모든 것을 언약의 관계로 이해했다. 또 한가
지 부가적으로 믿었던 것은 ‘교회 언약’, 즉 성도들의 교제를 이야기했
다. 혼인은 신부와 신랑의 언약의 관계로 이해했고, 언약과 모든 관계를 하
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이해했다. 이것이 삶의 목적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 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구원에 대해 확
신하던 그 순간이다. 하
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나의 모든 것을 잊
어버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시는 것이다”라고 했다.
삼위에서 한 분, 한 분을 강조했고 이러한 것을 근거로 이렇게 질문했다.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내가 성장하
고 있는가?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이는 지금 우리 교회에 적용할 수 있고 우리의 영성을 위해서도, 개인의 성
장을 위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정리 | 주재형 전도사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document_srl=5268




예장합동 "WCC와 다락방 건, 기존 입장 고수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기총의 WCC 공동선언과 다락방전도운동 류광수의 이단해제 결의에 대해, 예장합동 임원회는 한기총의 결정과 상관없이 기존 교단의 입장을 고수한다고 밝혔다.

 
▲예장합동 임원회는 최근 논란이 된 한기총의 WCC 공동선언과 다락방 이단해제 결의에 대해 총회의 기존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뉴스미션

총회 임원회 "30일 실행위원회에서 구체적 사안 다루겠다"

예장합동 총회 임원회(총회장 정준모 목사)가 16일 오전 11시 대치동 총회본부 4층에서 비공개로 임원회의를 열고, 교단의 당면 현안에 대해 4시간 넘게 논의했다.

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오는 30일 오전 11시 총회본부에서 실행위원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임원들은 이번 실행위원회에서 △97회기에 상정됐던 긴급동의안 처리 △총회 관련 법적 대응 건 △교단지인 <기독신문> 등 기타 언론에 관한 건 △97회 총회 사태 진상규명의 건 △총회장과 총무 의혹 진상 규명의 건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임원회의가 끝나고 황규철 총무는 기자 브리핑을 통해 "총회 시작 전부터 후까지 총회가 소란하게 되기까지의 원인과 동기를 밝히고 원인자 조사와 규명을 실시할 것"이라며 "그동안 오해가 있었다면 해명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최근 한기총의 WCC 공동선언 및 다락방 류광수의 이단 해제 결의와 관련해 황 총무는 "한기총에서 이뤄진 사실임을 직시하고 본 교단은 총회의 과거 결의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황 총무는 "한기총은 연합단체로서 단체 입장과 형편이 교단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합동 총회는 과거의 입장을 고수한다"며 "이 사안은 실행위원회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지는 않았으나 기타 안건으로 재론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예장합동은 대표적인 보수 교단을 자처하며, WCC 부산총회를 강력히 반대해왔다. 정준모 총회장 역시 반대 입장을 강하게 피력해왔던 터지만, 합동 총회가 소속된 한기총의 WCC 협력 결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었다.

한편 임원회는 하루 전인 15일 총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가 노회장 회의를 갖고 내달 19일 비상총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한 것과 관련해 황 총무는 "실행위원회에서 총회 사태 진상 규명을 통해 논의될 것"이라며 "많은 노회장들이 모였다 하더라도 법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비중 두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임원회는 총회 발전을 위한 기획 '2050 3R 정책', 5월에 예정된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등 교단 차원의 행사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노회장 비상대책위원회 등 총회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은데, 총회 지도부는 이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어 교단 전체의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우려를 낳고 있다.

윤화미 ⓒ 뉴스미션/USA아멘넷
긍휼의 권능(The Authority of Compassion)
 
교회는 종종 우리들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종교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말로써,
그리고 명령으로써 우리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바로 우리의 종교가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적인 감수성은 쉽게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목사와 성직자들은 그들의 비판적인 말,
거부하는 행동, 또는 참을성 없는 행동이 이러한 말과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한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생명의 의미에 대한 갈망, 평안함과 위안에 대한 갈망,
용서와 화해에 대한 갈망, 그리고 회복과 치유에 대한
갈망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종교적인 귄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긍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권능은 긍휼에 나타나 있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별하는 점검 - 리차드 백스터 좋은 글들

다음 기준으로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  

1)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가?

2) 우리는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주와 구세주로 모시는가? 

 

이제 당신이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두 가지의 기준을 말하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와 주로 진심으로 모시는가 하는 것이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모든 영혼들은 그들의 최고 행복을 하나님께 둔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충만하게 그리고 영화롭게 즐거워함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며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 및 악한 우상 숭배자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참으로 영광의 주를 즐거워하는 것을 당신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가? 당신은 “주께서는 저의 분깃이니 하늘에서 제게 주 밖에 누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제가 바라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영원한 안식의 상속자라면 그 안식은 지금 당신과 함께 한다. 육체의 쾌락이 당신에게 애걸하고 세상이 당신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해도 당신이 일반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내리는 유력한 결정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선호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당신의 소원과 노력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당신이 듣고 기도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 즉 주를 구하고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확인한 후 지금 그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당신에게 마땅한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구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가장 중요한 소망이며 수고의 이유다. 따라서 이것보다 더 바라거나 좋아하는 것은 없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고난을 당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가 쇠잔할 때는 당신은 그 모든 과정을 뚫고 지나갈 것을 다짐한다. 당신은 영원한 안식을 대단히 귀히 여기며 매우 좋아한다. 따라서 당신은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자격이나 그 소망과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한 편으로는 세상적인 영원한 즐거움을 두고 다른 편에는 성도의 안식을 두고 당신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당신은 세상을 거절하고 이 안식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중생을 통해 거룩하여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 당신의 입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아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는 세상이 당신의 최고 소망이며 당신이 노력하는 최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 당신의 가장 큰 관심과 수고는 명성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죽은 후에는 세상을 위한 당신의 수고와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당신은 한 번도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뛰어난 영광을 인식한 적도 없고 마음이 끌린 적도 없으며 그것을 위해 온 맘을 다해 수고한 적도 없다. 혹시 하늘나라를 구실로 하여 조금이라도 수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즉, 하나님은 당신에게 세상보다 못한 쓰레기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은 세상에서 실컷 쓰고 남은 찌꺼기 시간과 수고를 드릴 뿐이다. 당신은 이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열심을 내며 반갑게 맞이했으나 하나님을 위해 남는 것은 냉담과 무관심 밖에 없다. 당신이 만일 세상을 붙들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천국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때가 오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신은 하나님의 법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복음의 원칙마저 거절할 것이다.  

 

당신에게 그리스도 또는 당신의 세상 행복을 버려야 하는 시험이 오면 당신은 세상보다는 천국을 포기할 것이며 세상 행복을 위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땅에서 건강하고 부요한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해 준다면 당신은 그 상태를 천국의 안식보다 훨씬 좋다고 여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천국을 구하든 말든 당신은 이 땅의 부요함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며 따라서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당신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은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 것 외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와 주로 모셨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기준은 율법의 첫째 되며 가장 큰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를 요약한 것이고, 둘째 기준은 복음의 명령,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를 요약한 것이다. 이 두 기준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경건과 기독교의 전부다. 이 두 기준은 단지 믿음의 정의일 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구세주라는 사실에 동의하는가? 당신의 의무나 행위는 주께 순종하기 위한 지정된 수단일 뿐 당신에게 구원을 주는 구세주는 아니다. 즉, 당신의 의무나 행위는 조금이라도 율법의 저주를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율법적인 의나 그 부분이 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만을 의지하기로 동의하는가? 당신은 또한 주님을 당신의 유일한 왕이요 주로 모심으로써 그의 법과 성령에 의해 통치를 받고 인도함을 받기로 동의하는가? 주께서 아무리 어려운 의무를 맡겨도, 당신의 육체의 정욕들을 대항하는 명령들을 내리실지라도 당신은 주를 순종하기로 동의하는가? 

