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란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운명에 맡기는 체념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미와 결말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우리에게 할당된 과업에 매진함을 뜻한다. 그것은 거짓 영성으로 체면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다. 허둥대고 염려하는 것이나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눈가림이나 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소망한다는 것은 꿈꾸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권태나 고통에 대한 보호 장치로서 환상이나 공상의 실타래를 푸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일을 반드시 이행하실 것이라는 든든하고도 기민한 기대이다. 그것은 믿음의 고삐에 매어 놓은 상상력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방식대로 그분의 시간표대로 행하시도록 기꺼이 맡겨 드리는 것이다. #한 길 가는 순례자/유진 피터슨
달빛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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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을 조심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마태복음 6장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놀라운 진리들을 담고 있다. 그 진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는 6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달리 말해,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간단한 말씀 한 마디가 놀라운 진리의 파노라마를 시작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외식에 대한 원리를 소개해 주고 있다.

외식의 개념

1) 거룩에 대한 재정리

동양의 금욕주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우뚝 솟은 성 모퉁이에 먼지와 재를 둘러쓰고 늘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어느 여행자가 사진 한 장만 찍자고 부탁을 하자 그 사람은 ”잠깐만요, 내게 쌓인 재를 다시 잘 꾸미고요”라고 말했다.

기독교계 안에는 재를 다시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이 많다. 우리는 더 낫게 보이기 위하여 우리들의 경건의 모습을 바꾼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적지만 이와 같은 꾸밈들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는 종교적인 속임수는 우리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특별히, 주위에 진실로 거룩한 사람이 있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외식의 속임수를 쓰지만, 사실은 엉터리, 가짜인 것이다.

2) 거룩의 실체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진실되고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외형적인 꾸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당신이 겸손하게 보이든 아니면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든,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예수께서 계시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항상 외형적인 꾸밈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나타내려고 애썼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1-18절에서 다루시는 문제이다.

외식에 대한 심판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외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어떻게 보시는가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외식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외식은 창세기에도 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세상이 창조될 때 그곳에 외식이 있었고 세상의 끝에도 외식은 있다. 이 외식은 모든 종교계 안에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계 안에도 있다. 12명의 주님의 제자들 안에도 외식자가 있었으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 외식자가 있었다. 이 외식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이것은 악한 인간이 종교인 행세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1) 구약에서

아모스 5장 21:24절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이 외식의 문제를 다루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제시하고 명령한 이 모든 것들을 보라. 이제 내가 이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는 너희가 이 모든 나의 명한 것들을 뒤틀고 굽게 했으며 그 목적을 완전히 변조시켰기 때문이다. 너희는 외적인 것에 전념했고 내부는 썩었으며 텅비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이며 위선이다.

2절과 5절 그리고 16절에 나와 있는 ”외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휘포크테스」(hupokrites)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이 말은 무대 위에서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배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배우는 그의 삶에서의사실이 아닌 것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만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6장 1상반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것에 주의하라.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아오마이」(theao-mai)이다. 이 단어의 처음 네 글자는 영어의 극장(theater)의 처음 네 글자와 같은데, 달리 말하자면 마치 당신이 극장에 놓인 어떤 전시물인 것마냥 관객들 앞에서 배우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의로운 행실을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라. 당신을 바라보는 주변시선 때문에 당신의 경건이나 신앙심을 꾸미지 말며, 거룩한 체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실 영적인 사기꾼이다.

이 외식의 문제는 선지자가 탄핵할 정도로 대단히 큰 종교적인 죄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이를 지적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패망(북왕국의 포로됨)의 주요 원인이 진실한 신앙심 대신 거짓 신앙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한 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일이 남왕국에도 일어났는데 이사야가 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1-18)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명하고 세운 모든 제물과 월삭과 제사와 분향들을 내가 싫어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의 행하는 것들이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너희의 마음이 눈처럼 희고 양털처럼 깨끗하기 전에는 내 앞에 나오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도 그 당시 많은 죄인들을 대하셨다. 하지만, 어떠한 죄인도 마태복음 23장 13-36절에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 것처럼 꾸짖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가장 통렬한 말을 영적 위선자들, 영적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 악한 마음에 경건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에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이사야 9장 17 상반절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이사야 10장 5-6 상반절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외식한 나라)를 치게 하며...”

이사야 65장 5절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달리 말하면, ”나는 거룩하니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내가 부정할까 염려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하여 ”내 코의 연기요...”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코로 연기를 마셔 본 적이 있는가? 코로 연기를 마시는 것은 굉장히 신경을 자극하게 한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로 인하여 굉장히 진노하셨다.

욥기 15장 34 상반절 ”사곡한(외식) 무리는 결실이 없고 ...”

욥기 8장 13 하반절 ”...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욥기 27장 8절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욥기 36장 13 상반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외식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 신약에서

주님이 사셨던 시대

주님이 계시던 당시의 유대교는 외식의 종교로 규정지을 수 있다. 마가복음 7장 6-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지적하셨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외식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나 그 마음은 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신하여 불합리한 외식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에 외식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외식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 맨처음 나타난 외식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 1-11절에 나와 있다. 그들은 판 것 중에서 사실 얼마를 감춰 두고 주님께 모두 드렸다고 속임수를 썼다. 하나님께서는 전 교회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을죽이셨다. 당신은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고 그 이상의 외식자는 없었지 않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장래에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니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초대 교회의 외식자들이 있었고 교회 시대의 끝에도 외식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버림받은 외식

우리는 성경에서 추한 외식자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1) 가인

그는 분명 농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위선에 찬 예배를 드렸다. 그는 많은 대가를 치르며 이 일을 했다. 그의 외식은 그의 의로운 동생을 죽여 놓고도 심히 화를 내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창 4:3-16).

2)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33절-15장 12절에 보면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를 죽일 모략을 꾸미면서 그의 아버지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을 볼 수 있다.

3) 요압

요압은 아마사의 입을 맞추면서 칼로 아마사를 찔러 죽였다(삼하 20:9-10).

4) 유다

유다는 이미 군병들과 자기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잡으라고 계획을 다 짜놓고서 예수께로 나와 입을 맞추었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다(마 26:48-49).

5) 마술사 시몬

사도행전 8장 9-24절에서 시몬은 거짓으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력이었다. 그는 그 마력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시몬의 외식을 드러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가인, 요압, 압살롬, 유다, 시몬 등 추한 외식자들의 외식과 그 방법들을 폭로하고 있다.

6) 바리새인과 헤롯당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기회를 찾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식을 했다.

외식에 대한 비유

외식은 성경에 한 번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성경은 외식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1) 누룩(눅 12:1)

이것은 온 덩어리에 퍼지게 하는 파급 효과가 큰 것이다.

2) 회칠한 무덤(마 23:27-31)

이 무덤은 더러운 썩은 것들과 뼈들이 들어 있지만 그 위를 하얗게 회칠을 해서 아름답게 단장을 한 것이다.

3) 회칠한 담(행 23:3)

이 담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것이어서 보기 흉한 색깔인데, 그 위에 하얗게 회칠을 한 것이다.

4) 평토장한 무덤(눅 11:44)

이 무덤은 평평한 데다가 풀이 많이 나 있어서 더이상 무덤으로 분별할 수 없는 무덤이다. 누구든지 그 위를 밟는 자는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5) 은을 입힌 토기(잠 26:23)

이것은 금이 간 것을 덮어 가리우기 위하여 은으로 입힌 것이다.

6) 가라지(마 13:38)

가라지들은 곡식들 가운데서 자란다.

7) 양무리 가운데 양의 탈을 쓴 이리(마 7:15)

8) 물 없는 샘(벧후 2:17)

모든 것이 정상같고 좋은 샘같이 보이지만 두레박이 내려갈 때 부딪혀 소리만 나고 물이 없는 빈 샘이다.

9) 죄를 덮는 탈(살전 2:5)

10) 직업적인 애도자(마 9:23)

유대인들의 풍습 중의 하나를 보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자기의 옷을 찢는 것이 있다. 역사가들은 유대인들이 애도하는 뜻에서 옷을 찢는 일이 아주 형식적이고 외식적이어서 그들은 옷을 찢을 때 서로 이은 곳들을 찢어서 다음날 쉽게 다시 꿰맬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다. 속으로는 슬퍼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슬퍼하는 체하는 것, 내적으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겉으로 의로운 체하는 것, 겉을 잘 꾸며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의 부패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다루신 것이다. 주님은 ”조심하라”(Beware)고 말씀하셨다. ”조심하라”고 번역한 것이 ”주의하라”(Take heed)는 번역보다는 더 나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도록 강하게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의로운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조심하라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말은 어떤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각하고 엄한 불같은 경고이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왜냐하면 조심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결과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외식에 관한 말씀의 전후 관계

이 외식에 대하여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산상 수훈(마 5-7장)의 전후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 후의 모든 세대들에게 의의 진실한 표준으로서 주신 것이다.

1) 의의 표준을 세움

의의 기초

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마 5:1-12) 주님은 ”의의 특성”으로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의의 영향”으로 옮겨 가셨으며(세상의 소금과 빛 / 마 5:13-16) 그런 다음 ”그 의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성

여기에서 의의 특성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청결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도, 화평케 하는 자들도 아니었으며, 의에 주리지도 긍휼히 여기지도 않았다.

영향

의의 영향은 빛과 소금과도 같다. 이것은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상을 부패하게 하고 어둡게 만드는 부분들이었다.

표준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주님은 의의 표준들에 대한 목록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표준들 어느 것 하나도 맞게 생활하지 못했다. 그들의 특성, 그들의 영향, 그들의 의의 표준은 전적으로 하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의의 균형

바리새인들에 의해 오용됨

마태복음 6장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의의 표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바리새인들이 행하고 있는 의에 대해서 더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5장에서 주님은 ”이것이 너희가 가르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렇다”고 말씀하시며, 6장에서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표준은 그보다 우월하다”고 하셨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의 도덕을 다루셨고 다음에는 그들의 신앙을 다루셨다. 주님은 그들의 삶에서 그 도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셨다. 그들의 신학이 가짜였기에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도 거짓이었다.

참다운 종교는 도덕적인 표준과 그에 대한 합당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마 6:2, 5, 16)이 표준 이하인 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신학과 종교적인 실행이 적합하지 못했다.

기독교계에 의해 오용됨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신학과 그에 따르는 실행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는 오직 실행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헌금을 조금하고 예배의 절차를 마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도덕적 표준을 가져야 한다.

또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도덕적인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종교성 없는 기독교라고 부른다. 이들은 반 교회주의자들이며 반조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무(無)에서 사회적 방법으로 도덕을 도모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 균형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적절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교제가운데 기도하고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서로 적절하게 실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2) 우월한 신앙의 표준

예수께서는 하나님 외에 인간사에 있어 아무도 세울 수 없는 신앙의 표준을 세우셨다. 이 표준은 인간이 세운 모든 표준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도덕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 선생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도덕적인 표준보다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5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2절에서는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6절에서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종교의 실행에 있어서도 그들 것보다는 우월해야만 했다. 그래서 주님은 듣는 자들에게 당시 그들 가운데 있던 표준과, 실행과, 의보다 우월한 그분의 표준과 실행과 의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전 조직에 대한 엄청난 고발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 대화를 도덕과 연관된 의에서 종교의 실질적인 행실과 연관된 의로 옮기셨으며, 이 종교적인 실행의 의에서 당시 사회적인 의로 옮기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당신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에 있어서 신학과 신앙과 매일의 접근 방법이 부적당하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25절에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주님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 이는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에 재물을 쌓는 일에 몰두해 있었고 그들의 생활을 염려하였다.

내가 이것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신학이나 신앙이나 예배는 인간들이 만든 그 어떤 조직이나 신앙이나 신학보다 우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 기준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다면 나는 이방인이 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방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자.

도덕

마태복음 5장 47-48절에서 예수께서는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표준보다 더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표준보다 우월한 것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주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그 내용이나 예배나 매일의 삶에 있어 세상의 종교나 비종교적인 어떤 체제가 전혀 보지도 못한 우월한 표준을 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외식에 대한 선고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어 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편협한 분이셨다. 그분이 말한 모든 것은 진리였으며 다른 것들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은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하셨다.

이 설교에서 그분은 ”너희 사람들은 이 표준에 이를 수 없다. 너희는 내 나라의 표준에는 비참하고 형편없이 미달된다. 나는 왕이며 왕으로서 나의 왕국을 제시한다. 하지만 너희가 내게 주는 것들로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너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너희들의 노력으로는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너희들의 선택과 종교 그리고 매일의 삶은 충분하지 않다. 너희는 너희들의 죄를 씻고, 깨끗하게 하고 너희에게 나의 나라에 맞는 새로운 성품을 줄 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면에서 산상 수훈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지금 산상 수훈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실행에 대해서살펴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의를 행할 때(종교적인 활동)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1). 주님은 그에 대한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곧 구제(2-4절)와 기도(5-15절)와 금식(16-18절)이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세 가지 예배의 요소를 지적하셨다. 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행동으로서 우리 신앙과 더불어 행해져야 하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행동으로서 신앙을 갖고 해야 하는 것이며, 금식은 우리 자신에 관련한 것으로서 신앙으로 행해야 한다. 금식은 자기 부인, 훈련,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하나의 고행 또는 금욕을 다루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며, 구제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아주 적절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삶인 예배의 요소들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상징적인 순서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먼저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심령, 그리고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은 자기 부인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도 올바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로부터 구제가 나온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제로부터 기도, 기도로부터 금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씀하신다.

2, 5, 16절에서 ”너희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라고 되어 있는 것에 주의하라. 주님은 ”만일 너희가”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할 때에 ...”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이는 그것들을 하나의 예배와 영적인 섬김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처음 1-4절 안에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다. 곧, 의의 실행, 종교의 위험성, 보상에 대한 약속이다.

의의 실행(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위)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성경에서의 묘사

성경은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도승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망각하고 고난당하며 어떤 우리 안에 갇혀서 그 안에서 의를 행하는 금욕주의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어떠한 의로운 행동도 하지 말고 안보이는 데 가서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사 58:2)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달리 말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그 의로운 행실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소원

당신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목적 또는 의도를 말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의를 행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서 당신을 좋게 봐 주도록 의도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1) 확실한 동기의 업적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 사이에는 상당한 대조점이 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실)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은 ”말씀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동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6절의 긍정적인 면은 사람들이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며,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2)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유혹

외식의 삶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 경고에 관하여 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필요한 경고이다. 모든 선행에 외식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 외식이 침범해서 더럽혀지고 부패하지 않을 선행은 하나도 없다.” 나도 내 삶에 이러한 시험을 받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을 받으셨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에서보다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가르친 때도 있다.

당신은 당신의 헌신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 때문에, 구제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로 당신의 헌신이 진실인 것을 보이려고 구제한 때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때로 미사여구로 가득찬 긴 기도를 드리고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흉하게 한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끔 신령한 것들과 혼돈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 외식의 시험을 받으며 때로 위선 가운데 행한다.

존경받기를 좋아함

어거스틴은 ”존경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을 죽이는 독약이다. 악덕은 다른 악한 행실을 가져오는데, 이 악덕이란(외식) 선한 행실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외식을, 악덕을 덕으로 색칠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다. 기도할 때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공 장소에 서서 크게 기도함으로 그들이 얼마나 신령한 자들인가를 알게 했으며, 금식할 때에는 얼굴을 거의 반쯤 죽은 사람의 모습처럼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얼마나 거룩한 사람이냐”는 말을 하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3)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두가지 죄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은 서로 다른 죄들을 다루고 있다. 5장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겁내는 죄(겁장이)가 우리로 그와같은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소금과 빛이니 겁내지 말고 당신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주님은 외식에 관한 죄를 다루고 계신다. 나는 부루스(A. B. Bruce)가 이 두 가지를 알기 쉽게 하나로 말하였다고 본다. ”우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시험이 오면 숨겨야 하고 숨기고 싶은 시험이 닥치면 나타내야 한다.”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의 충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그러한 시험이 올 때에 그 시험을 의로운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두 제사

문제의 중심은 바로 마음의 문제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둘 다 똑같이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이 두사람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한 사람은 기쁨이 되고 향기로운 냄새의 제사가 되며 다른 사람은 그분의 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될 수 있다.

삶에서 드러남

1) 말씀에 의해 조명됨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나는 것은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바울은 자기의 거듭남에 대한 소식을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들었다고 말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4절). 바울은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다.

로마서 10장 9-10, 14절 우리는 우리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 우리는 공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고 수도승이 되어 무용한 망각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엡 2:10). 다만 우리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2)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됨

주님은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공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주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루하루를 흠없고 위엄있고, 죄없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을 행하셨다. 그 모든 가운데서도 그분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라고 말씀하셨다(요 5:30).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를 행하여 당신의 빛이 비취게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그들에게 인정받고 더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조심하라.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라파엘 Raffaello Sanzto di Urbino (1483 ~ 1520)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수업은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 <삼미신> 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 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 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 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 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 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 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건축에도 손을 대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 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품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성숙한 르네상스의 도달점

독창적인 구도와 인간미 넘치는 묘사 : 세련되고 새로운 조화의 품격을 빚어낸 천재. 특히 많이 그린 '성모자상'은 조화와 독창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청량감과 우아함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세속적인 측면으로 서민들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다.
식스투스4세의 조카였던 줄리오 2세(율리우스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아폴로상. 라오콘상등)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벨베데레 정원)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다. <아테네 학당>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른다.


<자화상>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의 초기를 장식하고, 페루지아 시대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카스텔로 시의 성 프란체시코 성당을 위하여 당시의 명문 알바치니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구상에 있어서나 그 구도에서도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성 베드로에 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그림의 특징은 전면과 후면과의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통일시키고 있고, 공간의 원근과 넓이를 통합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배후에 있는 사원 건축물의 구조에 따라 그 기본선이 광장을 규제하고, 또 전면의 인물 배치도 이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공간성에 대한 엄격한 탐구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聖母子(성모자)와 아기 聖(성)요한>
라파엘로의 성모자 회화 작품 중에서 다음의 두 작품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이다. 시원한 초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성요한이 서로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다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 목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성 모자의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제목은 어린 요한이 쥐고 있는 검은 방울새에서 비롯되었는데 가시나무의 가시를 먹는다고 하는 검은 방울새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앉아 있는 성모가 화면의 중심이 되고, 그 앞의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안정감을 주면서 그 좌우로 자연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을 같은 주제를 가진 '목장은 성모', '아름다운 여 정원사'와 비교해보면 크기가 가장 작고, 구도는 세 점이 모두 비슷하지만 명암의 대조가 가장 강하며, 명쾌한 색채보다는 통일된 색감을 주고 쓰고 있다. 친구의 결혼 선물로 그려 준 이 그림은 지진으로 인해 17조각으로 파손되어, 복원할 때 가필되었으나 라파엘로 필적의 정확한 모습이 잘 나타난 걸작 중 하나이다.

<어린 코퍼와 마돈나 1505년, 패널에 유채59.5 x 44cm 워싱턴 내쇼날 갤러리>
온화하고 자애로운 눈빛의 이 성모자 상은 라파엘로의 많은 성모자상 중 하나이다. 그란듀 카의 성모상과 구도가 유사하다. 성모상에는 하나의 형식이 있다. 옷은 주로 빨강과 파랑 색 이며, 성모의 발은 항상 맨발로 표현한다. 맨발은 겸양 또는 땅을 뜻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 1507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이 성모화는 가련미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이름이 높다. 지혜의 상징인 책을 든 성모 마리아와 요한은 꿇어앉아 동경어린 눈길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 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요한의 모습을 잡는 동시에 성모의 얼굴로 유도된다. 성모마리아 가 들고 있는 책은 <솔로몬 지혜서>로 지혜와 지식과 교양이 있음을 나탄낸다.

의자의 성모
원형 화폭의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성모를 그 자신이 사랑했던 포르나리나를 닮은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녀의 단아한 이목구비와 그윽한 눈길이 인상적이다. 처녀같기도 하고 어머니같기도 한 여인의 미묘한 분위기는 성모의 신비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절묘하게 혼합해 놓은 것 같다.

서명의 방 작품들

<바티칸궁 서명실 천정도>

<아테네학당 1510∼11년, 프레스코 579.5 x 823.5cm >
이 작품은 율리우스 교황의 스탄자(거처)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부는 거대한 홀로 이루어진 하나의 바실리카(로마의 공회당)처럼 인물 초상화, 브레만테의 건축 기법, 조각, 실내 장식 등을 과학적 원근법을 적용시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꾸며놓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아테네 학파"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군상을 각자의 성격에 맞는 포즈와 행동으로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중앙의 거대한 아치를 배경으로 소실점이 가운데로 모이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철학자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를 옆에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이데아(Ideal)를 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향해 자연과 생물에 관한 학구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구성에 있어 수평선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계단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반라의 차림으로 누워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책상에 기대어 필기를 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으며, 바로 뒤에는 잣대를 든 피타고라스가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는 유클리드가 컴퍼스를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약간 뒤쪽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라파엘의 자화상이 슬쩍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등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져 있는 이 그림은 네 개의 수평적 계단 위로 서 있는 인물들과 아치를 받치는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평면적으로 넓게 퍼진 공간 등 모두 플라톤이 있는 위치로 아치가 순서적으로 후퇴하는 양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은 주제의 뛰어난 형상화와 조각적 입체감이 균형감 있게 하나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성체논의 1509년, 프레스코 바티칸 미술관 >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성체논의(왼쪽 벽)와 아테네 학당(오른 쪽 벽)으로 중앙 윗쪽에 그리스도 지상의 옥좌에는 성모와 세례 요한이 좌우로 반원형의 양 날개에는 왼쪽부터 성 베드로,아담,복음성의 요한,다윗,성 로란, 성 지오르지오,성 에티엔느, 모세,성 자크,아브라함,성 바울로 가 차례로 앉고 그 위에 천사들이 둘러서 있다. 하단에는 성 그레고리오,성 제롬,베르나르,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위인들과 철학자,시인 등이 있으며 단 테, 라파엘로 자신과 스승 페루지노 등이 그려져있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마태오의 복음서》 17장 및 그 밖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이 성화는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간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하고, 거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에는 “그 때 예수의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마태오 17:2)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의 하나이다.

이 장면은 6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편도(扁桃) 모양의 만돌라(대형 만돌린) 속에 그려져 있다. 공중에 뜨는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성화에 묘사한 사람은 B.조토였으며, 바티칸의 피나코테카에 소장되어 있는 라파엘의 변모도(變貌圖)가 가장 극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공중에 뜬 그리스도가 화면 위쪽에 그려 있고, 산 위에는 겁에 질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세 제자, 화면 아래쪽에는 이 장면을 보고 경련을 일으킨 아이와 사람들의 무리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 1514∼15년, 캔버스에 유채 82 x 66cm>

라파엘로가 제작한 초상화 중에서 걸작의 하나이다. 로마 체류시의 초상화로서, 강한 개성의 표출이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은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저명한 문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밀라노와 우르비노 궁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정신론의 자로서도 유명하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현명한 자기의 친구의 모습을 예지에 차 있는 표정으로 보여 주고, 활달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눈의 총기로 시사해 주고 있다. 확고한 인물의 자세는 안정감을 나타내 주고 있고, 차분한 색채는 인물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되어 모사를 한 바 있으며, 그의 자화상 및 초상화의 영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도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한다.
이 작품은 루이 14세의 컬렉션 목록에 있던 작품으로, 1661년 이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의 모델은 귀족의 이상을 담은 『조신(朝臣)』의 저자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이다. 영웅적인 군인이자 문인이었던 발다사레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귀족이었다. 그는 1528년 발간된 『조신』에서 이상적인 미학과 정신의 완전함을 주장했는데, 이는 라파엘의 회화관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감과 우정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대공의 성모>를 그린 지 5∼6년 후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라파엘의 초상화는 조금씩 변화의 양상을 띤다. 이 작품은 비교적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대공의 성모>에서 사용되었던 극명한 명암 대조법은 배제되었으며 고전적인 균형과 절제가 돋보인다.
기품 있는 자태와 더불어 우아한 의상과 모자는 그가 귀족의 신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살짝 튼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킨다. 라파엘은 세밀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한 대신 얼굴 묘사에 있어서 특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켰다. 맑은 눈빛, 지긋이 다문 입술 등 온화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통해 모델의 내면 세계까지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면을 응시한 모델에게서 화가에 대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교황율리우스2세의 초상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소장>
바티칸 궁의 서명실 천정화를 그릴 당시의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총애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레오 10세 1518 년, 패널에 유채 154 x 119cm 우피치미술관 소장.>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있을 때 바티칸 궁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라파엘로는 레오 10세 때 더욱 신뢰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이은기의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색채 표현의 비교-