  

당신은 이와 같은 다짐을 지키지 못할 때 슬퍼하겠는가? 당신의 기쁨은 주께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 있는가?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주와 선생을 바꾸지 않겠는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에 진심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위선자라면 훨씬 달라진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와 구세주로 부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이 없더라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당신은 주를 찾고 신뢰하고 그분께만 구원을 두는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 당신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당신의 주로 모셔 당신을 통치하도록 동의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께 당신의 영혼과 삶을 인도하시도록 맡긴 적이 없다. 또한 주의 말씀을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규칙으로 삼은 적도 없다. 물론 당신은 당신이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죽는 그 날까지 당신의 명성과 쾌락과 다른 세상적인 목적을 추구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당신에게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다면 당신은 말씀과 성령보다 세상과 육체를 훨씬 더 추구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과 모습은 때때로 당신의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보일 때가 있지만 전반적인 당신의 모습과 행동은 주로 세상을 택할 것이다. 이는 당신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록 말로는 주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주를 부인하는 사람이니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 신자가 아니라 단지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딛 1:16)이다. 이들은 성도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질문할 때 특히 마음의 동의 또는 의지를 강조하는 점을 염두 하라. 나는 당신이 구원을 확신하는지, 당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지 등의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질문들은 당신의 믿음이 구원을 얻는 믿음인지를 확인하는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하늘의 열매들이다. 이러한 열매들을 누리는 자들은 그 열매들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따라서 당신이 그러한 열매들을 누린다면 아마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안식의 참된 상속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죄 사함이나 용서함 등은 구원하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나는 내 죄가 용서함 받은 것을 믿을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믿을 수 없구나. 그러므로 나는 참된 신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가장 흔한 오해로 생기는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위해 물어야 할 질문은 당신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구원을 얻는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속하셨으며 당신을 주님 자신의 방법으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에 동의하는가? 이것이 당신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하는 믿음이다. 이 기준에 의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점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동의는 진심이며 사실이어야지 가짜이거나 마지못해 한 것이면 안 된다. 당신의 동의는 진의를 숨기고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가지 않은 아들의 말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참, 마 21:28-29). 만일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당신을 다스린다면 당신은 주의 제자가 아니다.

 

나는 이 두 표준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믿으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표지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오, 주께서 지금 당신을 설득하셔서, 당신이 이 자기 점검을 철저하게 실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이 두 표준을 합격하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당신을 시험하신다고 해도 당신은 두려움으로 떨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영원한 안식에 자격이 되는 사실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죽음과 심판이 다가와도 오히려 당신의 영혼은 고취되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겠다. 만일 당신이 구원의 안전을 확인하고 참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제부터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더욱 수고하라. 당신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유익을 증진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더욱 힘쓰라. 반면에 육체의 유익을 도모하지 말고 육체의 정욕을 제압하라.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으니 나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라.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무장한 채 서 있어야 하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 이러한 싸움은 우리의 확신과 구원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참으로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으면서 함께 받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이러한 거룩한 의무들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는 사이비 그리스도인이다. 주께서는 거짓으로 믿는 자들을 한 사람도 천국에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주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주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며 그가 그곳으로부터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주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이다” (계 2:17; 2:7; 2:11; 계 3:5; 3:12).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그리스도께서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1-22).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국 - 만리장성

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산성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대대적으로 확장을 했다고 한다.

길이가 만리나 된다고 해서 만리장성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떠도는 말로 만리장성을 지을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을 돌 위에 같이 얹어놓고 다시 성을 지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거대 원형 극장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서기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m의 4층이다.
계단식 관람석은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현대 스포츠 경기장 설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페루 - 마추픽추

페루 남부 쿠스코시에 자리한 잉카 유적지다.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 마추픽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총면적 5㎢에 세워진 도시다.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주변은 절벽과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에서 내려다봐야 보인다고 해 `공중 도시`라 불린다.
마추픽추가 발견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잉카인들이 이 높은 지대에 무게 수십 t이 나가는 돌을

어떻게 운반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00톤이 넘는 거석, 정교한 다면체로 쌓아올린 '태양의 신전',

주신전 등은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작품이다.

인도 - 타지마할 사원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해 지은 건축물이다. 
1632년에 짓기 시작해 1654년에 마무리됐다.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인도ㆍ이슬람ㆍ페르시아 건축양식이 혼합돼 있다.

요르단 - 고대도시 페트라

요르단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기원전 아랍계 유목민 나바티안 왕조가 건설한 고대도시다. 
붉은빛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산악 도시로 암석 조각과 수로 등이 유명하며 신전 극장 사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사막한가운데 이런 고대도시로서 존재여부가 의문점이지만 역사가들에의해 그 사실이 규명되었다.


멕시코 - 치첸이트사

마야 문명 중심지 치첸이트사에 자리한 계단식 피라미드다
마야어로 치는 '입' 첸은 '우물' 이트사는 '부족명' 풀어서 쓰면 '이트사족의 우물입구' 라고 한다.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4면에 있는 91개 계단은 정상에 자리한 신전으로 이어진다. 
4개 계단을 합치면 364단이고 꼭대기 신전을 더하면 태양력 1년 일수와 같은 365단이다.

마야인의 예술 감각과 건축기술, 천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건축물이다.
너무 커서 일부는 외계인이 도와줬다는 설도 있다.

브라질 - 예수상

브라질 히오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 언덕 절벽 꼭대기에 자리한 거대한 예수 석상이다. 
두 팔을 벌리고 도시를 감싸 안듯 서 있는 예수상 높이는 무려 38m, 가로 28m에 달하고 무게는 1000톤이 훨씬 넘는다
이 예수상은 1931년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이집트 - 피라미드

42층짜리 빌딩 높이에 해당되는 거대한 이 피라미드는 바닥면적도 무려 5만 2천㎡나 된다.

평균 2천 5백kg의 무거운 돌이 230만 개 이상 사용되었다.
피라미드의 동서남북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기자의 3피라미드의 크기는 수성,금성,지구의 크기 비와 같고 스핑크스와의 거리를 토대로 계산하면

수성,금성,지구의 거리를 빛이 이동하는 속도와 같다. 게다가 정확한 수평이다.
이것을 건축할 때 수천 명의 석공들이 30년은 작업했다고 하고 4500년 전에 뚜렷한 연장없이

이토록 장려한 석조건축물 세워진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등대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지시로 소스트라투스가 건설하였다고 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는 제방(길이 약 1km)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대는 이 섬의 동쪽 끝에 있었다.높이 135m이고 대부분 대리암으로 되어 있으며 3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밑단은 4각 모양, 가운뎃단은 8각 모양, 맨 윗단은 원통 모양이다. 
등대는 건설 뒤에 여러 재해를 겪으면서도 1600년이나 되는 세월을 꿋꿋이 살아남았었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없었다. 파로스 등대는 잔해만 남았다.
하지만 이집트 왕 콰이트 베이는 폐허의 남은 돌들을 이용해서 파로스 등대 자리에 요새를 세웠다.

그래서 현재에는 파로스의 등대를 볼 수 없다. 당시의 기술로 어떻게 이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세웠는지,

어떤 방법으로 불을 지펴 비추었는지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올림피아 - 제우스신상

BC 457년 건설한 제우스신전에 안치된 신상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피디아스가 8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신전에는 도리아식 기둥이 양옆 모두 13개, 양끝에 6개씩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신상이 높이 90cm, 나비 6.6m 크기의 받침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만들고 나서 800년 후인 394년에 제우스 상은 올림피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니노플리스로 옮겨졌다.
그 후의 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에 제우스상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여겨지는 작업장이 발견되었다.