라파엘은 붉은 벨벳의 밝은 부분은 붉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함으로써 상체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티치아노는 밝은 부분을 흰색으로 어두운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고 있다. 라파엘의 방법은 소묘와 고유색을 중요시한 화법이라면 티치아노의 방법은 햇빛을 비춘 벨벳의 인상을 중요시한 화법이다. 티치아노는 짧은 기간의 로마방문기간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붓터치가 더욱 빠르고 즉흥적이었다고 하는데 티치아노는 오히려 이 방법을 즐긴 것 같다. 그는 이후에도 이러한 효과를 살리고 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기사의 꿈1500년경. 목판, 유채 런던, 국립회화관 >
라파엘로는 어려서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에게 그림을 배우고 페루지 노 문하에서 수년간 그의 화풍을 익혔다. 이 그림은 페루지노풍의 평온하고 감미로운 시정 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헤라클레스' 또 기타 몇 주제로 해석되고 있다. 우의적(友誼 的)인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성숙기에 다가서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후기 그의 미술의 능숙한 표현력을 엿 보게 하여 준다. 라파엘로 미술의 발전은 그의 성장 과정의 도표로 볼 수 있는 우르비노, 페루지아, 피렌체 시 등으로 엮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겨 갈 무렵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에 나무 하나가 배치되어 좌우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고, 그 밑에 기사가 누워 있으며, 또 좌우로 인물이 배치되어 삼각형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삼각형 구도를 통하여, 농촌의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원근법이 이에 적용되고 있다. 간결한 구성과 시정(詩情), 그리고 환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많은 밑그림과 구상이 필요하였고, 또한 완성된 성과에 대한 논리도 많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의 라파엘로의 화풍은 극히 종교적인 명상과 고귀한 정관의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이 그림은 너무나 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극적인 세속성까지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라파엘로 작품에서 특성이 되고 있는 구도의 통일성과 그 간결한 일체성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고, 사방으로 분산되는 동세로 복잡한 선을 구성하고 있다. 부드러운 음율적인 선은 여기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체는 미켈란젤로의 < 피에타 像>을 연상시키며, 한편 기절한 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작가의 <聖家族>에서 빌어온 상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나, 지적된 점은 양자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젊은 부인의 초상 1518-1519 목판 유채 85x60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 애인 포르나리나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에서는 시에나 태생으로 로마 빵집 아가씨였던 마르가리타 루티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매너리즘적 기질이 강하게 나탄난다. 팔찌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문자가 새겨져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트리나>

카트리나는 4세기 초 그리스도 박해 시대에 순교한 전설적 성녀로서, 로마의 황제 앞에서 기독교를 변호하고 50명의 철학자들과 토론 설파하여 마차에 몸을 찢기는 형벌을 받고 참수당한 인물이다. 성모는 붉은 옷에 푸른 망토를 걸치지만 성 카트리나는 반대로 푸른 옷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는 옷 주름이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라파엘로의 이 붓끝의 능숙한 솜씨와 커다란 양감에 의한 표현은 바티칸의 대벽화로 연결된다.

폴리그노의 마돈나 갈라티아 정령 가톨릭 추기경의 초상 시칠리의 스파시모 예수의 죽음동정녀의 즉위식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5.html )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God's Timeless Time) 죽은 뒤에는 '뒤' 가 없습니다
    뒤나 앞과 같은 말은 우리의 유한한 생애,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사는 우리의 생애에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무한한 시간을 뜻하는 하나님의 '시간' 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므로 내세에 관한 추측은 단순히 추측일 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면, '처음' 도 없고 '뒤' 도 없으며,
    '여기' 도 없고 '저기' 도 없으며, '현재', '과거' 또는
    '미래' 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종말,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제는 시간에 의하여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뢰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복귀하기(Restored to Eternal Life)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선함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기를 원하십니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네" 라고 대답할 생각이
우리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중단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하시고,
또 우리의 이름으로 완전히 "네" 라고 대답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복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곳에는 지독한 상사도 없고, 복수심에 불타는 적도 없으며,
우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잔혹한 폭군도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집으로 오기를 간절히 열망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항상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101. 언약의 사자 (Messenger) 우리 예수님

 

말라기 3: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당신은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약간 어려운 질문인데 그 답은 세례요한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점은 세례요한은 구약에서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이사야 선지자도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말라기 선지자는 이사야의 예언과 함께 여호와의 음성을 알려준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말 3:1).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선지자로서 구약 선지자들이 외쳤던 똑 같은 주제인 죄, 회개, 구원을 외쳤다. 그는 그 당시에 너무나 영적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꾸짖으며 광야에서 외쳤다.

 

중요한 것은 말라기 3장에서는 세례 요한 말고 또 다른 사자 (Messenger)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바로 언약의 사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사자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다 포함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초림하신 예수님을 원치 않았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남은 자’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능력 가운데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 그 때가 되면 주께서 우리의 죽을 몸을 구속하실 것이다(참조: 고전 15:51-54). 그때 그는 “갑자기 (KJV 은 말라기 3:1절의 히브리어 피쏨갑자기로 옳게 번역하였다)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 13:36-37)고 하셨다. 

 

말라기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그의 성전으로 오신다. 초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또한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냄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 그러나 “홀연히” 주님은 주의 살아있는 성전인 주의 교회를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 3:2).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지금 우리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 속에서 연단을 받고 있다. 우리는 주의 성령에 의하여 깨끗하여지며 주의 말씀과 여러 불같은 연단에 의하여 거룩하여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하길 말라기가 예수님을 언약의 사자라 말하였다면 어떤 언약을 의미하느냐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물론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말한다. 주님은 모든 언약을 다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아담의 행위 언약을 완성하셨다. 우리 주님은 믿음의 아브라함의 은혜의 언약을 이루셨으며 모세의 율법의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 의를 획득하셨고 그 언약 속의 의식 및 제사 제도가 예표하는 바를 다 성취하셨다. 우리 주님은 다윗의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예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실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새언약도 완성시키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예수님은 모든 언약의 주가 되신다!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남은 마지막 언약은 복음의 새언약이다.  

    

지금까지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 보았다. 이 놀라운 연구를 마치면서 필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구약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우리의 귀한 구세주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각 성경마다 예수님을 발견하여 만나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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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목사는 1979년 영등포교회 은퇴 기념으로 낸 ‘여호와 릿시’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목회결론으로 바른 목회상을 기록하였다. 여기 서두에 말하길, “바른 목회(자)상을 모든 교인들도 같이 갖게! 이것이 모든 목회자들의 의도일 것이다. 낸들 그렇지 않으랴. 어떤 목회상이 바른 목회상일까? 여기도 보는 관점이 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에 교시한 대로를 바로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역시 자신이 말하는 목회(자)상 역시 주관적일 수 있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표준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는 목회의 표준은 다음과 같은데, 1. 가변적 요소와 불가변적 요소로서, 즉 주님, 성경, 성도이다. 그 밖에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주, 객관의 조화로서, 예를 들면 자신의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면 안 된다. 3. 원심력과 구심력의 조화로서, 이는 본인의 입장으로서 보수신앙의 원 말뚝을 중심으로 신학, 사상에 있어 진보도 가하다는 것이다. 이는 본인의 원칙이요, 이것이 모두는 아니고 보다 성경에 입각한 지도력, 목회자상을 필요로 하다 하겠다. 우리는 먼저, 이를 근거로 그의 지도력과 목회자론을 다루어 보도록 하자.


▲2013년 방지일 목사

지도력(리더십)

한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선 지도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세상조직이 아니고 영적인 공동체이기에 영적지도력이 필요한 것이리라. 방지일 목사가 지도력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그의 여러 글들 가운데 교회 지도력에 대한 중요한 요소를 언급하였다. 필자는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도력, 둘째는 권위 있는 지도력, 세 번째는 순종의 지도력이다. 목회리더십에 대한 학문연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1세기 변화하는 문화에 대응하는 목회리더십의 필요에 의해서 발전하였다. 초기 한국 장로교에서는 그런 학문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다만 성경의 가르침대로 목회하며, 스스로 터득하며 목회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방지일 목사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그의 시대에는 그런 책도 없을뿐더러 오직 성경에 따른 목회,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오늘날 목회리더십에 대해 블랙커비는 말하길,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 방법대로 하나님 뜻 안으로 이끌어 줄 자를 찾고 계시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심을 믿는 리더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사람들을 움직여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리더들을 필요로 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리더,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도하는 자라 하였다. 그렇다면 방지일은 어떤 자를 이상적인 리더라 생각했는가.

첫째,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리더십이다. 그가 말하는 성역은 “하나님이 일 하신다”는 말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목회를 자신의 힘으로 하고, 자신의 생각, 계획대로 하고자 하는 것을 그는 지적한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이는 착각이다는 것이다. “성역을 내가 하는 줄로, 내가 성역인 줄로 착오하는 가운데 사는 수가 많이 있다. 목회자의 어느 일이나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일 뿐이어야 한다. 그가 타산하시고, 계획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것이 성역이다. 내가 타산하고 설계한 것은 내 일이 되는 것 뿐이다.” 그는 여기서 목회는 내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설교하고, 순종하고, 목회하는 자라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골방에 자주 출입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둘째, 권위 있는 리더십이다. 이는 권위주의가 아니며, 이 권위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만일 내 권위를 내 세우면 그는 웃음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권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는 누구를 압도하는 것으로 사용해선 안 되며,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권위로서 말씀을 권하며,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때 교인들이 그 권위에 순복하는데, 이런 권위를 가진 목회자는 1)희생해야 하며 2)말이 많은 것보다 말수가 적어야 하고 3)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잘 난 체 하는 것보다 부족하게 보이는 것이 좋다. 이런 요소는 언제나 기도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권위는 기도로서 세워지는 것. 즉 말씀에 충만하고 기도의 사람일 때 진정 하늘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게다.

셋째, 순종의 리더십이다. 그는 신앙은 순종이라고 한다. 만일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다. 방지일 목사는 목회자는 순종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며, 순종치 못함으로 실패한 이를 지적한다. “맡은 이들은 시키시는 대로 순종할 것 뿐이다. 개중엔 탈선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맡긴 것을 빼앗긴 예도 있는 것이다.” 사울을 그 예로 든다. 이는 일반신자도 마찬가지인데, 주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신앙, 여기에는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저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주님의 말씀에 그의 뜻에 그의 분부에 그저 순종할 뿐이다. 순종엔 이유가 있어선 안 된다.” 목회자가 먼저 순종의 본을 보일 때, 성도들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물론, 이 밖에 목회자가 지녀할 리더십의 요소가 있겠지만, 대부분 이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영적 리더십으로 섬김의 리더십, 종의 리더십, 비전의 리더십 등을 말하나 위의 세 가지 범주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리라. 이제 그가 말하는 목회자상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는 목회에 있어 교육과 훈련에 관련된 것이기에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론

그렇다면, 바람직한 목회자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일종의 목회자상이라 할 수 있다. 곽안련 선교사는 목회자의 성격에 대해 말하길, 목회자는 1)애타심이 있어야 2)극기해야 하며 3)겸손해야 하며 4)충성스러워야 하며 5)판단력과 6)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7)학자적인 정밀성이 있어야 하고 8)희망과 쾌활성이 있어야 하고 9)신사적인 자연스런 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야말로 목회자는 교인들의 수준보다는 높아야 하고, 무엇이든지 본이 될 만한 인격과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방지일 목사 역시 목회자는 실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말하길,

“교역자로 힘차게 일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근자에 젊은 교역자들 중에 학력의 실력을 크게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교회도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도 못한다... 보통 상식에도 무식하면서 주름 잡혀 가지고서는 대중을 이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회자가 실력을 위하여 계속 공부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영력임을 강조한다. "아모스 선지자는 무식한 농부로되 불리움을 바라고 일한 그 실력을 뉘게 비길까. 오늘 목회의 실력을 학력에 중점을 둘 수 없다. 영력에다 두어야 할 것이다.” 그는 목회자는 세상 실력도 필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력이다는 것이다. 오늘날 담임목회자를 청빙할 때, 영력이 아니라 세상 실력을 보는 것은 유감이며, 그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꼭 집어 지적한다. 영력을 유지하려면 모험적으로 기도하고 모험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그에게 있어 바람직한 목회자상의 전제는 영력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어서 목회자는 말씀에 전문가여야 하며, 기도에 전문가여야 하고, 대중들을 이끌 수 있는 주관, 이것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양심, 성경, 기도의 세 가지 표준에 따른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자기주관이 없다면 어찌 교회를 지도하여, 교인들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주관을 가진 목회자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주장, 즉 세상적 욕심,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목회자상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다시 본질로, 주님의 마음을 가진 목회자상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과 기도, 그리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용기, 모험이 필요하리라.

목회자의 자세(태도)

그렇다면, 목회자가 지녀야 할 자세,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선 매우 다양한 교훈이 있을 수 있으나 목회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목회자의 기본은 정직, 성실, 충성, 근면, 사랑, 희생 등 다양하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목회자가 특별하게 지녀야 할 자세, 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 위탁이다. 그는 목회를 성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성역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이는 착각이요 하나님이 친히 하시므로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회는 그가 타산하시고, 계획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것이 성역이다. 내가 한다면 그것은 목회가 아닌 내 사업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를 주님께 완전히 위탁하는 믿음이 필요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골방에 자주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일의 사명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기 지식, 상식, 사상으로 목회하고자 한다면 이는 큰 착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목사는 영을 건지는 일이 그 본연의 사명이다. 그런데 만일 목회자가 영의 구원을 망각하고 그 주변적인 일에 몰두한다면 그 사명을 잊어버린 것이다. “주의 일꾼인 목사들은 죄인을 구해내는 일이 그 첫째 일이다. 순서가 있을 수 없다. 전부인 것이다.” 목사의 사명은 죄인을 건져내는 것이 제1의 사명이오, 이것을 감당하면 이것이 곧 사회와 국가, 민족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망각하면 성직의 배반이요, 해를 끼치는 자라고 단언한다. 왜 목사가 학위에 연연하는지, 왜 물질 앞에서 비겁한지, 왜 욕심을 내는지. 다시 한 번 목회자는 자신을 돌아볼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셋째, 늘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가 아니다. 목회의 힘, 영력이 어디에서 날까? 지혜가 어디로부터 올까? 목회는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다. 목회의 본래적 사명은 죄인을 구령하는 것이니 그는 목회자는 늘 엎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목회자는 권위도 필요 없고 정도 필요 없다.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혹 정서의 호소를 해 보기도 하고 교권을 써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만 못하다.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엎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언제든지 엎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도 돌이키시고 들어주신다.” 아멘. 주여,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모두 사역할 때, 엎드려 목회하게 하소서.

넷째, 목회는 순종이다. 신앙은 순종이라는 말이 있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목회자가 실력이 있고, 성경을 잘 풀고, 설교를 잘하고, 행정에 탁월해도 이것이 빠지면 목회는 안 된다. “우리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의 시키시는 대로 순종만 해서 족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목회는 내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며, 내가 하면 그것은 목회가 아니고 내 사업이 된다.

정리하면, 오늘날 목회자 후보생들 가운데는 비상한 비전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후에는 대형교회를 꿈꾸며, 지명도 있는 목회자를 롤 모델로 목회를 하려고 한다.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이 시대에 참된 목회자는 실력, 외모, 말재간, 능력에 있지 않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교회 목회자는 지금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리라. 목회의 본질은 영혼을 위한 일이요, 죄인을 회개시키고, 그 영혼을 살리고, 주님의 수준에 이르도록 돌보는 것이 목회이므로, 이를 성역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방지일 목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그는 목회자가 사명을 잊으면 성직의 배반이라 했다. 이는 곧 삯군이라는 것이다.

교훈/ 1.목회는 목회자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
2.목회자는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3.목회는 하나님의 일이기에 그 분께 위탁해야 한다.

조경현 목사(세움공동체)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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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ny Meléndez (1962년 1월 9일생)

 

     니카라과 출신의 Tony melendez 라는 사람입니다.

     그를 임신중이던 어머니가 입덧 진정제를 과다 복용하는 바람에 양팔이 없는

     기형으로 태어났죠.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16살때부터 발로 기타를 치기 시작합니다.

     Tony는 로스 앤젤레스에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의 방문이 예정되었던 즈음에

     행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눈에 띄어 1987년 9월 15일 교황을 위해 기타를

     연주했고 그가 연주하자 장내는 흥분과 긴장 그리고 환희에 휩싸였으며

     이에 감동한 교황은 Tony의 연주에 키스로 화답해 주시고 청중들 앞에서 

     그에게 Gift of Hope(희망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죠.

     "Gift of Hope" 그때부터 그의 별명이 되었답니다.

 

     현재 그는 기타리스트로써 타고난 능력과 대중을 위한 작곡가로써의 재능을

     활용하여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간증하며 신앙 생활과

     음악 활동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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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의 ‘아름다움’

- 권혁승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자기자리를 지키면서 본인의 몫을 다하는 것은 아름답다. 냄새나는 소 여물통을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외양간 제 자리에 놓여있다면, 최소한 가치적 측면에서는 아름답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연의 임무와 역할이 있다. 제 몫을 다하는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움’의 주체들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가 남긴 명적 ‘만종’에는 노동의 신성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멀리 교회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오자 감자캐던 일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기도하는 농사꾼 부부의 모습은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다. 

이 그림에서 ‘아름다움’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고와서도 아니고 외모가 뛰어나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흙과 땀이 밴 작업복 차림의 평범한 농부들이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것은 종일토록 일한 삶의 한복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 때문이다. 하나님 경외의 신앙 곡선과 열심히 일하는 성실 곡선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있는 그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사람은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에게 주어진 본연의 사명은 다른 피조물을 보살피는 다스림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도 그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첼렘’인 ‘형상’은 고대 사회의 통치 관습과 관련이 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멀리 떨어진 변방 책임자를 임명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왕의 형상은 곧 위임된 왕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들도 위임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다. 위임된 통치권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긴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신이 직접 창설하신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경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는 땅을 기경하며 가꾸는 노동을 뜻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주인에 대한 종으로서 섬김을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예배’라는 전문용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경작하다’와 ‘지키다’가 서로 짝을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가꾸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의도대로 그 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아담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통치권이 행사된 대표적인 예는 생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이름은 곧 존재라는 것이 성경시대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름의 부여는 존재를 실제화 시키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여받은 대상의 운명까지도 책임지는 전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지배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며 창대케 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복의 근원이 된다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창 12:2).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다른 민족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고대 시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역할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받은 것은 그런 약속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출 19:6).

사명과 함께 축복의 약속이 주어지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배려이다. 아담에게 다스림의 사명을 주실 때에 축복이 선행되었으며(창 1:28),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는 명령 역시 그곳에서의 풍성한 삶을 마련하신 이후였다(창 2:9).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는 사명을 주시면서도 큰 민족을 이루며 창대하게 된다는 보장이 있었다(창 12: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나라 시명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값진 보물 ‘세굴라’로서 절대 보호를 받게 된다는 약속과 함께였다(출 19:5).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함께 보장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본적 능력은 각자가 타고난 은사이다. 은사를 따라 사는 것이 바른 봉사의 길이며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요즈음 우리 가치관의 혼란으로 인하여 성실히 자신의 사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점차 퇴색되고 있다. 주변 분위기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이 은사의 활용으로 주신 사명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산 위의 동네의 동네처럼 숨기우지 못하고 널리 드러나는 ‘세상의 빛’(마5:14) 곧 소명의 ‘아름다움’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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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세상에 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때로는 피하고 싶은 진실과 맞닥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냥 모른 채 살면 좋겠지만 진실은 너무 끈질겨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2) 비상한 용기없이는 불행의 늪을 건널 수 없다.
누구나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겨내지 못할 불행도 없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기연민을 이겨낼 용기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3) 가장 견고한 감옥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일을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갖가지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며
우리를 뒷걸음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누가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4) 완벽주의가 좋은 인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에서는 완벽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오히려 해가 된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는 좋지만 친구로서는 꺼려지는 법이다.

 

(5) 사랑은 인생에 처방하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순간
살아볼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신비로운 존재가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견뎌야 할 모든 시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바로 사랑이다.

 

(6)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나쁜 일에 빠져드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거기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것일수록 그것을 얻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7) 방황하는 영혼이라고 해서 모두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인생에는 미처 다 가볼 수 없는 여러 갈래길이 있다.
그 여러 갈래길 사이에서 잠시 이탈하거나 행로를 변경하는
것은 방황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한 모험일 수 있다.

 

(8) 짝사랑은 고통스러우면서 낭만적이지도 않다.
애정에 대한 과도한 욕구가 때로는 짝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 소통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혼자하는 사랑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9)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체념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변화를 꾀할 수 없다.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0) 만일 지도가 지형과 다르다면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모여 인생의 지도를 만들어나간다.
결국 인생이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맞게
머리속의 지도를 수정해나가는 과정이다.


(11) 지금 하는 행동이 미래를 말해준다.
나와 다른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먼저 행동을 살펴야 한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그 사람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12) 감정적인 행동을 이성적으로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스스로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그 행동이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편견이나 아집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13) 나에게 일어난 일의 대부분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것도,
그 속에서 구해내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14) 모든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은 무심한 사람이 쥐고 있다.
어떤 인간관계든 깨어질 때는
어느 한쪽이 먼저 마음이 떠나기 마련이며,
그 사람이 오히려 강자가 되어
원상회복을 위한 약자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린다.


(15) 함부로 베푸는 친절이 상대를 더 망칠 수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친절이나 보호가 아니라
절망을 이겨내겠다는 본인의 강력한 의지다.

 

(16)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용기를 내야 한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데도
부딪쳐 싸워낼 의욕이나 용기가 없어 내버려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충분히 불만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17) 열 번의 변명을 하느니 한 번의 모험을 하는 것이 낫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왜 그 일을 할 수 없는가에 대한
변명거리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그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모험심으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18) 지금 여기에서 좋은 것이 영원히 좋으리란 법은 없다.
뛰어난 두뇌, 유머감각, 완벽주의 등
어떤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던 요소들이
때로는 그 사람을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
인생에 절대적 가치가 없듯이 절대적 장점이란 것도 없다.

 

(19) 남을 속이는 것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더 나쁘다.
갖가지 핑계로 게으른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자기 합리화가 반복되면 결국은
어떤 판단도 올바로 할 수 없게 된다.

 

(20) 이혼과 불륜은 완벽한 사랑의 환상에서 비롯된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는
완벽한 사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며 헛된 욕망일 뿐이다.
이혼과 불륜이 난무하는 이 현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21) 이별은 사랑의 가치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결코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도
사랑은 그대로 남아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워진다.

 

(22)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훌륭한 스승이 되기는 어렵다.
끊임없이 규칙을 만들고 강요하며 통제해야만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아이를 나약하고
비관적인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23) 어떤 사람은 아프다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한다.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거나
혹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을 때
우리는 몸져눕는 방법을 선택하곤 한다.

 

(24) 불필요한 두려움은 진정한 기쁨을 방해할 뿐이다.
이 사회는 온갖 다양한 것들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전쟁과 테러, 가난, 질병, 사업 실패 . . .
그것들은 단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행복을 방해한다.

 

(25) 부모가 자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훌륭한 부모가 되고 싶다면 통제하는 대신 따라오게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는 일이다.