할리카르나소스 - 마우솔레움

면적 29×35.6m, 높이 50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여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
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12∼15세기 사이에 지진으로 붕괴되어 초석만이 현존.


에페소스 - 아르테미스신전

BC 8세기경에 세워졌는데, 아르테미시온이라고 한다. 신전은 처음에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협조로 건조되었는데,

그후 BC 356년의 알렉산드로스대왕 탄생일의 헤로스트라토스의 방화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2중 주주식의 이오니아양식의 신전으로 바닥면이 55.10×115.14m, 기둥 수 127개의 거대한 규모이며,

원주 수십 기의 기부에는 인물의 부조가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260 ∼268년 유럽에서

아시아로 침입해 온 고트인에 의해 약탈되었으며 이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바빌론 - 공중정원

공중정원이라고 해서 날아다니는, 무슨 라퓨타같은 천공의 성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BC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건설한 정원.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성토하여 수목을 심어놓아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현재 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로도스 - 콜로서스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로도스의 거상 혹은 크로이솟의 거상이라고도 한다.
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m나 되었으며,

린도스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다.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크레타섬 - 미노스(크노소스)궁전

지중해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에 있던 고대 왕국의 궁전.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A.에번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인 것은 크노소스 궁전과 화려하던 미노아 문명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이다.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아니면 지진 등 자연적인 재해에 의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궁전을 발굴해 낸 에반스는 궁전의 방에서 갑작스런 재해의 증거를 발견했다. 
연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완성되지 못한 예술 작품, 가사 도구가 그대로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크레타가 유럽에서 지진 활동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재해에 의한 멸망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에반스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집트 - 테베 네크로폴리스

그리스어로 사자(死者)의 도시라는 뜻으로,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교외에 있는 묘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룩소르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과 네크로폴리스라 불리는 귀족들의 무덤으로 유명하다. 
기제에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 약 1000년 뒤인 BC 1600년 테베에서 일어난 신왕국시대의 제18왕조에서 20왕조까지

여러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네크로폴리스의 정확한 무덤의 수효는 알 수 없으나 몇 천 개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 왕가의 계곡

‘왕릉(王陵)의 계곡’이라고도 한다.당시 국왕들은 매장품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람들 눈에 뜨이기 쉬운

피라미드 등을 피해서 의식이나 제례를 위한 제전과는 별도로 능만을 인적이 드문 계곡 바위틈이나

벼랑에 만들었다. 아직 발굴이 완성되지 않아서 자세한것은 나와있지 않다.

시리아 - 팔미라고도

‘사막의 궁전’이라 불린 오아시스 도시.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사막 한복판에 우뚝 선

야자수 숲과 주변의 폐허 같은 유적지. 
도시국가로서 팔미라의 전성기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기원 전후부터 3세기경이다.
당시 이곳에는 물건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들은 팔미라를 ‘사막의 궁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팔미라의 클레오파트라’를 자처했던 제노비아가 로마의 땅을 점령하고

로마와 대적하면서 팔미라는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11세기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이후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남아 있던 유적마저 파묻히자 잊혀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난 1930년대에야 비로소 팔미라 유적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복원 정도는 미미하다.

예루살렘 - 바위 사원

이슬람 대사원으로, 구시가지(Old City)에서 가장 높은 성전산(Temple Mount)에 위치한다.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라 부르기도 하며, 지붕이 황금으로 되어 있어 '황금 사원' 이라고도 한다. 
건물은 8면체로 되어 있는데, 윗 부분은 면마다 다른 타일을 붙였고, 아라비아 문자로 코란이 새겨져 있다. 
돔 내부 한가운데 목책으로 둘러싼 바위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혔던 장소로서, 고대 신전의 제단이다.

시리아 - 십자군성채

시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기사의 성채와 살라딘 요새는 십자군 전쟁 기간인 11~13세기 무렵에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이다.2006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델포이 - 아폴론 신전

델포이의 유적 입구에서 꺾어져 성스러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위치해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BC 4세기의 것이다. 현재는 기둥만 남아 있다. 
아폴론 신전으로 가기 위한 성스러운 길에는 3,000개에 이르는 조각상들과 봉헌물들을 보관하는

보물창고가 늘어서 있다.신전은 길이 60m, 폭 23m로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전실,

내실, 후실을 둘러싸고 있다.

<그 밖의 불가사의>

이스터섬 - 모아이

평균적인 크기는 3 ~ 4.5 미터 무게는 20 ~ 30 톤. 큰 것은 10미터에 무게가 100톤이나 가는 것도 있다.
섬 전체에 걸쳐 600 개 이상의 모아이 상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서기 400년에서 1600년대 사이에 만들어졌다 한다.
모아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있다.
이스터섬은 평지다. 나무가 없는 이스터섬에서 어떻게 돌들을 운반 할 수 있었는지,
모아이의 얼굴과 모자는 각각 다른 재질의 돌인데 어떻게 모자를 얼굴위에 세웠는지는 미스테리이다.
또 이스터 섬 지역에서 그렇게 큰 돌이 없다고 한다.
그시대에 그런 큰돌을 누가 옮겼으며 왜 그런 석상이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캄보디아 - 앙코르와트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주(州)에 있는 유적지. 
동서길이 20km, 남북길이 10km. 고대 크메르 왕국 앙코르 왕조시대(9세기 초∼15세기 초)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프놈펜 북서쪽 약 250km, 주도(州都) 시엠레아프 북쪽 5km의 톤레사프호 북안 근처에 있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러시아 - 호박방

소련정부는 1967년 '호박방 특별 수색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수십년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자, 1984년 특별위원회의 업무를 완전 중단시켰다.
1979년 부터 호박방 복원 프로젝트 <기적의 호박>을 중심으로 79년부터 99년까지

약 7백 75만달러를 투자하여 복원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1kg에 150g만의 복원용 최상품 호박을 얻을 수가 있는 어려운 작업환경과

10톤의 어마어마한 양의 호박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자 
러시아 정부는 재정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러시아산 가스 최대 수입사인 독일 기업 '루르가스’ 복원작업을 완료할 수 있는

자금 350만 달러를 기부하고 새로운 독일 러시아 기술자들과 합세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24년간의 복원작업은 완료되었다.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을 맞이하여

호박방은 62년 만에 다시 공개되었다.

필리핀 - 계단식 논

필리핀의 계단식 논둑을 이어 놓으면 그 길이가 자그마치 지구 반 바퀴에 해당하는 2만2천 400㎞에 달한다.
계단식 논 수십만개가 장관을 이룬 하늘 아래 첫 동네 바나우(해발 800m).
경사 60∼70도의 산비탈 등고선을 따라 면적 1~30평 규모의 논 수 만개가 차곡차곡 쌓인 걸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다.
고고학자들은 2천년전에 이 계단식 논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 그랜드캐니언

미국 애리조나주 북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으로 경관이 빼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관을 자랑한다. 
20억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억 년 동안 콜로라도 강의 급류에 깎이고 고원이 융기하는 대변화를 겪은 끝에 탄생한 곳.
길이 447㎞, 너비 6~30㎞, 깊이는 1500m로 폭이 넓고 깊은 협곡은 불가사의한 경관을 보여준다. 
많은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 가히 ‘지질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1919년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

중국 - 진시황릉 병마용갱

중국 산시성 린퉁현에 있는 진시황릉원 동쪽 담에서 1km 떨어진 병마도용을 수장한 지하 갱도.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지만, 진나라로 쳐들어온 항우에 의해 많은 도용들이 파괴되어

정확한 갯수의 파악은 어렵다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모두 컬러로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발굴과정에서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시간만에 모두 색이 바래버렸다.