 

(26) 아쉬운 기억일수록 낭만적으로 채색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기억은 곧잘 낭만적인 환상으로 부활한다.
과거의 낭만적인 기억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문제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27) 인생의 마지막 의무는 아름다운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다.
외로운 노년을 자식에게 기대려는 것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
노년의 상실감을 품위와 의지로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용감해질 수 있는 기회다.

 

(28) 세상에 실망할 수는 있지만 심각하게 살 필요는 없다.
온갖 부조리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
(29) 시련에 대처하는 방식이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을 자유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시련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련을 대처하는 여러 방식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30)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용서는 포기나 망각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의지이다.
원망이나 복수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내면의 성숙이 필요하고,
내면의 성숙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든 리빙스턴'의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성철 스님이 일생에 딱 두 번 했다는 결혼식 주례사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혼하기를 원해 놓고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할 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지고 이리저리 고릅니다.
손해 볼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 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덕 보겠다는 마음이 살다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 주고 70% 덕 보자고 하고,
남편도 한 30% 주고 70% 덕 보려고 합니다.
둘이 같이 살며 70%를 받으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 보면
십중팔구는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덕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해 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 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 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골라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르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덕 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 줘야겠다고만
다짐하면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말로 부조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좋은생각》 편집팀 / 2002년 7월호 중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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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을 사랑한 분

  며칠 전 어느 누군가가

  제게 이런 문자를 보내 왔어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요.

  “!?”

  전 깜짝 놀랐어요.

 

  저도 마음으로 미워하는 이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깊이 사귀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인데 말입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리 보인 것은

  어쩌면 나의 아픔을 감추려고 하는...

  어쩌면 나의 교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편 생각해 보면,

  그저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절해 보자고 한 것과

  가능하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 보자는 믿음의 의지인 것 같기도 하구요.

 

  오늘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이만 좋아할까 하고요.

 

  결론인즉슨,

  우리 안에는 ‘이기주의’적인 것만이

  가득하다는 결론을 내려 봅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받고자 하는 마음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신문사에서

  7년여 동안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저보고

  ‘그로서리’(grocery)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군것질 등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을 사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참 좋아했거든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출출하면

  제 서랍을 열면서 간단하게 요기들을 했지요.

 

  지출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그마한 정 하나 나누는 것인데

  사람들 마음 속엔

  제가 사랑이 많은 것으로 각인되었나 봐요.

 

  제 자랑을 함이 아니고

  지금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가 조금 더 이해하고 양보하고

  나누어 주고 사랑하다 보면

  우리들 주위가 한결 밝아지지 않을 까 해서입니다.

 

  이해함이란

  오해를 할 만한 일도 능히 이해함이고

  사랑함이란

  이기주의적인 것을 배제한 진실됨이라 봅니다.

 

  우리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 됨을 버리고

  스스로 죄의 종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그 분을 생각하고

  그 분을 닮아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해처럼달처럼 -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죽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본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조용히 앉아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평안하게 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매달려 있기를 원하지 않아요....
당신이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놓아 드립니다 조용히 가세요
나의 사랑를 안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 말은 진정한 선물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어 가고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해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친구들이 이 말을 자기 입술로 또는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야
그 안타까움을 알게 되는
못난 인간의 습성
내 자신도 그와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때면 매우 부끄러워집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못 만져보게 될 것처럼 만져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와 맛을 못느낄 것처럼
꽃향기를 마시며
매 손길마다 맛을 음미하십시오.

못 가진 것들이
더 많았지만 가진 것들을 충분히 누린
헬렌 켈러여사의 글입니다.

문제의 근원은
있고 없음이 아닙니다
없는 것들에 대한 탄식에
자신의 시간을 망쳐버리느냐
있는 것들에 대한 충만함에
자신의 영혼을 매진하느냐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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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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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해서는 안 되는 10가지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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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lover님의 블로그에서 옮긴사진




1. 숫자를 중시하고 쫀쫀하게 작은 것만 챙긴다.

2. 거짓말을 한다.

3.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4. 발상의 차원이 낮다.

5. 직함에 안주한다.

6. 자기에게 충성을 요구한다.

7.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핑계거리를 생각해둔다.

8. 부하나 타인의 공적을 가로챈다.

9. 사내 정치에 정신이 팔려 있다.

10.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죄사함

 

누가복음 10:17-20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칩십 인을 임명하시고 주께서 친히 방문하시려는 동네와 지역으로 그들을 미리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칠십 인에게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10:9).

 

이에 칠십 인이 각 동네와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들은 또한 병자들을 치유하며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메시아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라.

 

칠십 인은 맡겨진 동네와 지역을 다 돌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 후에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엄청난 역사들이 자신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심지어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이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흥분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기뻐하며 보고하였습니다.

주님!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8-19).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진 사건은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나 다시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계시록 12장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2:10).

 

이는 완전한 의를 이루신 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보혈을 흘리셨을 때 자기에게 속한 모든 백성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하늘에 올라가 주의 백성들을 참소할 수 있었는데 십자가 대속 이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참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1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3-34).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선명한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빛의 나라인 반면 사탄의 나라는 어둠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태양과도 같습니다. 감히 태양을 이길 수 있는 어둠이 어디 있습니까? 태양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칠십 인의 제자들은 마치 휏불이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둠은 휏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휏불 앞에서 어둠은 물러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 하나님 나라와 사탄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는데, 어두운 밤의 커다란 축구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년이 작은 성냥개비로 불을 켭니다. 어둠이 짙지만 그 빛이 멀리서도 보입니다. 그럼에도 성경개비의 에너지가 약하여 어두운 축구장을 전부 환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작 소년의 손바닥 만큼 희미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0개의 5000 와트 할로겐 램프가  환하게 켜지는 것입니다. 전력 공급을 강하게 받으며 20개의 할로겐 램프가 켜지자 축구장은 당장 대낮처럼 환해졌습니다. 이에 그 밤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축구를 하며 신이 나서 즐겼습니다. 영적으로 잘 훈련되어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 양 보좌로부터 강한 은혜를 받아 뿜어내는 그러한 할로갠 램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 중에 대낮이 생각이 났습니다. 끝없이 타오르는 가운데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태양이 지구를 밝힙니다. 그러면 가려진 곳 외에는 전부 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어두운 구덩이는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 구덩이에는 박쥐들과 뱀들과 더러운 곤충들이 우굴거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빛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빛이 너무나 싫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죽게 됩니다.

 

마귀들의 모습이 이와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 시대라는 밤이 지나고 커다란 태양이 떠오른 대낮이 신약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밝은 빛 가운데서 바람처럼 왕래하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빛이 싫어서 무정갱이라는 어두운 구덩이에 다들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범죄함으로 인하여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면 마귀가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공격하여 낚아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빛과 같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빛 앞에서 어둠의 세력은 물러갈 수밖에 없으며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에 거하면 마귀들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면 귀신들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자빠지며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죄를 좋아하여 어두운 구덩이로 들어가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비록 마귀는 무저갱이라는 어두움에 갇혀 있을지라도 누구든지 스스로 범죄하여 어둠의 구덩이로 들어오면 얼마든지 그 영혼을 사로잡아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불신자들은 한결같이 어둠에 속하여 있다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마귀는 그들을 얼마든지 주관하며 협박하여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2-3).

 

따라서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 가운데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어둠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빛의 생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 실제로 거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주께서 보내신 칠십 인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알든 말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함께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기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귀신 축사보다 무한하게 귀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귀신 축사 권능과 죄 사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하늘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이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다름 아닌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된 자들이라고 증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깨닫고 그 효력을 누리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의 특징은 마귀에게 결코 절하지 않습니다. , 죄의 세력에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속된 것과 가증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 7:1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0:15).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1:27).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내는 자들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7:20-23).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얼마든지 불법을 행할 수 있으며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라면 그들은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 불법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죄 사함 및 죄을 이기는 거룩의 비결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 거룩을 이루는 복음의 능력을 가르치지 못하는 선지자들은 귀신 축사를 할지라도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마귀의 나라는 뚜렷합니다. 그 나라에는 언제나 더러움과 어두움과 속임수과 거짓이 있습니다. 심한 미움과 심한 질투가 있습니다. 모함이 있고 협박이 심하고 진실함이 없습니다. 결코 죄성이 제거될 수 없습니다. 신경질과 거만함과 뻔뻔함과 이간질이 마귀 나라의 특징입니다. 놀랍게도 거짓 영이 활동하는 곳에는 깊게 숨겨진 음란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사탄의 세계는 철저한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은 폭력과 어둠의 세력으로 그 조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악령들의 세계는 여러 계급이 있으며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권세가 크고 간교함이 더욱 깊습니다.

 

특히 귀신 세계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인류를 속여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를 속여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세상 종교를 만들었으며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죄사함을 얻지 못하도록 하여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힘과 능력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가립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복음을 가리기 위해 사탄이 하는 가장 간교한 일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사탄은 이 사역을 이루기 위해 최고층의 악령들을 풀어 거짓 선지자들로 활동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심지어 사탄은 인간들을 유혹하기 위해 덜 영리하고 덜 힘이 센 천박한 귀신들을 쫓아내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습니다. 바로 귀신 축사 현상입니다.

 

특히 무당이 굿을 하자고 하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는 신유 및 귀신 축사 모임으로 가자고 합니다. 무당처럼 점을 봐주거나 개인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것 등은 전부 마귀가 하는 일들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생명을 담보로 하여 예언해 주고, 헌금을 담보로 하여 협박하며 예언한다면 이는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러한 집회에는 성령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으로 모임을 갖는다고 해도 실상은 고차원의 귀신들이 우굴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귀신을 내어쫓는 현상은 좀더 높은 귀신을 믿게 하여 사탄의 종이 되게 하려는 사탄의 전략일 뿐입니다. 따라서 귀신 축사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나 영을 따르면 사탄에게 속기 안성맞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으로부터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귀신 축사는 사탄의 장난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귀신 축사 집회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다 가짜들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이 거짓 기적과 속임수를 행할 수는 있어도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제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거룩으로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악과 거짓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결코 거룩과 진리로 인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짓 영들을 분별하는 원칙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복음,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다른 예수를 제시하거나 다른 영을 부르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가짜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권능이 보혈 흘리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통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 귀신들의 역사를 물리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귀신으로 인한 병마와 폭행과 더러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능력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14:17).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오는 것이며 또한 죄성을 이김으로 오는 빛의 열매들입니다.

 

이미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최종 영적 전쟁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계시록 20장에 의하면 악령들의 두목인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하여 성령께서 그를 결박하셔서 무저갱에 가두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마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총 사령관 아이젠아워의 노르만디상륙 작전에서 승리의 대전이 지난 후 남은 전쟁을 치루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예로 보면,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이기도록 되어 있던 전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전쟁을 뒷마무리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이미 승리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 개인은 공갈과 위협에 속아 패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싸움을 이 땅의 교회에게 허락하심으로 교회가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 주님의 남은 싸움에 동참함으로 면류관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고 마귀 쫓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얻은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며 전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우리에게 패배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영광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한편 이미 패배한 사탄의 세력은 마지막까지 발악할 것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 앞에서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6:20).

 

성경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누리면 평강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평강은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속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자들의 발 아래에 사탄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여 거룩을 향한 영적 전쟁을 기꺼이 치르고 있습니까? ,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상황 속에서 거룩한 주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인내하며 순종하십니까?

 

쓸데없이 빛의 나라에서 나와 다시 어둠의 나라에서 서성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험한 뒷골목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반드시 악한 자를 만나 어둠의 포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빛에서 나와 일부러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는 사자 마귀가 어둠의 세력 속에서 삼킬 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어둠 속에 갇힌 사탄은 결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행여 사탄이 불법의 사람들과 불법의 제도를 통해 주의 백성을 박해하고 어려움을 준다고 해도 성도의 머리털하나까지 세신 바 되시는 주 하나님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주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완벽하게 보호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병이 임할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올 수 있으며, 타락한 사회 속에서 많은 심적인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하여질 것이며 또한 언제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와 희락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승리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사탄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마귀에게 겁먹지 말고 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스스로 짓는 죄입니다. 사탄이 깔아놓은 유혹에 스스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망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나와의 싸움이 우리 신자들에게는 가장 큰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빠지지 말고 더욱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의식하면서 이미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전진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군사로서 믿음으로 이겨나가며 영광의 주를 닮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예수보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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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존 플라벨)

(Preaching Christ from the Decalogue)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영국의 회중교회 목사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완벽한 모범이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 앞에 그 어떤 신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말과 달리, 그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며, 안식일을 어기는 자들이며, 

그 외에도 많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보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감사하기를 바라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십계명에서는 순종이 구속에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이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그들이 구속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값없이 주어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식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율법을 감사의 부분에서 설명하면서 

다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실체입니다. 

이 말은 1번의 요점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 분(그분의 인성을 따라)일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에 따르면 

그 분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 

우리가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바로 그 대상이 되시는 분입니다. 



1. 제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제 1계명은 

우리에게 예수를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 구세주, 중보자로 예배할 것을 가르칩니다. 



2. 제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20:4-5)


제 2계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십니다.(골 1:15; 히 1:3) 

그분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그 어떤 다른 형상에 대한 예배도 배제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3.제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20:7)


제 3계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든 무릎이 엎드려야 할 바로 그 이름입니다. (빌 2:10-11; 비교. 사 45:23)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0-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4.제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8-10)


제 4계명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누리는 우리의 안식입니다.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우리는 일상의 할 일들로부터 물러나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눅 10:38-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5.제 5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제 5계명에서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고(히 2:10) 영광으로 이끄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6.제 6계명:살인하지 말라(출 20:13)

제 6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으로, 생명의 주님(행 3:15)으로, 

우리가 살도록 당신의 생명을 주신 분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요 10:10; 14:6; 갈 2:20; 골 3:4)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3: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요10:1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10)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 3:4)



7.제 7계명:간음하지 말라 (출20:14)

제 7계명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정결하고 흠이 없는 신부 삼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신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8.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출20:15)


제 8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기업으로(엡 1:11),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9.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제 9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요 1:17, 14:6)로 영광을 돌립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0. 제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제 10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외적인 필요와 우리 마음의 새롭게 된 욕망을 모두 만족시키는 

우리의 충만의 충만(고후 3:5,12:9)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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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오적(五賊)'

  
  1970년 5월 《사상계》에 발표된 작품이다. 담시(譚詩)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택해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시이다.

1970년대 초 부정 부패로 물든 한국의 대표적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조약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五賊)에 비유해 적나라하게 풍자함으로써,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시인의 존재를 널리 알린 문제작이다.

 

이 작품을 발표한 《사상계》는 폐간되고, 작가와 편집인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1960년대의 시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작품 속에서 일제 통치 시대의 수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오적'이라 일컫고, 이들을 모두 '犬(개 견)'자가 들어가는 신조어 한자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킨다. 짐승스런 몰골의 다섯 도둑들이 서울 장안 한복판에서 도둑질 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며 고대소설처럼 등장 인물들을 차례대로 풍자해 나간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들의 부정부패와 초 호화판의 방탕한 생활은 통렬한 풍자를 통해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부정 부패를 척결할 임무를 부여받은 포도대장(경찰 또는 사법부의 비유)이란 인물은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을 잡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매수되어 오적을 고해바친 죄 없는 민초 '꾀수'를 무고죄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고 자신은 도둑촌을 지키는 주구로 살아간다. 작가는 포도대장과 오적의 무리가 어느 날 아침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벼락맞아 급살한다는 고전적 기법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에 소실되어버린 민족의 가락을 되찾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목적 의식 아래 씌어진 작품이다. 창작 서사시로서 한국의 현대시문학사에 '담시'라는 새로운 형식과 전통적인 풍자 기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야기를 소리로 형상화함으로써, 특권 지배층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피지배계층의 한을 드러낸 점과 판소리를 계승 발전시킨 점은 높이 평가된다.

  "꼭 읽어야할 현대시 222선"에서 퍼왔습니다

  이 시는 1970년 5월 '사상계'를 통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이름으로 발표, 파문과 물의를 일으키며 김지하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오적'은 민중의 집단적 창조력에 의해서 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예술 형식의 하나인 판소리 양식으로 뒷받침되어 있으며, 일제 식민 통치의 암흑기 속에서 쇠잔하고 소실되어 버린 민족의 가락을 되찾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목적 의식 아래 씌어졌다. 그것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문학의 새로운 진로에 큰 빛을 던져 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이 시를 대할 때에는 그 안에 담긴 내용 못지 않게 양식과 가락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담시란 '단형 서정시보다 길고 단편 소설보다 짧은' 길이 속에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기습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 시'의 독특한 장르이다. 기습성(담시의 발표 연도와 정치적 사건의 맥락에서의), 공격성(반민중적 소수 집단을 향한 정치적 풍자시라는 점에서), 이야기 전달성(담시의 형식적인 면과 감추어진 진실의 폭로라는 의도에서) 등의 특성을 지닌 이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역사적 현실의 가장 첨예한 내용의 요청에 부응하려는 시도에서 그 정당성을 지닌다.


  '오적'을 보면 대뜸 느낄 수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은 표면 구조에 있지 않고 심층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적이라고 못 박은 사람들 즉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일제 식민 통치의 수혜 특권층이라 할 수 있다.

 

이 오적을 통해서 의도한 바는 이 작품에 그린 과장되고 희화화되고 풍자의 대상이 된 모든 인물들의 행태가 바로 불식되지 못한 일제 식민 유산의 부산물로,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근대화된 통치 질서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식민 잔재의 완전한 청산을 통한 새로운 인간에 의한 새로운 통치 이념의 구현이 필요하다는 방향 제시였다고 할 수 있다. 

 

 


  1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 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 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 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 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 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죽
  남북 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 배꼽 같은
  천하 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 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 안에는 큰 황소 불알 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 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 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으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 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듯, 구름은 둥실
  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 쌌는다.


  2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지, 금단추, 금넥타이 핀, 금카후스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니,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치고 간장 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 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과 마늘 곁들여
  나름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 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 몫 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 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 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빰 치겄다.

  또 한 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 투성이 몽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 일성, 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 축재는 축재 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 선거는 선거 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잡농(雜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 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兵不) 후사, 치자즉도자(治者卽盜者)요 공약즉공약(公約卽空約)이니
  우매(遇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3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 공무원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 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 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어허 저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보고 히뜩히뜩 저쪽보고 혜끗혜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간같이 높은 책상 마당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도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 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 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 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 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탈 없다더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長猩) 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 졸개 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이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 공단 울긋불긋, 천 근 만 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차고 저기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 쉬엇 열중 열중 열중 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 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 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서수공방전(雲雨魚水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 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 고여 삐져 나와
  추접무화(無化)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팔려도 증산이닷, 아사(餓死)한 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 날라 질근질근 껌 씹으며
  켄트를 피워 물고 외래품 철저 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 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 듣고 뒤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 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 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4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 추리것다
  똥줄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겄다.
  이라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이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하늘에 날벼락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내려 쏟아져 퍼붓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사돈네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벌이고 멧돌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 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 뜯고 물어뜯고 업어 메치고 뒤집어 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 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작신 조지고 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되민중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이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 합쳐서
  우범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배고파서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네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 없이 쏙쏙 기어나오는 건
  아니랑께롱
  한 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이 꾀수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 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 있나 말만 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놈 이 말 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오.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됐다 내 새끼야 그말을 진작하지
  포도대장 하도 좋아 제 무릎을 탁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 버렸겄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死)는 사(私)요, 공(功)은 공(公)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라
  안 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레 같은 저 함성 범 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 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갖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 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 손상, 백성 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렸다.


  5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 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 푸른 용트림이 기둥 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 십 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 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 원짜리 외국(外國)개
  천만 원짜리 수석 비석(瘦石肥石), 천만 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 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 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門)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두고 경제학박사 회계 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두고
  경제학박사 집사 두고 가정 교사는 철학 박사 비서는 정치학 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 박사
  박사 박사 박사 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 속에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 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 속에 냉장고 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 얹어 기둥은 코린트식(式) 대들보는 이오니아식(式)
  선자추녀 쇠로 치고 굽도리 삿슈 박고 내외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벽에 갈포 발라
  앞뒷퇴 널찍 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 매달아 부연얹고
  기와 위에 이층 올려 이층 위에 옥상 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風), 본따 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風), 돼지우리 왜풍(倭風)당당
  집 밑에다 연못 파고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층층 모아놓고
  열어 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 듯 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 함롱, 봉그린 용장, 용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 층 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한 옥쟁반, 삘딩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밥그릇, 전자주전자, 전자젓가락, 전자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가방, 쇠유리병, 흙나무그릇, 이조청자, 고려백자, 거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 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鳥蝴蝶人物)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 점 걸어 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 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토기, 당화기, 왜화기, 미국화기, 불란서화기, 이태리화기, 호피 담뇨 씨운테레비, 화류문갑 속의 쏘니 녹음기,

  대모책상 위의 밋첼 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 만년필, 촛불 켠 샨들리에,

  피마주 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 직접 직사 곡사 천장 바닥 벽 조명이 휘황칸칸 호화율율.
  여편네들 치장 보니 청옥 머리핀, 백옥 구두 장식,
  황금 부로취, 백금 이빨, 밀화 귓구멍 마개, 호박 밑구멍 마개, 산호 똥구멍 마개,
  루비 배꼽 마개, 금파 단추, 진주 귀걸이, 야광주 코걸이, 자수정 목걸이, 싸파이어 팔지
  에머랄드 팔지, 다이야몬드 허리띠, 터키석 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 원짜리 납반지가 번쩍번쩍 칠흑 암야에 횃불처럼
  도도 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구이, 돼지 콧구멍 볶음, 염소 수염 튀김, 노루 뿔 삶음, 닭 네 발 산적, 꿩 지느라미 말림,
  도미날개지짐, 조기 발톱 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무침,
  낙지해삼비늘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 안 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면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 식혜,
  파인애플 화채, 무화과 꽃잎 설탕 버무림,
  롱가리트 유과, 메사돈 약과, 사카린 잡과, 개구리알 구란탕, 청포 우무, 한천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째주, 보드카, 람주(酒)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
  놀랠 놀짜로다
  저게 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 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6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 잔 두 잔 헐레벌떡 석 잔 넉 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 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는지 이빨이 확 닳아 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내 부딪쳐가면서 씹어 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 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가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꺼나
  콩알 같은 꾀수 묶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 꾀수 어쩔꺼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 와 돈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잡나
  잘 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 가거라.


  7
  꾀수는 그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 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 하매,
  포도대장 이말 듣고 얼시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 속에서 내내   잘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 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  

 

잡지 '思想界'를 김지하 시인의 이 담시가 실린 후 폐간되었습니다.

現代文學 지와 사상계는 꼭 사보았는데 이때 오적이 실린 사상계를 몇 달간 보지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적'이란 시는 친구 노트 필기 한 것을 처음 대한 기억이 납니다. 이때는 '오적'을 안다고 하면 가막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현대의 오적'은  더욱 진화했습니다.  동산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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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딜레마(The Dilemma of Life)

부활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우리들 대부분은 이 새 생명을 기다리는 것 대신에,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생활, 즉 부활하신 주님과
교류하는 생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차차 죽음의 문을 지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이 욕망을 충족시키고픈 욕구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욕구를 강하게 경험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를 뜻한다면
나는 생사간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또 그것이 훨씬 더 좋지만 여러분을 위해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빌립보서 1:21~24)

이런 딜레마를 가진 사람들은 드물지만,
이것은 영적 투쟁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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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그런 똑똑한 사람은 쉽게 교만에 빠지기 쉬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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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배부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배부른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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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가난하고 비천하여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더이상 낮아질 것이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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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40년은 연단 받았던 모세처럼
교만하고 혈기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깨트려서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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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며
온유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善으로 惡을 정복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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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최송연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기적의 우산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기적의 우산을 찾지 못했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캄캄한 밤이면
    나는 언제나 당신의 음성 듣기를 원했으나
    그 속에서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풀무불 같은 시련이 
    내 모든 삶을 태워버릴 것만 같을 때면
    나는 언제나 당신의 도우심의 손길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당신의 도우심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큰 파도같은 고난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을 때면
    나는 언제나 당신께 구원의 밧줄을 구했으나
    그 속에서 구원의 밧줄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주여,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폭우를 막아준 것은
    싸구려 우산이 아니라
    당신 옷깃으로 나를 덮어주셨음을....
     