영국 - 스톤헨지

영국 남부 솔즈버리 평원에 있다.
대략 기원전 1900년경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1600 년경 신석기 시대 말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무려 4톤에 달하는 거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아틀란티스제국

플라톤의 저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언급된 전설 상의 섬이다.
아틀란티스는 일종의 낙원으로,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섬으로 아름답고 부강한 나라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탐욕과 부패에 찌들자, 신이 노여워하여 재앙을 내렸다.
그재앙으로 대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하루낮, 하루밤 만에 아틀란티스 섬은 영원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러시아 - 시베리아 대폭발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경 러시아의 중부 시베리아 퉁구스카 강 부근에서 원인 모를 엄청난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발 사건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조그만 불덩어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 조그만 불덩어리는 길다란 불기둥으로 변하여 벼락치듯 터졌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대폭발이 일어났다.

미국 - 버뮤다 삼각해역

미국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와 버뮤다 제도, 그리고 서인도 제도의 푸에르토리코 섬을 삼각으로 연결하는 곳
사람들은 이 곳을 '죽음의 버뮤다 삼각해역'이라 부른다. 
이 부근에서 1609년부터 많은 선박과 비행기들이 이 곳에서 원인모를 실종이 일어났기 때문.

미스테리 써클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땅에 새겨진 거대한 문양.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으로 대단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상징들을 잉룬다.

이 미스테리 서클은 고대 켈트족의 상징이나 중세의 요정 신앙에 나타나는 요정 고리와

너무나 유사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영국 - 네스호의 괴물
영국의 북부 스코틀랜드의 네스 호에 살고 있다는 괴물 네시. 
오늘날의 과학적 상식으로 미루어 그러한 괴물 은 있을 수 없다는 학자들도 있지만

 '내가 틀림없이 네시를 보았다' 는 사람들의 숫자는 1만을 넘는다.
그중에는 사진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증언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네시의 턱 아래에 수염이 나있고, 등애 3개의 혹이 있다고 한다.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325/read?bbsId=G005&articleId=13201282&itemId=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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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사소한 곳에 
 
흔히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잘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의 공통된 병입니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와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가난합니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습니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화려하고 많은 데 있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행복은 작은 일에 도
감사하는 마음이죠!^^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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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용서하기(Forgiving the Church)

우리가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교회를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우리가 교회를 버릴 때에는
살아 계신 예수님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그러나 교회를 미워해요" 라고 말할 때,
우리는 교회뿐만 아니라 예수님마저도
잃어 버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교회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엄청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좀처럼 우리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서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우리들을 용서해 줍니다

흔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조직으서의 교회는
우리들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만 말입니다

교회를 '저 곳에 떨어져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몸부림치는, 약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몸부림치는
약한 사람들의 한 부분이며
그리고 이 약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주 하나님과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옮긴 글
출처: 목양연가 중에서


슬퍼할 만한 일                


가난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다면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다.

지위가 낮다고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는 없으나
지위가 낮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비하해야 마땅하다.

또한 늙었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는 없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목적 없이 살아간다면 이는 한탄할 만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으나
죽은 뒤에 이름이 쉽게 잊힌다면 이는 슬퍼할 만한 일이다.

- 뤼신우, 세상을 보는 지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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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동 “류광수 목사, 이단 결의 유효하다”
예장합동 총회임원회, “한기총 이단해제 결의는 본 교단과 무관”

 

예장합동(총회장 정준모 목사) 총회임원회는 16일 오전 11시 총회회관에서 총회임원회를 열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지난 14일 실행위원회를 열어 류광수 목사를 이단해제를 결의한 것과 관련 예장합동 총회와는 무관하며, 류광수 목사를 이단 결의한 총회의 결의는 유효하다고 결의했다.



예장합동 총회임원회가 한기총의 류광수 목사 이단해제에 대해 무관하고, 이단 결의는 유효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기총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는 류광수 목사 이단해제를 결의하면서 전제조건으로 “각 교단에서 (9월)총회 이후 다른 문제를 제기하거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경우 추가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또 한기총과 WCC 한국준비위원회 대표자들간의 합의문 발표한 것과 관련해서는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WCC 신학을 반대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2월 19일 속회를 열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는 총회 실행위원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했다. 또한 정준모 목사 노래방 출입논란과 황규철 총무 가스총 사건에 대해서도 총회 실행위원회에서 다루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예장합동 총회 정상화는 오는 30일 열리는 총회 실행위원회가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정준모 총회장과 황규철 총무에 대한 비토를 해온 비대위는 2월 19일 개최하기로 한 비상총회(속회)를 그대로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비상총회 개최 결의를 취소하고 정준모 총회장을 중심으로 총회를 정상화에 협력할 것인지를 총회 실행위원회 결과를 보고 최종 판단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쌍방이 폭행 혐의로 맞고소한 총회장 정준모 목사와 장로 부총회장 남상훈 장로는 이날 총회장실에서 만나 서로 소를 취하하기로 하고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정준모 총회장은 교단지 <기독신문>에 대한 강경입장을 밝힌 바 있으나 최근 백영우 사장과 전화통화를 하고 교단지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자고 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총회임원 9명과 황규철 총무가 참석했다. 회의는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4시30분을 넘어서 끝날 정도로 여러 사안들에 대해 진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김철영/차주영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주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였는데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그중의 하나가 처음 사랑과 나중도 같고 시작과 끝도 같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이 예수는 믿는다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내용을 보면 처음 사람과 나중이 같지 않다는데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이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가 지배적이라고도 해고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오늘의 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라 저음과 나중이 같은가 ?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처음에 교회 발을 들여놓을 때는 엄청나게 반갑게 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척하다가 사정이 있어 교회를 떠날 때는 안면 몰수하기가 일쑤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 자기 교회가 이익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친절하지만. 그 교회에 득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냉정하리만큼 돌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다면 그 교회 등록하여 15년 이상 반주로 역할을 다했는데 가정 형편상 남편과 한 교회로 합치기 위하여 당회장에게 형편을 말하고 교회를 떠날 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는 것은 물론 교인들에게 인사나 하고 떠나라는 부탁 한마디도 없다.

그리고 15년 동안이나 찬양을 같이한 대원들이나 찬양대장 그리고 지휘자 그 어떤 교인도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은 교회가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칭찬이나 인사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고 충성한 것은 지상에서 상급이나 대가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그렇지 않고 또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봉사자로 세울 때는 교회 이익이 되니 좋아하고 봉사를 그만두니 교회와는 관계없으니 서운하게 대하든 울고 가게 만든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이는 교회가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이것이 교회 사랑이라면 불신자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답은 더 못하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레서야 교회가 끝까지 부흥되겠는가? 답은 아니다. 교회는 사회보다 더 훌륭한 면이 있어야한다.처음 만날 때나 헤어질 때도 똑같은 모습이어야한다. 속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교회도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한국교회가 점점 쇠퇴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일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반교인도 그렇지만 목회자가 십수 년을 아니 평생을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목회를 마치고 떠날 때 떠나는 목회자는 교회 가까운 곳에 살아도 아니 되고 교인들과 만나도 아니 된다는 논리는 후임 교역자를 위한다는 구실이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궤변이다.

         그럼 천국에 가서도 후임과 선임이 따로 사는가 ? 그렇지 않다.

교회는 이익이라는 수단을 앞세워 가장 귀한 사랑을 팽개치는 것은 처음과 나중이 같은 주님의 진리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후임자를 위한다는 구실로 그동안 수고한 전임자를 과연 주님이 기뻐하실까 ?

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그의 사랑으로  전임자나 후임자 모두에게 즐겁게 해주고 똑같은 정으로 대해주어야 매우 기뻐하실 것으로 안다.