    푹풍 속에서 내가 원하던
    주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을지라도
    당신의 품속에서 내가 고이 잠들 수 있었음을...
     
    풀무불 같은 시련 앞에서 
    건져주신 것 아니라 
    그 풀무불 속에 함께 따라들어 오셔서 
    나를 품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심을...
     
    넘실대는 파도 속에 
    구원의 밧줄을 던져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온몸을 던져 
    그 물결을 친히 막아 나를 구하여 내셨음을....
     
    내 주여,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해야만 했던 
    그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골짜기들...
    그곳에 당신은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보다 더 많이 아파하셨음을...
     
     
     
    ♬ 흐르는 곡 ~ ♡   God will make a way 나의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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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그런 것
/ 최송연

 

마음에 준비함 없는데 불쑥 찾아온 지난겨울 내겐 너무 혹독했었네 밤낮없이 쏟아져 내리는 진눈깨비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지 만사가 그러하듯 제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꽁꽁 얼어붙은 저 창가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봄 햇살이 화사한 미소로 찾아든다는 것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희노애락(喜怒哀樂), 삶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니까 **단어 해석 도우미** **겨울 =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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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들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한글 킹제임스 성경도  마찬가지)은  오역이라고 봅니다.

 어느 분이 이런 글 올렸더군요. 

 

"누가 8/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기를 “군단이니이다.”
라고 하더라. 이는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And Jesus asked him, saying, What is thy name? And he said, Legion: because many devils were entered
into him.) kjv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의 악령을 쫓아내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라고 하지만, 영문성경(KJV)에는 귀신이 아니라 마귀(devils)입니다.
킹제임스(KJV) 성경은 세계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 받고,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또한 히브리 원문과 헬라 원문을 가장 잘 번역한 영문성경입니다.

Legion은 군단(로마 군단은 3000~6000명)으로 한 사람의 몸에 수 천명의 마귀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마귀들의 감옥인 무저갱으로 쫓아 내지 마시고, 돼지 떼에게 들어가길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이를 허락하자 마귀들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 호수에 빠집니다.
물 속은 마귀들의 또 다른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http://cafe.daum.net/kmc4755"

 

---------------------------------------------------------------
위의  글에 대한 저의 반론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오역중의 하나가 마귀를 단수와 복수와 혼용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디아볼로스(마귀)는 신약 성경에 항상 단수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단과 동의어입니다.
사단은 "사타나스"로 읽습니다.
마4장과 막1장은 동일한 사건
마4:4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 기본형: 디아볼로스
막1:13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 기본형:사타나스
 
동일한 사건에서 마태복음에서는 마귀로 마가복음에서는 사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단(사타나스)과 마귀(디아볼로스)는 모두 단수로 기록되었습니다.

킹제임스성경 눅8:30의 many devils는 오역입니다.
many demoms가 제대로 번역된 것입니다.
"다이모니아(demoms) 폴라(many)" 이렇게 헬라어는 기록되었습니다.

다이모니온은 "귀신(demon)"입니다.
다이모니아 -->는 "귀신들"입니다. 다이모니아는 다이모니온의 "중성 복수 주격"에 해당합니다.
 
devils(마귀들)라고 했다면 기본형이 "디아볼로스(마귀)"가 남성명사이기에
" 남성 복수 주격(마귀들)을 나타내려면 "디아볼로이"라고 기록하고
수식하는 형용사도 명사와 성, 수, 격을 일치시켜 "폴로이"라고 해야합니다.
따라서 많은 마귀들이라면 "디아볼로이 폴로이"이렇게 썼어야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디아볼로이(마귀들)" 이런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없습니다."
킹제임스가 이부분에서와 다른 부분에서도 "devils"라고 번역한
것은 큰 오역중 하나입니다.
그부분은 모두 "demons(귀신들)"이라고 번역하여 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단어 자체(알페벳 순서와 단어의 모양)가 다릅니다.

 

 

한글 킹제임스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마귀들 혹은 devils로 기록되었으나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역에는 검색하면 마귀들이라는 단어는 안나오는 군요.

 

참고로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프로그램에

영역 " NIV, NLT,NASV, NKJV, GNT" 에 devils를 검색하면 나오는게 없습니다.

KJV와 MSG에서만 devils가 검색 됩니다.

제가 이 글을 언급하는 이유가 지나치게  킹제임스 성경을 신뢰하여 마치 킹제임스 성경만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을 밝히고 때문이고, 혹시 그 말에 미혹 받지 말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한글킹제임스와 영어 킹제임스에 나오는 "마귀들 혹은 devils"와 관련 성경구절입니다.

(마 7:22, 한글킹)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마 8:31, 한글킹) 『그 마귀들이 주께 간청하여 말씀드리기를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우리로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마 9:34, 한글킹)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마귀들의 왕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니라.』
(마 10:8, 한글킹)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 쫓으라.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마 12:24, 한글킹)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귀들의 통치자인 비엘세불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
(마 12:27, 한글킹) 『그러므로 내가 비엘세불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자식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들을 쫓아내겠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한글킹)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 그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
(막 1:32, 한글킹) 『저녁이 되어 해가 기우니 그들이 병든 자들과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모두 주께 데리고 오더라.』
(막 1:34, 한글킹) 『그때 주께서 갖가지 병으로 앓고 있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시니라. 그러나 그 마귀들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들이 주를 알고 있기 때문이더라.』
(막 1:39, 한글킹) 『그리하여 주께서 온 갈릴리에 있는 회당에서 전파하시고, 또 마귀들을 쫓아내시더라.』
(막 3:15, 한글킹) 『또 병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세를 지니게 하려 하심이더라.』
(막 3:22, 한글킹) 『또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내려와서 말하기를 "그가 비엘세불에 들렸다.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더라.』
(막 5:12, 한글킹) 『모든 마귀들이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그들에게로 들어가겠나이다."라고 하더라.』
(막 6:13, 한글킹) 『그들이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붓고 병을 낫게 하더라.』
(막 9:38, 한글킹) 『요한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기에 못하게 하였나이다."라고 하니』
(막 16:9, 한글킹) 『예수께서 그 주의 첫날 일찍 살아 나신 후, 전에 주께서 일곱 마귀들을 쫓아내 주신 막달라 마라아에게 먼저 나타나시니라.』
(막 16:17, 한글킹)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눅 4:41, 한글킹)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하자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 마귀들이 주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더라.』
(눅 7:33, 한글킹) 『침례인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므로 너희가 말하기를 '그가 마귀들렸다.' 하고』
(눅 8:27, 한글킹) 『주께서 땅에 내리시자 그 성읍 밖에서 오랫동안 마귀들린 어떤 사람이 주를 만나게 되었는데 옷도 입지 않고 집에서 살지도 않고 무덤에서 지내더라.』
(눅 8:30, 한글킹) 『예수께서 그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기를 "군단이니이다."라고 하더라. 이는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
(눅 8:31, 한글킹) 『마귀들이 주께 간청하기를 그들에게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눅 8:32, 한글킹) 『마침 저쪽 산에서 많은 돼지떼가 먹고 있는지라. 그 마귀들이 그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주께 간청하니 주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시더라.』
(눅 8:33, 한글킹) 『마귀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로 들어가니 그 돼지떼가 비탈길을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 죽더라.』
(눅 8:35, 한글킹) 『그러자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나가 예수께로 와서 마귀들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으며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눅 8:36, 한글킹) 『또한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그 사람이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말해 주더라.』
(눅 8:38, 한글킹) 『이제 마귀들이 나간 그 사람이 주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눅 9:1, 한글킹) 『그 후에 주께서 열두 제자를 모두 불러서 모든 마귀들을 다스리며 병을 고치는 권세와 권위를 그들에게 주시고』
(눅 9:49, 한글킹) 『요한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못하게 하였나이다."라고 하니』
(눅 10:17, 한글킹) 『그 칠십 명이 기쁨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을 대면 마귀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라고 하니라.』
(눅 11:15, 한글킹)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기를 "그는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비엘세불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더라.』
(눅 11:18, 한글킹) 『너희가 말하기를 내가 비엘세불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니 만일 사탄이 자신을 대적하여 갈라지면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
(눅 11:19, 한글킹) 『만일 내가 비엘세불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들을 쫓아내겠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눅 11:20, 한글킹) 『그러나 만일 내가 하나님의 손길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 분명하도다.』
(눅 12:24, 한글킹)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으며 저장고나 곡물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시느니라. 너희는 그 새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3:32, 한글킹)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그 여우에게 말하라. 보라, 오늘과 내일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려니와 셋째 날에는 온전하게 되리라.』
(요 8:48, 한글킹) 『그때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하기를 "네가 사마리아인이며 마귀들렸다고 한 우리가 올바로 말한 것이 아니냐?"고 하니』
(요 8:49, 한글킹)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마귀들린 것이 아니라 다만 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있을 뿐인데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있도다.』
(요 8:52, 한글킹)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주께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네가 마귀들린 것을 알게 되었노라. 아브라함도 죽었고 또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네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으니』
(요 10:20, 한글킹) 『그때에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그는 마귀들리고 미쳤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듣느냐?"고도 하며』
(요 10:21, 한글킹)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은 마귀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마귀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고전 10:20, 한글킹)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고전 10:21, 한글킹) 『너희는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으며, 너희는 주의 식탁과 마귀들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없느니라.』
(딤전 4:1, 한글킹)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약 2:19, 한글킹) 『네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니 잘하는 것이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계 9:20, 한글킹) 『그리고 이러한 재앙으로 죽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행한 행실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마귀들과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 금, 은, 동, 돌과 나무로 된 우상들에게 경배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계 16:14, 한글킹) 『그들은 기적들을 행하는 마귀들의 영들이라. 그 영들은 이 땅과 온 세상의 왕들에게로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날의 전쟁을 위하여 그 왕들을 모으더라.』
(계 18:2, 한글킹)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

------------

(마 4:24, KJV) 『And his fame went throughout all Syria: and they brought unto him all sick people that were taken with divers diseases and torments, and those which were possessed with devils, and those which were lunatick, and those that had the palsy; and he healed them.』
(마 7:22, KJV)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in thy name? and in thy name have cast out devils? and in thy name done many wonderful works?』
(마 8:16, KJV) 『When the even was come, they brought unto him many that were possessed with devils: and he cast out the spirits with his word, and healed all that were sick:』
(마 8:28, KJV) 『And when he was come to the other side into the country of the Gergesenes, there met him two possessed with devils, coming out of the tombs, exceeding fierce, so that no man might pass by that way.』
(마 8:31, KJV) 『So the devils besought him, saying, If thou cast us out, suffer us to go away into the herd of swine.』
(마 8:33, KJV) 『And they that kept them fled, and went their ways into the city, and told every thing, and what was befallen to the possessed of the devils.』
(마 9:34, KJV) 『But the Pharisees said, He casteth out devils through the prince of the devils.』
(마 10:8, KJV) 『Heal the sick, cleanse the lepers, raise the dead, cast out devils: freely ye have received, freely give.』
(마 12:24, KJV) 『But when the Pharisees heard it, they said, This fellow doth not cast out devils, but by Beelzebub the prince of the devils.』
(마 12:27, KJV) 『And if I by Beelzebub cast out devils, by whom do your children cast them out? therefore they shall be your judges.』
(마 12:28, KJV) 『But if I cast out devils by the Spirit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is come unto you.』
(막 1:32, KJV) 『And at even, when the sun did set, they brought unto him all that were diseased, and them that were possessed with devils.』
(막 1:34, KJV) 『And he healed many that were sick of divers diseases, and cast out many devils; and suffered not the devils to speak, because they knew him.』
(막 1:39, KJV) 『And he preached in their synagogues throughout all Galilee, and cast out devils.』
(막 3:15, KJV) 『And to have power to heal sicknesses, and to cast out devils:』
(막 3:22, KJV) 『And the scribes which came down from Jerusalem said, He hath Beelzebub, and by the prince of the devils casteth he out devils.』
(막 5:12, KJV) 『And all the devils besought him, saying, Send us into the swine, that we may enter into them.』
(막 6:13, KJV) 『And they cast out many devils, and anointed with oil many that were sick, and healed them.』
(막 9:38, KJV) 『And John answered him, saying, Master, we saw one casting out devils in thy name, and he followeth not us: and we forbad him, because he followeth not us.』
(막 16:9, KJV) 『Now when Jesus was risen early the first day of the week, he appeared first to Mary Magdalene, out of whom he had cast seven devils.』
(막 16:17, KJV) 『And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In my name shall they cast out devils;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눅 4:41, KJV) 『And devils also came out of many, crying out, and saying, Thou art Christ the Son of God. And he rebuking them suffered them not to speak: for they knew that he was Christ.』
(눅 8:2, KJV) 『And certain women, which had been healed of evil spirits and infirmities, Mary called Magdalene, out of whom went seven devils,』
(눅 8:27, KJV) 『And when he went forth to land, there met him out of the city a certain man, which had devils long time, and ware no clothes, neither abode in any house, but in the tombs.』
(눅 8:30, KJV) 『And Jesus asked him, saying, What is thy name? And he said, Legion: because many devils were entered into him.』
(눅 8:33, KJV) 『Then went the devils out of the man, and entered into the swine: and the herd ran violently down a steep place into the lake, and were choked.』
(눅 8:35, KJV) 『Then they went out to see what was done; and came to Jesus, and found the man, out of whom the devils were departed, sitting at the feet of Jesus, clothed, and in his right mind: and they were afraid.』
(눅 8:36, KJV) 『They also which saw it told them by what means he that was possessed of the devils was healed.』
(눅 8:38, KJV) 『Now the man out of whom the devils were departed besought him that he might be with him: but Jesus sent him away, saying,』
(눅 9:1, KJV) 『Then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vils, and to cure diseases.』
(눅 9:49, KJV) 『And John answered and said, Master, we saw one casting out devils in thy name; and we forbad him, because he followeth not with us.』
(눅 10:17, KJV) 『And the seventy returned again with joy, saying, Lord, even the devils are subject unto us through thy name.』
(눅 11:15, KJV) 『But some of them said, He casteth out devils through Beelzebub the chief of the devils.』
(눅 11:18, KJV) 『If Satan also be divided against himself, how shall his kingdom stand? because ye say that I cast out devils through Beelzebub.』
(눅 11:19, KJV) 『And if I by Beelzebub cast out devils, by whom do your sons cast them out? therefore shall they be your judges.』
(눅 11:20, KJV) 『But if I with the finger of God cast out devils, no doubt the kingdom of God is come upon you.』
(눅 13:32, KJV) 『And he said unto them, Go ye, and tell that fox, Behold, I cast out devils, and I do cures to day and to morrow, and the third day I shall be perfected.』
(고전 10:20, KJV) 『But I say, that the things which the Gentiles sacrifice, they sacrifice to devils, and not to God: and I would not that ye should have fellowship with devils.』
(고전 10:21, KJV) 『Ye cannot drink the cup of the Lord, and the cup of devils: ye cannot be partakers of the Lord's table, and of the table of devils.』
(딤전 4:1, KJV) 『Now the Spirit speaketh expressly, that in the latter times some shall depart from the faith, giving heed to seducing spirits, and doctrines of devils;』
(약 2:19, KJV) 『Thou believest that there is one God; thou doest well: the devils also believe, and tremble.』
(계 9:20, KJV) 『And the rest of the men which were not killed by these plagues yet repented not of the works of their hands, that they should not worship devils, and idols of gold, and silver, and brass, and stone, and of wood: which neither can see, nor hear, nor walk:』
(계 16:14, KJV) 『For they are the spirits of devils, working miracles, which go forth unto the kings of the earth and of the whole world, to gather them to the battle of that great day of God Almighty.』
(계 18:2, KJV) 『And he cried mightily with a strong voice, saying, Babylon the great is fallen, is fallen, and is become the habitation of devils, and the hold of every foul spirit, and a cage of every unclean and hateful bird.』

 

출처: 개혁주의마을/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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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지난해 10월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아멘넷은 주강사 박영돈 목사(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의 세미나 내용를 시리즈로 소개한바 있다.

관련 세미나 기사 보기
- 박영돈 목사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 ①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②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①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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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 신비체험을 원하는 교인을 어떻게 지도하나?


다음은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본문으로 "더 좋은 섬김의 길"이라는 제목의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내용으로 우리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박 목사는 본문의 마르다를 통해 주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의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는 목회자들을 조명했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교회의 세속화를 인간본연의 인정의식에서 찾았으며, 목회자의 탁월성조차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목사의 비전과 목회관이 교회가 나갈 방향을 결정한다. 목사의 경건과 영성이 교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종류의 교인으로 비유가 되곤한다. 성경공부시간에 참석하지 않고 주방에 가 일하는 교인은 마르다와 같이 문제가 있는 교인으로, 성경공부 시간에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을 공부하는 교인은 마리아와 같은 착실한 교인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이 말씀때문에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은 성경공부에 들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 일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다 아실것이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포커스를 잃어버린 봉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의도와 정성은 귀한것이다. 문제는 마르다는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신대로 주님을 섬긴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방식대로 주님을 섬긴것이다.

주님의 포커스와 사역자의 포커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것이다. 주님은 그런 대접과 섬김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마르다 자신을 원하셨다. 마르다와 교제를 원하셨다. 마르다가 먼저 자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먼저 마르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마르다를 섬겨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섬김의 방식은 주님이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율법주의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기가 수고한것에 대한 보상의 심리, 그리고 공로의 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그녀를 보게된다. 마르다는 주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주님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수고하지 않는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처럼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비난한 것 처럼 마르다도 자신의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마르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과정속에서 율법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신앙생활의 과정속에서 다시 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안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성취지향적인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안에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야먕과 계획과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나의 야망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혼돈할때가 많다.

주님의 일을 하지만 우리들의 포커스가 주님이 아니라 일. 그리고 사역의 성과일때가 많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주님의 영광은 파이널이 아니라 세미 파이널인 경우가 많다. 배후에 숨겨진 파이널,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광이고 나의 성공일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자주 잊어버린다. 주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야겠다, 설교의 성과를 좀 올려야겠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릴수가 있다. 목사에게 사역의 우상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아니라 사역에 오리엔트가 되버린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읽고 공부한다. 기도를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하기보다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끌어당기는 방편으로 하게 된다. 교인들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목회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님까지도 도구화 하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끌어당겨서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을 꾀하려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과의 깊은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 우리사역의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경건의 피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사역이 더 열매를 맺게되고 우리의 메세지가 은혜로워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만큼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섬김을 받는 만큼 섬길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는 만큼 우리도 생명을 흘러 보낼수가 있다. 목회사역에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별로없기에 영적인 적자에 허득이고 있다. 그래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염려와 근심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국에 영적으로 고갈됨으로 교회 전체에 영적인 피폐함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목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 자기를 관리하는 일 즉 '자기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목회가 사실 가장 어렵다.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목사 자신이다. 자신때문에 가장 힘들때가 많다. 나의 욕심, 야망,  교만, 조급증, 자기중심적인 성정, 인격의 미숙함때문에 목회에 어려움을 격을때가 많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나는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골치아픈 나를 내가 어찌할수 없다. 주님이 나를 목회하실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 나의 옛 자아를 주님이 매일 져주셔야 우리들은 목회를 할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로 게속 못박혀야, 우리들의 야먕과 교만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온전한 목회를 감당할수 있다. 옛 자아의 짐을 매일 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가장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내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나를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교회안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의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부흥하게 된다.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우리의 옛 자아의 정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 목사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경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탁월한 것이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학적인 영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 보다 나에게 어느 정도 쏠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탁월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주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일부분을 가로채게 된다. 목사가 헌금을 도독질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수 없는 악질적인 죄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더 훌륭한 목사일수록, 더 거룩한 목사일수록, 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목사일수록 마귀적인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우상숭배를 은근히 유도하는 존재이다. 우상으로 숭배받고 싶은 교주 근성이 우리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을 존경은 해야 하지만 너무 추앙하면 안된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존경해야 하지만 너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주의 종은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너무 영광스러운 곤란하다. 사인판은 심플할수록 간단할수록 좋다. 사인판이 너무 화려하고 특출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사람들이 사인판을 보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탁월한 목사가 대형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더 바라보고 존경하게 된다. 장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인데, 우리 교단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그렇게 존경한다. 박 목사가 작고하기 전에 80세가 되어 교인들에게 "나는 80년된 죄인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그 말을 전하면서 박 목사님이 그렇게 휼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더 그를 존경하게 된다. 물론 박 목사님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훌륭한 분일수록 그렇게 겸손의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겸손의 말을 하면 교인들의 목사를 더 존경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건의 팡파레를 할 필요가 없다.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고 추앙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교인앞에서 좀 망가지면 된다. 좀 찌그러지면 된다. 좀 파손되고 망가진 우상을 교인들은 보기가 싫으니 숭배안한다. 그런데 목사중에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남자들은 지도자로서 교인앞에 망가지고 찌그러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깨뜨려 주신다. 망가뜨려 주신다. 그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시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을 주신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약간 모자라야 한다. 2% 부족한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비결이다. 그것이 은혜의 통로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아주 탁월한 사람과 하나님은 일을 같이 안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가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보잘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의 약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신비의 베일로 가린다. 교인들의 추앙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자기의 탁월함을 좀 감추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약할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가고, 약하고 부족할때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니,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세속화와 인정욕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장 무거운 짐,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는 그런 은혜를 점진적으로 체험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잃어버리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비전과 목표가 하늘의 영광과 인정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영광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안에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인정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우리안에 심리와 욕구를 계속 부추겨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속에서 내가 좀 더 앞서고 뛰어나고 더많이 소유하고 성취함으로 내가 굉장한 사람이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을때 우리는 살맛이 난다. 그제서야 삶의 희열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에 우리는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위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심사위원으로 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실패한 사람인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평가를 받는데 노심초사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 나자신마저도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저변에 인정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인정 중독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중독이 치유되기 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수 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인정욕구가 우리안에서 강하게 발동하는 것을 체험한다. 세상에서 못이룬 인정욕구를 교회안에서 주의 일을 하면서 이루어 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이라도 맡게되면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와 갈등은 그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식으로도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랑할것이 없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욕구를 목사가 되어서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큰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일을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기독교 연합단체의 회장이 되기위해 20억이라는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참으로 정신없는 목사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가 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사를 보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안에 숨은 명예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주의 사역을 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인정에 더 목말라하며 주의 일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가져본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쇼를 할때가 너무나 많다. 나도 치유를 받아야 할 가련한 인정 중독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은혜가 없는데 은혜있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는데 무진 애를 쓰게되고, 아주 괜찮고 솔직하고 의식있는 목사라는 그러한 좋은 목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 인정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

이런 인정중독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 당시에 랍비의 발앞에 앉는것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영광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안에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 우리들이 성령안에서 주님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의 일꾼들, 사역자들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수있다. 옛 언약,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도 누리지 못했던 축복이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지만 율법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에 가려진 것 처럼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과 고린도 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말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주님의 영광을 알지못하는 사람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헛된 명예를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쫓는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온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은혜의 풍성함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고 도취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은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것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우리안에 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아름다우심과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게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때 우리안에 가장 강한 욕망인 인정욕구가 변하게 된다.

인정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이다. 기독교는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욕망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상반된다. 욕망을 비우면 큰일난다. 더 악한 욕망 일곱이 들어와 앉을수가 있다. 기독교는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종교이고, 더 거룩한 욕망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열망이 없이 아무도 주님을 바르게 섬길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장 사모하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목사가 된다. 영광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바라보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 추구하고 살며 사역을 할때 우리가 종말의 주님께 들을 칭찬을 미리 성령안에서 부분적으로 듣게된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의 길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종말에 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미리 종말의 영인 성령안에서 듣게된다. 육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윽한 만족과 평안으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들고 더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주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평안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것이다. 이런 은혜가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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