교회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계속 간다면 교인의 비난은 물론이지만 .세인의 비난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실천이다.

모든 게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고 사랑 속에 모든 계명이 포함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속언에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라는 말과 같이 한번 만난 성도는같이 잇든지 떠나든지 성도로서 교제가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 전통과 유전보다 차원이 높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통을 진리보다 더 앞세워 성도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여 그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지 이는 마귀의 역활을 대신하면서도  주와 교회를 위한다는 궤변이다.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성도들은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여 교회가 더는 희망이 없게 하는지 통곡할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시야에서 벗어나 넓고 한이 없는 진리에서 새로운 눈을 뜨고 성도가 처음 들어올 때나 그가 떠날 때도 성도의 교제에 조금도 변합이 없어야 하겠고 목회자를 모실 때나 떠나보낼 때도 처음과 나중이 같은 태도를 보여야 기독교가 불신자로부터 욕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교회 부흥의 방향이 될 것으로 믿는다.

글/무궁화꽃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신을 찾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어느 민족이건 그들의 문화 속에, 물론, 그 정도나 형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을 섬긴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고 그 출발점은 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서 좇겨난 때부터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쫓겨난 그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신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유전으로 물려받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가는 곳마다 신을 찾으려하고 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위로 받으려하는 모습을 연출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 귀소본능(歸巢本能)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영적 무지(無知) 상태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은 오히려 여러 가지 형태의 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신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 필자가 본 견해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1.이방인들의 하나님: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장 22절 하)”라고 지적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많고,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그 어느 국민보다 더 종교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다고(행 17: 23절)바울 사도가 지적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모든 만물이 다 신입니다. 산에는 산신령, 돌, 나무, 폭포수, 물에는 용왕님, 하늘에는 일월성신님, 부엌에는 삼신님, 심지어 우리가 먹는 된장 간장독마저 모두 신이 관장한다고 믿을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국민의 종교성이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나 막상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라고 물어보면 정작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 안에서 잠시 분류해
보면:

a.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개념은 막연합니다. 하나님이란 하늘 공중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나 만나볼 수 있는 염라대왕쯤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 천당이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그뿐이니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국보험'을 들어 두는 심경이라고나 할까요?

b.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늙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복신앙가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기분이 좋아진 하나님이 복을 한 아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시원치 않으면 화가 난 하나님은 당장에 매를 때리기도 하고 병을 주기도 하며 또 물질에 큰 손해를 끼치게도 한다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다른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몸에 큰 질병이라도 들면, 그것을 저주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성도가 물질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을 믿는 것에 길든 성도들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란 불안과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했음을 아는 상태에서 병이라도 들면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틈을 타 자칫 신령하다는 자들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뭔가 해결될 것같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사이비 치유사역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 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덕적 속성으로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시며, 신실과 공의가 완전하신 분,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지만 짧은 지면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믿어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부. 성령 하나님을 보이게 나타내려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 바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요1: 18절 참조)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
 
하나: 하나님을 개인의 주(The Lord)로 믿어야 합니다.
'주(主)'님이란, 원어로 '아도나이'(ynda)입니다. 그 뜻은'주권자', 인간의 또는 신적인 '통제자', '주인', '소유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죽어서나 만나보는 그런 염라대왕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현재 내 삶에 주인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에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하며, 이런 자세를 '청지기 자세'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잠시 말씀드린 대로, 청지기란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내 건강, 내 생명, 내 자녀, 내 물질, 모두 주인의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받아 누린다는 개념입니다.(시 24: 1절) 따라서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복 받으려고 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그동안 받아 누렸으니 그 은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 분의 일을 드립니다.(요즘은 십분의 일 그 자체에 제동을 걸어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는 듯, 몰아가는 일부 안티들의 목소리도 거세지만...)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것인데, 십일조뿐 아니라 내 재산 모두 드려야 마땅하지만 십 분의 일이라도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이런 자세가 선한 청지기의 올바른 물질관입니다.

둘: 하나님을 예수님(Jesus)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구원자란 뜻입니다(마1: 21절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요,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 12절 말씀)” 그렇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여호와 증인 창시자 럿셀도, 모하멧도, 문선명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그들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아니며, 또 죽어줄 수도 없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저주(요 3: 36절 참조) 아래 놓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와 꼭 같은 신세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어 주노라”라고 말씀하셨고 실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구원관입니다.

셋: 하나님을 그리스도(Christ)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1. 선지자 2. 제사장 3. 왕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는 다음 세 가지 의미 “당신은 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니이다.”하는 뜻이 함축돼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란,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입니다. 왕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통치자 입니다. 육신 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영적으로는 그의 백성된 나 개인을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바로 믿으면, 결코 이단에게 속아 넘어갈 일도 없고 미혹의 영에 이끌려 탈선할 일도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우리가 죽어서나 만나 보는 염라대왕도 아닙니다. 변덕 많고 괴팍한 하나님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개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각종 이단 사설, 하나님은 다 같은 하늘의 신, 하늘님이라고 믿는 다신교나 여러 혼합종교의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재 정립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믿고 섬겨야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구원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그 구원의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성취하신 성자 하나님,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내주하고 계시며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이 신앙이 올바른 신관입니다.

고로, “당신의 하나님은?” 하고 묻는다면,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믿는다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성자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을 때, 그 속에 성도가 지녀야 할 올바른 물질관, 구원관, 신관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가장 올바른 정답이 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 15-18)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화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 11- 12절 말씀)”

USA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 칼럼

복음 안에서 율법의 역할

스데반 황 목사

I. 서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복음”을 강조하다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율법주의”와 율법의 바른 기능을 혼돈함으로 율법이 없는 복음을 외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복음이란 사실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율법이 없는 복음은 “무법주의” (Antinomianism)로 향하게 되어 복음을 아주 값싸고 능력없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도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여 바울의 복음을 “무법주의”로 만든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마음껏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드러날 것이니 죄를 짓자. 더 이상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8)

사실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율법과 은혜에 바른 인식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며 나아가 우리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 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복음과 율법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은 이 글을 통하여 복음과 율법은 서로 상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로서 율법은 복음의 절대 필요성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루어 간다는 진리를 롬 3:19-31을 통하여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로마서 3:19-31 )

II. 본론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곧,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창시자였던 마틴 루터(1483-1546)의 대 발견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귀한 진리가 불법을 행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불법 (”lawlessness”) 기독교로 크게 오해 되는 일이 번번히 있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내부에는 언제나 두개의 큰 이단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어떻게든지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된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모범 정도가 될 뿐이다. 이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둘째 이단은 무법주의(antinomianism)이다. 이들의 주장은 율법이란 구약에나 필요한 것이지 지금은 은혜 시대이며 따라서 율법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오직 믿음”을 주장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를 제안한다. “오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신나게 죄를 지으면서 죄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흔히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방종하는 집단을 이루게 된다.

이 두 가지 이단을 향한 교회의 대책과 성경의 균형 잡힌 답은 다음과 같다. 곧, 율법은 우리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게 하고,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는(믿음은) 율법을 세우고 율법을 지키게 한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의” (righteousness)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의”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이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가 “의”로와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완벽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의”를 이루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19-20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곧,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율법 앞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절대기준에 의하면 롬3:10 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가 되는 것이며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율법아래서 의로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그 누구라도 율법에 의하여 지옥에 보내더라도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때 “복음” 이 등장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로만 얻는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다. 이 구원의 길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갈 1:7-9을 통하여 경고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멈춘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복음에 관하여 그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저질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타락하는 사례가 이 땅에 너무나도 많게 되었다. 나아가 복음을 빙자하여 죄를 합리화시키면서 죄를 계속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믿는 “복음” 때문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구원과 믿음에 관하여 정리하여 보자.

(1)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곧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다. 이 진리는 영원한 진리이다.

(2)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고 있는 점이 있다. 이는 자신들의 “믿음”에 관한 착각이다. 흔히 우리가 오해하는 점은 우리의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내용에 지적인 동의를 한 후, 우리는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한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그리고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은 “바른 믿음”은 필히 우리를 구원한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죽은 믿음, “거짓 믿음”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곧 많은 사람이 거짓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 믿음에 관한 착각은 자신의 거짓 믿음을 통하여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3) 고전 6:9-10을 읽으면 이 내용은 고린도 교회에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거짓 믿음의 교인들이 발견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5:19-21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4) 그러므로 로마서 3:31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아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구나.!”로 이해하여 율법주의자가 되고, 결국 바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여 저주 받는 자가 된다.

바울의 주장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연구하여 보자.

(1) 요한복음 14:15를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한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가 된다. 사실 예수의 계명을 요약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계명이다. 예를 들어 고전 13장을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가르쳐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이러한 계명이 없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2) 요한복음 15:10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 일서의 강조점을 보아도,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입증된다. 계명은 성경에 있어서 율법이며 이는 곧,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그 사랑은 율법을 알고 지킴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율법을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이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과 믿음의 관계는 바로 사랑과 율법의 관계와 유사하고, 이는 율법과 은혜는 (믿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사람에게 명령하고 그 내용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어디까지 요구하는가?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만큼 너희도 완전하라.’를 요구한다.

(2) 완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합격”을 말하면서 축복 및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히 못 지키는 자에게 “정죄”를 말하면서 “벌”, “심판”등을 선고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함께 그들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

(3) 율법은 죄를 고발한다. 가장 깊은, 숨겨진 죄라도 드러낸다. 마치 흠이 없이 깨끗한 양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양심은 사실 죄로 인해 더럽혀져서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율법을 볼 때, 율법은 마치 영혼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곧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Doctor M.R 디한의 책 “율법이냐 은혜냐”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이란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유리컵의 먹물을 젓가락으로 젓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들의 숨겨진 죄악들을 다 드러내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 그 정체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4) 율법은 죄로 더욱 죄를 짓게 하고 반항하게 만든다. 율법과 죄는 사이가 전혀 좋지 않다. 율법이 항상 먼저 죄에게 시비를 건다. 그러면 죄는 더 큰 죄를 지으며 율법에게 반항을 한다. 예를 들면 “죄라는 못된 놈”이 침을 튀기면서 말한다고 하자. 율법이 말한다. “침 튀는 것은 실례입니다.” 죄라는 놈은 이 지적을 듣고 율법에게 가래침을 뱉으면서 더욱 반항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율법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주인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독재자인지 그 본색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곧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율법을 어긴 자를 용서할 수 있거나 율법 아래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죄인을 나오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넣는 역할은 하지만 그 사람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2) 율법은 죄로부터, 죄라는 주인으로부터 죄의 노예들을 풀어 주거나 해방 시킬 수 없다. 율법은 죄를 폭군 주인으로 드러내고 그 악함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 주인에게서 그 노예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율법이 하지 못하므로 다른 것이 해야 하는 데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요 “믿음”이다.

(3) 따라서 “은혜와 믿음”은 율법과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곧, 죄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진다. 은혜와 믿음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죄라는 폭군과 싸워 우리를 그 암흑과 악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 또는 “구속”이라 하며 오직 은혜(믿음)로만 가능하다.

(4)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바로 왕은 “죄”의 왕이요 사탄을 상징한다.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 피는 그 피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요, 그 은혜는 엄청난 능력으로 그 강한 바로 왕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이루어낸다. 곧 은혜는 유월절의 피를 믿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구원의 대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나타나 “죄”라는 폭군과 싸워 승리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내 힘 가지고 사탄과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역동하는 힘이 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드러나는 유일한 통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6) 따라서, 은혜는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래서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것, 즉 죄인을 해방하고 그로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율법을 지키도록, 율법을 완성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겠다.

(7)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을 통한 같은 이 능력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간다. 이는 내가 율법을 이룸이 아니고 (율법주의)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율법을 이루어 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은혜 속에 있는 자가 아니며,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님이 판명된다.

(8) 야고보서는 율법과 믿음 (은혜)의 관계를 정리한다. 율법주의가 야고보서를 읽으면 행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불법주의자 (즉, antinomian)들은 야고보서는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두 주장이 틀림을 알 수 있다. 사실, 야고보서는 가짜 믿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참 믿음은 행위(순종)로,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고 은혜를 얻은 자는 모든 삶에서 선행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과 믿음의 바른 관계에 관한 이해를 통하여 야고보서 3:11-12에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하고 야고보서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9) 아무튼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자들은 율법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제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시사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삶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리하면

(1) 은혜로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죄의 세력이 틈 탈 수 없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는 율법을 폐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 시킬 수 있도록 돕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믿음의 삶이란 이웃을 향하여 선한 삶과 사랑의 삶으로 나타난다.

(3) 은혜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하며, 새 주인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속에 나타나 죄와 사탄과 대항하여 싸우는 능력으로 표출된다.

(4) 은혜를 받았는지, 참 믿음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율법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다. 곧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볼 수 있다.

(5) 그러므로 “은혜”를 빙자하여 죄를 지어도 된다는 방종된 가르침을 성경은 결코 허용치 않는다. 롬6:15 “그런즉 우리가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실제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의의 은혜의 상태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 상태 : 죄악된 노예생활. => 의의 은혜 상태 : 의롭고 거룩한 하늘나라의 삶.

죄의 종 => 의의 종

사탄의 종 => 하나님의 종

율법을 어기는 상태 => 율법을 지키는 상태

사형 선고 => 하나님의 자녀, 결혼 축제

(6) 율법은 근의 공식처럼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지금 죄의 종인지 의의 종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종된 상태를 발견하면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기능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히 변함없는 율법의 절대적 역할이다.

(7)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냄새나는 부패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우리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지옥불에 떨어져 합당한 자이구나.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구나”를 깨닫게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그리스도를 발견케 돕게 몽학선생인 것이다.

(8) 이 때 주님을 발견하는 자마다 주님 안에서의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한다. 그 은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준다.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있고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은혜는 계명의 대 강령인 “목숨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9)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0) 이에 바울은 로마서 3:31을 통하여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예수 안에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끝이 있다. 곧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에게 지금도 죄와 싸워 이길 은혜를 주시는 분은 예수이시다. 오직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승리의 능력을 얻는 은혜를 입는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예수 안에서 이미 얻게 하고 또한 예수 안에서 그 의를 이루어 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마틴 로이드 존스 마태복음 5:38-42

 여러분은 자아(自我)가 여러분의 삶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지 그 "범위"를 알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필히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들을 살펴보십시오. 잠시 동안 이러한 모든 것 안에 침투해 들어온 자아의 범위를 숙고해 보십시오. 심지어 복음 선포에 까지 자기 이익과 이기적 관심이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것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우리는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여러분은 "아, 그것은 나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아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도 동일한 이유로 그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여러분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비난을 받아야만 할 사람은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자아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슬픔, 삶과 체험에서의 대부분의 고통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출처인 이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자아를 교리적으로 바라봅시다. 자아를 교리적인 방법과 신학적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자아였습니다. 자아가 없었더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해서 죄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의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아. 너는 당연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全) 원인이었습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 회의가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자아이며,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본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가 지하 감옥에 있든지, 발이 차꼬에 매여 있든지, 또는 화형을 당하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체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온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필연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거룩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거룩을 반드시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일들은 행하고 어떤 일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지는 것들은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의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아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거룩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서 수많은 파멸을 일으켜 온 이 자아에 대하여 죠지 뮬러와 같이 우리가 죽었으되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삶을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오셨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신 그분의 자아를 부인한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주 자기가 한 말은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며, 자기가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자기 비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자신을 전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곧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같이 친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 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극치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순결하고 결백하며, 결코 죄를 범하시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히신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을 받으시되 되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벧전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고의 예입니다.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갈망이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백성, 새 인류, 새 창조를 이루고, 그분을 닮은 백성들로 구성된 새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본(本)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 삶은 자아 방어나 자아 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뺏으려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게 하거든 그와 이 마일을 동행하고,"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요구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어렵다면, 내가 도울 수 있으며, 기꺼이 돕겠노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미 자아를 처리했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영예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이며,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살도록 하신 삶입니다. 감사하옵게도 복음서는 계속해서 그분께서 다시 사셨으며 성령님의 새롭게 하며 강건케 하는 권능과 함께 성령님을 교회에게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복된 약속과 선물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심히 악하고, 엄청난 비참과 불행에 이르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된 사역을 부인하게 하는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없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Meeting Christ in the Church) 

교회를 사랑하는 데 낭만적인 감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찾아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 잊혀진 사람과 같은
'작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큰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들로부터 숨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항하든 또는 받아들이든, 비판하든
또는 칭찬하든, 우리의 말과 행동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에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암소의 눈물, 엄마의 눈물 

     

    오늘 제직 헌신 예배 중에 잠깐

    목사님의 간증하시는 성경 구절에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서러움에 목이 메었습니다.


    어찌 나만이 겪는 일일까 만은.....
    가난 보다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가정 환경으로 인해

    적응이 되질 않아 몹시도 괴로웠고..

    하루하루 삶이 몸부림이였으리라..

     

    뿐만 아니라, 남편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어린 자녀들(삼남매)을 양육할 수가 없어서

    시골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골 집에 데려다 놓고 돌아서는 발 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막내 아들은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알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아우성치는 아들과 두 딸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형편과 서러움에.. 한 없이 울고 또 울고

    돌아서야만 했고... 버스 정류장까지의 2키로를

    걸어가며 한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치 젖는 먹는 새끼 송아지를 두고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28년 전의 일인데도 그때 자녀들과의 이별의 아픔을

    지울 수가 없네요...

    주님께서 훈련시키시는 연단이라 싶지만요...

    저는 그 당시 아무런 대책도 없는 만학도를

    딋바라지 하기 위해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3부 교대의 신설 기독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그리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학생이된 남편에게서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 신분으론 감당하기 힘든 무직의 학생 가장이었습니다

    그때는 유치원두 흔하지 않았지만

    어린이 집은 더 더욱 없을때라 직장에

    출근할 때마다 아이들을 두고 가야함이

    큰 걱정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니던

    직장인 병원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월급이 제때 나오질 않았고
    교육 전도사님으로 계시던 교회에서도

    얼마되지 않는 사례비가

    늦게 나와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참 !! 생각나네요.

    그때 감귤로 만든 색색이란 음료수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제 몫으로 1개 나오면 집에

    가지고 가서 다섯 식구가 나누먹던 때가요.

    지금도 가끔 그 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도 그 시절 그 환경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있었지만,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의 종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신학생..
    그 신학생을 남편으로 둔.. 아내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가정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울고 울며 걸어가야만 했던

    그 눈물의 발자국을 기억하시고..

    할아버지 등에서 울며 엄마와 떨어지기 실어하던 아들도
    엄마 나 엄마 따라.. 엄마하고 같이 살면 안되냐? 고

    떼를쓰던 둘째 딸도..묵묵히 동생들을 잘 챙겨주며..

    제일 많이 떨어저서 지내던.. 착한 큰 딸도
    결혼하여 자녀 셋(아들 둘, 딸 ) 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 봅니다.

    둘째 딸도 목사님한테 시집 가서 자녀 셋(아들 둘, 딸)낳고

    미국에서 부목사님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울며 불며, 떼를 쓰며 엄마 따라 가겠다고 하던

    막내아들 해병대를 제대하고 신대원을 마치고

    5천명 되는 교회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올 10월 목사 안수를 받을 예정입니다.

    목회 안하고 도망다니시던 목사님두

    벌써 목회 30여 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목사님 간증 속에서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시며, 목이 메이셨다는데
    저 역시 오늘 그때의 아품과 오늘을 생각하니

    너무도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출처 및 정리: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금자 사모님

     

     

 




한기총, "WCC 부산총회 협력하겠다"
김삼환 목사, 김영주 목사, 홍재철 목사, 길자연 목사 합의문 발표


그동안 WCC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WCC부산총회 반대운동을 전개해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가 WCC부산총회의 성공적 개최에 협력하기로 했다.

WCC부산총회 준비위원장 김삼환 목사, 집행위원장 김영주 목사, 한기총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는 13일 오후 명성교회(담임목사 김삼환) 두란노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양측은 네 가지의 항목에 합의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종교 다원주의 배격, 공산주의, 인본주의, 동성연애 등 복음에 반하는 모든 사상 반대,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것과 성경 66권은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임을 천명했다.

김삼환 목사는 “WCC 총회를 앞에 두고 1천만 성도들이 염려하고 한결같이 기도해주신 기도제목은 한국교회가 연합해 잘 치르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우리나라의 정부, 정치,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 모든 국민들이 사모해온 것은 한국교회가 WCC 대회를 치르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이에 한기총과 WCC준비위가 합의해 선언문을 발표하게 됐다.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인사말을 전했다.

길자연 목사는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 두 갈래로 활동해 왔다. 우리는 2013 WCC 대회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먼저 이 대회가 성경 66권의 근거가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신학적 관점에 의해 고심하고 기도해 왔다.”며 “WCC 대회는 종교대회를 지나서 국가적, 사회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이미 대회가 치뤄지기로 한 시점이다. 우리는 이 대회가 이뤄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또한 “WCC 준비위원회와 한기총이 함께 참석해 한국교회와 사회에 합의문을 내놓는 것이 덕이 된다고 생각한다. 선언문의 내용은 극히 성경적,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대회가 되길 바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의가 되길 바란다.”며 합의문 발표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홍재철 목사가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이 짧은 시간에 눈부신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고, 이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WCC 총회 개최를 앞두고 한국교회 안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유감으로 생각한다. ”며 “2013년 WCC 부산대회를 앞두고, 개최에 대한 보수교단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공동선언문을 선언한다”며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양측이 WCC부산총회의 성공적 개최에 합의함에 따라 부산총회는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 전체가 세계 기독교 지도자들을 환영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에도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는 총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같은 양측의 합의는 내일 한기총 실행위원회 통과 후 결정된다. 다음은 합의선언문 전문이다.

정순주 ⓒ 뉴스파워





출처: USA 아멘넷

교회협과 한기총의 WCC 대회 공동선언문 발표가 뜨거운 이슈가 된 가운데, 한기총은 실행위원회에서 공동선언문 발표를 환영,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한편 다락방 류광수 건과 관련해서는 한기총 이대위의 ‘이단성 없다’는 보고를 67명 중 44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예장합동의 반발이 거세 차후 논란이 예상된다.

 
▲한기총이 14일 오전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실행위원회를 개최하고, WCC 공동선언문 및 다락방 류광수의 이대위 보고와 관련해 논쟁을 벌였다.ⓒ뉴스미션

“공동선언, 극비로 신중히 진행됐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이하 한기총)는 14일 오전 11시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중강당에서 제24-1차 실행위원회를 열었다.

한기총은 하루 전인 13일 저녁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공동선언문을 발표, ‘2013년 WCC 부산 대회를 이해하고 2014년 WEA 총회를 한기총과 교회협이 상호 협력해 치룰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공동선언문에 대한 회원 교단들의 추인을 받기 위한 실행위원회를 연 것이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오늘 신문에서 한기총이 WCC 대회 공동선언 한 것을 보고 당황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며 “그동안 교회협의 김영주 총무와 나, 길자연 목사, 김삼환 목사, 이광선 목사, 조용기 목사 등이 은밀한 가운데 극비로 진행해 왔다. 피차간 결렬되면 한국 교회 다툼의 불씨가 될 수 있기에 결렬될 것에 대비해 비밀로 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명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양측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며 “교회협이 주장해왔던 일들을 무효로 돌려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한기총 역시 협상에서 하나라도 밀리거나 문제가 되면 기독교 백년사에 기록될 문제이기에 신중히 추진해왔다”고 덧붙였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WCC 공동선언문에 대한 총대들의 찬반 가부를 물었으며, 만장일치로 선언문 추인을 통과시켰다.

“한기총 정체성 고수해야” vs “한기총이 승자”

한기총은 그간 WCC를 종교다원주의, 용공주의라고 비판하며 WCC 부산총회 개최를 강력히 반대했던 터라, 실행위원회에 참석한 몇몇 총대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손선영 목사는 “대표회장이 연합을 위해 애쓰는 것은 찬사를 보내고 싶다”며 “그러나 한기총은 그동안 보수신앙을 지키며 WCC 반대를 고수해왔다. WCC의 브랜드는 좋지만 한기총의 역사적 정체성은 고수해야 맞지 않나”고 비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총대들은 이번 공동선언문에 ‘하자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선언문은 △종교다원주의 배격 △공산주의, 인본주의, 동성애 반대 △개종전도 금지주의 반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임을 인정하는 4대 선언을 포함하고 있다.

이승렬 목사는 “우리는 그동안 WCC가 종교다원주의, 용공주의, 동성애, 선교무용론을 주장했기에 그들을 적그리스도 단체라고 규정한 것”이라며 “그러나 이번 선언문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교회가 일치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

또 한 총대는 “선언문을 읽어보면 WCC를 찬성하는 이들이 자기 신앙을 포기한 것과 같다. 한기총이 승자라고 볼 수 있다”며 홍재철 목사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한국 교회 전체가 합의한 이 선언문은 영어로 번역돼서 WCC 총회로 간다. WCC 총회가 이 선언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총회는 부산에서 치루지 못할 거고, 받아들이면 총회는 한다”며 “이 선언문은 WCC 총회 석상에서 낭독될 것이며, 이로서 WCC도, 한기총도, 교회협도 복음주의자가 되며 좌파도 진보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기총 실행위원회는 WCC 공동선언문 내용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뉴스미션

류광수 이단 해제 통과…예장합동 ‘반발’

한편 이날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는 교계 안팎으로 논란이 됐던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에 대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이단성이 없다’는 보고와 관련, 총 투표자 67명 중 44명 찬성(19명 반대)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투표 전, 찬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특히 당시 그의 소속 교단으로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던 예장합동은 한기총 이대위의 보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 항의했다.

예장합동 증경총회장이며, 한기총 명예회장인 김준규 목사는 “한기총에서는 이 보고서를 그대로 받으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장합동과 고신을 비롯해 건전한 교단에서 류광수에 대해 이단성을 천명했기에 한국교회가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며 “우리 교단에서도 이것을 계기로 반 한기총 여론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예장합동 총대들은 찬반 가부를 묻는 투표를 유보하자고 주장했으나, 홍재철 대표회장은 대표회장의 직권으로 무기명 비밀투표를 강행했다. 투표 전 찬성측인 개혁교단 총대들과 합동교단 총대들의 신경전으로 소란이 일기도 했다.

반대 입장을 피력했던 김준규 목사는 투표 결과가 나온 뒤 “한기총 명예회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김준규 목사는 류광수에 대한 이단 결의가 있었던 81차 예장합동 총회 당시 총회장직을 역임했었다.

▲다락방 류광수에 '이단성 없다'고 보고한 이대위 결의를 반대하는 예장합동 총대들과 찬성하는 예장개혁 총대들이 실랑이를 벌였다.ⓒ뉴스미션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USA아멘넷

한기총, 우려대로 '다락방 이단해제' 결정
합동측 실행위원들 반발 속에 투표강행 처리해 이단해제 결정

2013/01/14 ㆍ추천: 0  ㆍ조회: 5      

예장통합과 합동 등 주요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됐던 다락방 전도운동 류광수 목사에 대해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14일 실행위원회를 열어 이단 해제 결정을 내렸다. 교계가 그동안 우렸했던대로다.

류광수 목사는 예장합동총회를 비롯해 예장통합과 고신, 기성 총회 등 9개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은 인물이다.

한기총 실행위원회에서는 찬반 논란 끝에 표결에 부친 결과, 유효 투표자 67명 가운데, 44명의 찬성으로 이단해제 결정을 내렸다. 총 투표수 67명 중 유보 2명, 기권 2명, 반대 19명, 찬성 44명으로 안건이 통과된 것이다.

투표에 앞서 예장합동측 실행위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합동측 실행위원들은 각 교단의 입장을 존중하고 연합운동을 전개해야 할 한기총이 이단을 해제하거나 규정하는 일에 직접 나서는 것은 옳지 않으며 회원교단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김준규 목사(한기총 명예회장, 예장합동측 증경 총회장)은 "한기총이 류광수의 이단성을 해제한다는 내용이 발표되면 전국교회에 일으키는 물의가 대단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난 해 다락방을 영입한 예장개혁 측 실행위원들은 한번 이단이면 영원한 이단으로 규정해야 하느냐며 합동측 실행위원들의 입장을 반박했습니다.

정학채 목사(예장개혁총회 총회장)은 "류광수 목사와 그에 속한 35만명 성도는 영원히 이단으로 지옥가야 하느냐"며 "누가 어떤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홍재철 대표회장의 직권으로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감으로써 논란이 마무리되었고, 결국 다락방을 이단해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연합기관인 한기총이 이단해제를 결정했더라도 9개 주요 교단에서 다락방을 여전히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한국교회에 큰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편, 한기총과 WCC 한국준비위원회가 합의해 발표한 세계교회협의회, WCC 총회 공동선언문에 대해서는 사실상 한기총이 승리한 것이라며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공동선언문이 합의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WCC 총회가 부산에서 열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홍재철 대표회장은 "WCC 2013년 총회석상에서 이 선언문을 한기총이 WCC와 함께 낭독을하게 된다"며 "그러면 이제는 WCC도 복음주의자가 된다"고 발언했다.

한기총은 그 동안 반대해 온 WCC 총회를 용인함으로써 한국교회 화해와 일치에 기여한 반면, 다락방 이단 해제라는 결정을 내려 한국교회 혼란도 부추기는 양면성을 보였다.

CBS TV보도부 박성석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 USA아멘넷
한국기독교총연합회(홍재철 대표회장)가 최근 다락방 류광수 목사에 대해 사실상 이단 해제를 결정한 것과 달리 이단 연구 단체들은 류광수 목사가 이단임을 재확인하고 나서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세계한인이단대책연합회(공동대표 박형택 목사)는 오늘(10일) 서울 대림감리교회에서 열린 호교단체 세미나에서 “다락방 양육교재들과 다락방 측 교회 설교를 분석한 결과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고, 귀신론을 주장하는 내용이 노골적으로 포함돼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단협은 또, “다락방만이 초대교회 이후 유일한 복음을 전한다는 배타적 교회론도 그대로 나타난다”며,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한 9개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다락방을 이단으로 공표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이단으로부터 한국교회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모인 이단 대책 단체들은 이날 신년하례회를 갖고, 이단사이비 척결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CBS TV보도부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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